2020년 10월 13일 화요일

인싸들을 죽이자.

 

"미국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클리셰는 항상 최악의 성차별주의자들은 항상 체격만 좋고 공부는 전혀 안 하는 고교 운동선수들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 세계는 실제는 전혀 다름을 보여준다. 인터넷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오히려 너드nerd 성향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착한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를 사귄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증오로 가득 차 있고 타인의 행복에 미친듯이 시기심을 느끼는 인종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라는 것이다. 비슷하게, 60년대 이후로 서구 대중문화를 지배해왔던 미학적 가치들, 이를테면 위반, 전복, 반문화와 같은 것들이야말로 오늘날 온라인 극우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극우는 종래의 전통적인 편견들로 가득하지만 니체적인 반-도덕주의에 힘입어 기독교 윤리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과거의 극우와는 다르다."


영미권에서 쓰이는 Normies라는 말은 우리말로 '인싸'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직역하면 평범한 사람들인데, 20+n살이 넘도록 제대로 된 이성교제 경험이 없고 동성인 친구마저 극히 적은 본인들의 비참한 아다인생과는 다르게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시기, 질투, 더 나가면 저주까지 하고 살인도 불사하는 그러한 멘탈리티가 집약된 단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스스로 '아싸'라고 주장하는 한국에서의 '인싸'의 용례와는 약간 다르다. 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PC방 살인사건까지, 알파메일alpha male에 의해 번식 경쟁에서 탈락했다고 믿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베타메일beta male의 원한감정은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이라는 신조어로부터 짐작 가능하듯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미국에서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셀의 멘탈리티를 가진 자들이 정치세력화하면 대안우파alt-right로 호명된다. 이들이 인터넷 공론장에서 벌이는 온갖 트롤링, 극우주의적 언동들을 해설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어왔다. 대체로 살기 힘들어지고 여기저기 헤게모니에 빵꾸가 뚫리면서 다양하게 발생하는 병리적 현상이라든지, 진보 보수를 대표하는 양대 정당에서 호소력있는 정치를 하는 데 실패해 앞뒤 가리지 않는 망동들이 주목을 독점하게 됐다든지라는 얘기로 요약 가능하다. 저자 안젤라 네이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망동의 원천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디씨나 일베에 비견되는 4chan과 게이머게이트와 같은 사이버불링의 현장이 그것이다.



현대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밈이다. 한국에서도 유행어나 '짤'이라는 말 대신 밈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밈은 뭐든지 될 수 있다. 고릴라 하람베, 개구리 페페에서 마일로 이아노풀로스, 산타바바라 총기난사 사건의 엘리엇 로저까지 동물이건 그림이건 인물이건, 대안우파들을 움직이는 밈들의 변천사를 이 책은 보여준다.

이러한 밈들의 극우정치적 전용, 언어유희를 활용한 신조어와 은어들의 공론장 오염은 상황주의 전략들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68혁명을 위시한 신좌파 운동이 오늘날 대안우파의 반인륜적 망동들을 배태했다고 주장한다. 먼저 사드부터 니체, 바타유, 바네겜, 바흐친 등 68에 영감을 제공한 사상을 훑는다. 이것이 인터넷 발전에 힘입어 뒤늦게 위반과 전복의 가치가 문화의 주류를 점하게 된다. 그에 따라 아랍의 봄, 월가점령 등의 대중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리더 없는 투쟁'과 '금지를 금지'한 빈 자리에 극우의 상징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주류의 가치와 취향에 반하기만 하면 뭐든지 흐를 수 있는 공허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반문화적 위반의 사상의 텅 빈 사기극이다. 문화가 끔찍한 공포에 노출되는 동안 진보주의자들은 맹목적으로 그것을 카운터-헤게모니의 힘으로 낭만화했을 따름이다."


그러는 동안 위반과 전복의 가치는 대학 캠퍼스와 소셜네트워크 Tumblr를 중심으로 기이한 정체성 정치의 인정투쟁으로 표출되었다. 저자가 예로 든 것은 'spoonie'이다. spoonie의 어원을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일상적인 사회 생활을 조금만 하면 몹시 피로해지는 증후군(이라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스스로 spoonies라 말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질병 혹은 장애로 인정해주기를 요구한다.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저기서 반발이 있었고 리버럴 대학생들, 텀블러 이용자들은 반발하는 사람들을 혐오자로 몰아갔다.

흔히 일컬어지는 '주디스 버틀러 잘못 읽고 체한' 대학생들이 다수 속출했다. 저자는 젠더 유동성 자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지만 이들의 무근거한 젠더 라벨링과 에고 트립, 자기연민의 언어도단은 리버럴의 탈정치화의 일현상에 다름없으며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을 대안우파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시키는 부작용만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탈정치적 리버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다고 믿었던 비합리주의 사상은 미국에서 유구한 전통의 반지성주의를 자극했을 따름이고 그에 힘입은 청년 대안우파들의 테러 행위에 준하는 반동과 문화 전쟁의 향연은 바흐친의 카니발과 다르지 않다.

아주 재미있고 훌륭한 책이다. 대안우파와 극단적 PC의 망동을 균형있게 제시하며 진보진영의 반성을 유도한다. 문화연구자는 왜 비위가 좋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2020년 10월 1일 목요일

자식들은 왜 추석에 찾아오지 말라는 소리에도 전전긍긍하는가

 자식들은 왜 부모, 시부모가 추석에 오지 말라고 해도 전전긍긍하는가? '오지 말랬다고 정말 안 오냐'라는 볼멘소리 혹은 그에 준하는 수동적 공격성을 지겹도록 겪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냥 가면 아무 것도 준비 안 했는데 귀찮게 왜 왔냐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당신들께서는 좀처럼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다 망가져가는 세탁기를 보여주면서 "아들/딸아, 우리는 옷이 더러워져도 상관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되고 신경 안 써도 된다."라고 영상메시지를 보내는 노부부의 이야기 따위는 일말의 감동 코드가 섞인 우스개로 흔히 소비되지만 부모의 말씀을 너무 잘 따라서 정말로 신경 안 쓰면 후레자식 된다.

뭔가 까다로울 수 있는 일을 부탁하기에는 부탁하는 입장으로서 접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고 염치없이 보이기도 싫고 강압적으로 하기에는 나쁜 사람 되기가 싫은 사람은 자신의 요구를 상대방이 눈치껏 먼저 알아내기를 원한다.

'척하면 척하는' 빠른 눈치로 긴 말이 필요 없이 요구사항이 관철되기를 바라는 소통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알아서 생각하는 데 드는 시간이 처음부터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더 길 터이다. 확신을 기하기 위해 몇가지 물어보면 으레 돌아오는 건 '그걸 꼭 다 말을 해야 아냐'는 핀잔이다. 편의점 알바해본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흔히 꼽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빡치는 손님 유형이 이런 사람이다. 봉투 필요하시냐고 물으면 '그럼 이걸 다 손으로 들고 가란 말이냐'며 쏘아붙이는 사람.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생각외로 가까이 있다.

비슷하게, 뭐든 애매하게 업무 지시를 내리거나 늘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 직장상사 욕을 쉽게 접한다. 대충 말해도 잘 알아듣고 수행하는 직원을 원하는 마음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음흉한 속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 책임질 생각이 없는 것이다. 알아서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알아서 한 사람을 탓하면 되기 때문이다.

조조가 토벌을 갔다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어느날 밤 암구호를 계륵으로 정하라는 말에 양수는 조조의 의중을 지레짐작하고 병사들에게 짐싸라고 했다가 목이 날아갔다. 섣불리 나대다가는 좆되는 수가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 흔히 전해지지만 애초부터 조조라는 인물이 기다 아니다를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으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평소 부하들 눈치 없다고 얼마나 조인트를 까댔으면 그날 저녁식사 메뉴를 암호로 정한 것만으로 그 의중을 파악하려고 고민하게 만든 것인지.


창작과비평 196호 <그런 세대는 없다> 촌평. 누가 왜 자꾸 그런 세대가 있다고 우기는가

  나는 386 세대 (‘586’, ‘n86’ 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 을 선호한다 ) 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 특히 386 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