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26일 목요일

2022.2.5. 정용진 쏘고 윤석열 받은 ‘멸치와 콩’, 왜 스테디셀러 못 됐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정용진 쏘고 윤석열 받은 ‘멸치와 콩’, 왜 스테디셀러 못 됐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멸콩챌린지와 개 호루라기

정이 쏘고 윤이 받았던 해시태그
특정그룹 동원하는 ‘개호각’ 기능
나경원 등이 공개 캠페인 나서자
호각 기능 멈추고 소음으로 끝나

  • 수정 2022-02-05 06:59
  • 등록 2022-02-05 06:59
2022년 1월8일 국민의힘이 공개한 윤석열 대선 후보의 장보기 사진. 윤 후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멸치’ ‘#콩’ 등의 해시태그를 달아 ‘멸공’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제공
2022년 1월8일 국민의힘이 공개한 윤석열 대선 후보의 장보기 사진. 윤 후보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멸치’ ‘#콩’ 등의 해시태그를 달아 ‘멸공’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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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월 초, 때아닌 ‘멸공’ 논란으로 한국 사회가 들썩였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저 ‘때아닌’이라는 말이라는 것도 때아닌 말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정치 후진국 시절 북풍, 색깔론 등 온갖 추한 형태의 정치를 목격했던 사람들이 보기에 ‘종북’보다도 오래된 멸공이라는 말이 지금 정치인들의 입에 올려지는 일 자체가 불쾌한 기시감이 들게 만드는 것일 테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나 저 구시대의 유물과 같은 단어를 전혀 접하지 못한 채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멸공이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정부 여당 공격의 레토릭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간단한 단어 하나에 여당 인사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왠지 미운 상대의 아픈 곳을 한대 더 때리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꼈을 테다.

‘멸콩’은 왜 더 이어지지 못했나

멸공 논란을 쏘아 올렸던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공개사과를 하면서 짧은 소동이 일단락된 형국에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당연히 뒷북치는 일이다. 여기서는 뒷북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마트에서 멸치와 콩을 사고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로 #멸치와 #콩을 쓰는 해시태그 릴레이 혹은 챌린지가 왜 길게 이어지지 못했는가에 관한 생각이다.

인간은 들을 수 없고 개들만 들을 수 있는 음역대의 고주파음을 내는 호루라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개를 훈련시키거나 개의 집중을 끌어야 할 때 쓰는 물건이다. 이 개 호각(dog whistle)은 오늘날 정치 커뮤니케이션 논의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용어다. 개만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는다는 것이 핵심이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고 논란이 따를 이유가 없을 것 같은 무난한 메시지에 매우 위험한 메시지를 교묘히 약호화하여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동원명령을 내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을 가리켜 개 호각이라고 한다. 특정 집단에게 ‘개 호각을 분다’(dog whistles to)라는 말처럼 동사형으로 쓰기도 한다.

개호루라기 효과를 내던 ‘멸콩 챌린지’는 공개 캠페인 전환 뒤, 소리 없이 그 효능을 잃었다. 각 인스타그램 갈무리
개호루라기 효과를 내던 ‘멸콩 챌린지’는 공개 캠페인 전환 뒤, 소리 없이 그 효능을 잃었다. 각 인스타그램 갈무리

개 호각의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그가 입양한 반려견 ‘플로키’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그런데 하필 견종이 시바견이다. 시바견은 머스크 자신이 ‘아버지’를 자처했던 암호화폐 ‘도지코인’의 상징이다. 이런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머스크가 올린 사진은 단지 한 마리 귀여운 개일 뿐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요동치는 암호화폐 가격에 전전긍긍하는 투자자들이 보기에 머스크가 올린 개 사진은 그 자체로 긴급 동원명령이 되어버린다. 난데없이 ‘플로키’ 화폐도 출시하는 등, 머스크가 올리는 메시지에 어떤 코드가 숨어 있는지, 수많은 사람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촌극이 멈추지 않고 있다.

이 밖에 가장 교과서적인 사례로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가 있다. 이 직관적인 구호는 일견 과거의 영광을 되찾자는 단순한 메시지로 보인다. 하지만 방점이 ‘다시’에 찍혀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위대하지 않다, 그럼 누구 때문에 위대하지 않게 된 것인가? 최근 들어 물밀듯 들어온 이민자들 때문일 것이다’라는 추론을 유도한다. 적어도 인종차별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들만큼은 개만 들을 수 있는 호각처럼 저 코드화된 메시지를 포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숨은 메시지를 포착한 사람들끼리 유대감을 키운다.

정용진 부회장이 소셜미디어에 뜬금없이 멸공을 거론한 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신세계 이마트에서 조림용 멸치를 카트에 담는 모습의 사진과 함께 해시태그 ‘#달걀 #파 #멸치 #콩’을 개인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이에 대해 정용진 부회장에 대한 지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더불어 현 정부와 여당에 대한 색깔론 공세를,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 채 비겁한 방식으로 획책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따랐다. 윤석열 후보는 당연하게도, 멸치 육수랑 콩국을 해 먹으려고 산 것뿐이라고 해명하며 선을 그었다.

찬물 끼얹은 건 되레 내부의 적

정용진 부회장이 쏘아 올리고 윤석열 후보가 본격화한 멸공 해시태그 릴레이는 어쩌면 훨씬 더 지구력이 있는 유행이 될 수도 있었다. 과장을 보태자면 2020년대 한국의 새로운 ‘십자가 밟기’가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다. 장 볼 때 으레 사는 멸치와 콩 사진을 올린 뒤 첫 글자인 ‘#멸콩’을 적는다.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는’ 해시태그를 알아본 사람이 ‘아, 이 사람도 나와 같구나’라는 반가움을 안고 해시태그 릴레이에 동참한다. 그렇게 소셜미디어에 #멸콩을 게시한 사람들 간에 유대감이 발생한다. 한편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마트에서 산 것들 올렸을 뿐’이라고 하며 상대를 옹졸한 사람, 제 발 저린 도둑과 같은 사람으로 몰 수 있다. 이에 대처하기란 굉장히 까다롭다. 이 유행이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된 이후부터는, 릴레이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떤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 분위기마저 형성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젊은 우파 네티즌들 사이에서 거대한 유행으로 번질 수 있었던 릴레이에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내부로부터 나왔다. 나경원 전 의원이 ‘신나라’ 하며 본인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 릴레이를 이으며 ‘멸공! 자유!’를 적었고, 김진태 전 의원이 다 함께 멸공 캠페인을 벌이자고 쓴 것이다. ‘멸콩’에 숨겨져 있던 메시지를 이렇게 대놓고 드러내면 개만 들을 수 있었던 호각은 기능을 멈추고 그냥 소음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 해시태그에 언짢게 반응하는 사람을 옹졸한 사람으로 만들 수 없게 되어 재미가 반감된다. 시쳇말로 ‘짜치게’ 되었다. 두 전 의원이 눈치 없이 나댄 덕분에 극히 위험할 수 있었던 유행이 빠르게 식어버렸다.

2022.1.15. 아이 빌리브…어설픈 동정론 전략이 부른 부메랑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아이 빌리브…어설픈 동정론 전략이 부른 부메랑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 조롱과 풍자 리스크
악수가 된 정치인 부인의 사과에 풍자 섞은 ‘밈’ 잇따라
조롱차단에 언론 전략적 개입도…풍자의 맥락 중요

  • 수정 2022-01-15 18:59
  • 등록 2022-01-15 18:59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용산구 용산전자상가에서 한 시민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배우자 김건희씨의 허위 이력 의혹 관련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26일 서울 용산구 용산전자상가에서 한 시민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배우자 김건희씨의 허위 이력 의혹 관련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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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의 부인 김건희씨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정작 사과하고 해명해야 할 대목은 많이 나오지 않았다. 짧은 사과문에 ‘남편’이라는 말만 열세차례 언급하며 남편 윤석열을 처음 만났을 때 인상 등을 이야기하자 여론의 반응은 대국민 사과라기보다는 남편에게 보내는 영상 메시지에 가까웠다는 조소 섞인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감정에 호소하여 동정론을 유발하려는 전략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조금이라도 허술함을 보이면 대중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비웃음과 조롱을 받게 된다. 특히 정치인의 경우,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두려움이나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타격이 훨씬 클 수 있다. 대응이라도 하려고 하면 옹졸한 사람이라는 비아냥이 더해지는 역효과를 야기한다. 가만히 놔두면 조롱의 전파 속도와 수위는 점점 더 올라간다. 정치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음껏 비웃을 수 있는 대상이 생기면 기꺼이 조롱의 대열에 가세한다.

조롱거리 된 ‘동정론 유발’ 전략

조롱과 풍자의 유희를 즐기는 젊은 누리꾼들이 김건희씨의 저 어설픈 사과 발표를 가만히 둘 리 없었다. 반문·반민주당 정서가 지배적이지만 동시에 반윤석열 여론도 강세인 인터넷 커뮤니티 ‘에펨코리아’의 한 이용자는 김건희씨의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1분 안쪽으로 편집하고 가수 신승훈씨의 노래 ‘아이 빌리브’(I believe)를 삽입한 영상을 올렸다. 김건희씨의 사과문 발표가 매우 어설프게 감정에만 호소하다 우스꽝스럽게 실패했음을 풍자한 것으로, 영상을 본 사람들은 ‘어이없다’ ‘대선은 기울었다’며 윤 후보와 김씨를 비판하는가 하면, ‘눈물 나는 짠한 러브스토리’ ‘너무 보기 좋은 부부의 모습이네요’라며 김씨의 호소에 감정이입이라도 한 것처럼 풍자에 풍자를 얹었다. 해당 영상은 순식간에 조회 수 100만을 넘겼고, 여러 유튜브 채널과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로 공유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영상을 본 실제 사람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 빌리브’ 영상의 유행을 계기로 윤 후보와 김씨에 대한 조롱의 기류가 더욱 거세지던 가운데 모 언론이 총대를 메고 진화에 나섰다. 해당 언론은 앞서 말한 노래에 대한 누리꾼의 두가지 반응(비난과 비아냥)을 대결(‘vs’) 구도에 넣어서 보도했다. 마치 영상을 두고 누리꾼들끼리 의견이 갈린 것처럼, “일부 누리꾼은 ‘음악과 영상의 싱크로율에 감탄했다’고 댓글을 단 반면, ‘방송 사연 읽냐’며 비판하는 댓글도 있었다”는 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누리꾼들은 “이게 조롱인지도 모르냐, 독해력 참담하다”며 기자를 비웃었다. 하지만 언론사 기자가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론 분위기를 전혀 못 읽는 척하면서 획책한 바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해당 영상은 조롱과 풍자를 의도하여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단순히 한 누리꾼이 ‘여기에 신승훈 노래를 입히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아무런 의도 없이 만든 것으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이수정 국민의힘 당시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눈물 쏟을 대목이 많다”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감상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옹호 논리의 물질적인 근거처럼 보이게는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조롱을 조롱이 아닌 것으로 만들려 했던 전략적 효과는 물론 미미했다. 하지만 전후 사정에 대한 이해 없이 해당 기사만 접한 사람들은 ‘아이 빌리브’ 영상과 그에 대한 반응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극소수나마 이런 사람이 있기만 하다면 어쨌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야 한다.


이렇듯 조롱과 풍자에는 항상 리스크가 따른다. 맥락에서 떼어놓고 보면 조롱으로 이해되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화자의 제스처와 표정 등 언어 외적인 지표를 확인할 수 없는 활자상의 풍자는 오해와 오독의 위험이 배가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최근 트위터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콘셉트 계정’(컨셉계)으로 ‘스타트업 김대표’라는 계정이 있다. 해당 계정은 수익 모델은 불분명한데 말만 번지르르하고 임금과 비용을 최대한 줄이려 하면서 열정만 강조하는 젊은 꼰대 대표인 척 글을 올린다. 이 계정을 접한 사람들은 으레 ‘내가 다니는 회사 사장이 하는 말이랑 똑같다’며 웃기면서 슬프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런데 개중 사용자의 입장에서 이 컨셉계의 트위트에 진지하게 공감을 표하는 사람이 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컨셉계인 것도 모르냐’며 핀잔과 조롱을 달게 받는다. 그러면 이 사람은 ‘나도 컨셉에 맞게 맞장구치는 척한 거다’라며 민망한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어설픈 풍자가 불러온 인생 파국

어설픈 풍자는 피차 민망해지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위험도 있다. 2013년, 저스틴 사코라는 이름의 한 미국인 여성은 친척 방문차 남아프리카공화국행 비행기를 탔다. 100여명의 트위터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던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트위터에 농담을 한마디 올린 뒤 휴대전화를 끄고 11시간을 비행했다. 그 농담은, “아프리카로 가요. 에이즈가 걱정되지 않냐고요? 괜찮아요, 전 백인이니까요!”였다. 세상이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미국 백인들의 무식함을 풍자한 것으로, 그를 조금이라도 알고 지냈던 팔로어와 지인들은 당연히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우연히 그것을 접한 황색저널 기자가 그의 트위트를 보도하면서 일이 커져버렸다. 수많은 누리꾼이 해당 트위트를 농담이 아니라 끔찍한 인종차별주의자의 망언으로 해석했고 그를 공격했다. 비행 시간 동안 저스틴은 해명할 수 없었고, 공격 수위는 강간살해 위협으로까지 높아졌으며 그가 다니던 회사에도 불똥이 튀었다. 결국 11시간 만에 휴대전화를 켠 그는 꼼짝없이 공공의 적이자 무직자 신세로 전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저스틴을 파멸로 몰아넣은 기사의 제목이 ‘IAC(그가 다녔던 회사) 직원의 재밌는 농담’이었다는 것이다. 거짓은 전혀 없이 팩트만 제시한 기사였지만, 누리꾼들은 액면 그대로 읽어야 할 것은 반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풍자로 읽어야 할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져버렸다.

2021.12.4. 위험천만한 극우 따라하기…‘좌파 일베’의 부캐 놀이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위험천만한 극우 따라하기…‘좌파 일베’의 부캐 놀이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극우정치인 앨릭스 존스

음모론 앞세운 극우 선동가 존스
“극우 캐릭터 ‘부캐’일 뿐” 주장
국내 좌파 일부도 ‘일베 용어’ 악용
극우에 대응하는 전략은 될 수 없어

  • 수정 2021-12-04 13:20
  • 등록 2021-12-04 13:20
극우 선동가 앨릭스 존스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인포워즈채널’을 음모론 유통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극우 선동가 앨릭스 존스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인포워즈채널’을 음모론 유통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미국에서 활동하는 극우 선동가 중 가장 위험한 인물로 앨릭스 존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무기는 음모론이다. 라디오 방송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9·11테러가 부시 정부의 자작극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유명해졌고 <인포워즈>라는 유사언론 매체를 설립해 극우 어젠다를 버무린 온갖 황당한 이야기를 송출하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모론가가 되었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도 대통령 당선 직전 그의 방송에 원격으로 출연하여 존스의 팬임을 자처한 바 있다.

앨릭스 존스가 펼쳤던 음모론 몇개만 소개해도 이 사람이 얼마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수년째 꾸준히 제기하는 것으로 민주당 정치인들이 악마 숭배자들이라거나 인간의 외피를 쓴 파충류라는 주장이 있고, 워싱턴디시 어딘가에 아동 인신매매 시장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도 아주 진지하게 한다. 이것은 올해 초 있었던 의회 난입 사태를 일으킨 큐어논(QAnon) 집단의 사상적 근간이기도 하다. 개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성지향성을 바꿔버리는 ‘게이 폭탄’이 비밀리에 제조되고 있었는데 이 화학물질이 누출되어 미국 전역의 개구리들이 게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극우 활동은 ‘부캐’가 하는 일?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을 송출하면서 마니아들과 추종자들을 끌어모으던 가운데 앨릭스 존스는 최근 한 소송에서 패소하여 방송인으로서의 커리어가 걸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2012년 겨울, 미국 코네티컷주의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한 20살 남성이 총기를 난사해 20명의 초등학생을 포함하여 26명이 사망한 참사가 있었다. 앨릭스 존스는 자신의 방송에서 샌디훅 참사가 가짜라는 주장을 꾸준히 제기했다. 총기 규제 어젠다를 강화하기 위한 음모에 불과하며, 피해자들이 모두 연기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방송을 들은 추종자 일부는 유족들의 거주지를 찾아가 유족들을 괴롭혔다. 이들을 피해 이사를 다니던 유족 일부는 참다못해 존스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이에 다른 유족들도 가세해 집단소송으로 번졌다. 수년이 걸린 소송 끝에 코네티컷 법원은 존스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고, 배상금 결정을 위해 그에게 <인포워즈> 수익 내역 제출을 명령했다.


앨릭스 존스의 변호사는 변론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앨릭스 존스가 ‘퍼포먼스 아티스트’, 배우라는 것이다. 변호사의 변론에 따르면, 존스가 방송에서 퍼부은 온갖 헛소리들, 폭언, 비상식적인 주장들은 청중을 즐겁게 하는 데 제일 가치를 두는 퍼포먼스이며, 실제 앨릭스 존스와 대외의 앨릭스 존스는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라는 말이다. 이 황당한 주장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면 앨릭스 존스는 일종의 ‘부캐’(부캐릭터)를 연기한 셈이다.

극우 선동가 앨릭스 존스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인포워즈채널’을 음모론 유통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극우 선동가 앨릭스 존스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인포워즈채널’을 음모론 유통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유튜브 갈무리

부캐를 연기하는 연기자들은 재미와 핍진성(그럴싸함)을 증가시키기 위해 이른바 ‘부캐 유니버스’를 건설해나간다. 유니버스의 구축은, 부캐가 방송 카메라가 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지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세계에서 성장하여 살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관객의 흥미를 유지하고 참여를 유도한다. 특히 이 관객의 참여가 유니버스의 구축을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것이다. 올해 상반기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매드몬스터’라는 2인조 남성 그룹은 코미디언 이창호와 곽범이 만들어낸 부캐로, 잘나가는 아이돌 그룹의 퍼포먼스, 이미지, 팬들과의 소통의 매너리즘을 풍자하여 웃음과 공감을 끌어냈다. 데뷔와 흥행, 휴식과 컴백까지 정교하게 구축한 세계관에 대중은 기꺼이 몰입한다. 댓글난은 실제 아이돌 그룹을 향한 것과 다르지 않은 응원과 격려, 사랑의 메시지로 가득하고, 대중은 여기저기서 매드몬스터를 봤다는 목격담을 지어내며 유희하는 식으로 세계관을 넓히는 데 동참한다.


앨릭스 존스의 방송 활동이 부캐를 연기한 것이라면,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부캐 유니버스를 함께 구축한 것이다. 존스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음모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황당한 음모론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의 방송 영상을 열심히 공유했다는 사실에 크게 기인한다. 너무 웃기기 때문이다. 프로레슬링 선수 같은 풍채와 연극배우를 연상케 하는 발성 및 극적인 제스처와 그토록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주장의 결합은 특히 젊은 누리꾼(네티즌)들에게 무한한 재미의 원천이 된다. 젊은 누리꾼들은 존스의 방송 영상을 대중문화 텍스트에 합성하며 유희한다. 물론 조롱하기 위해서다. 조롱과 아이러니, 풍자, 빈정댐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은 앨릭스 존스에 찬동하는 척하는 댓글을 달고 서로 낄낄거린다. 앨릭스 존스의 추종자라는 부캐를 연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러는 자신이 존스의 위험한 메시지를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 이들의 풍자성 댓글을 보는 사람 중 일부는 그것을 진짜 지지자의 댓글로 착각하고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으로 자신감을 얻게 된다. 조롱하는 사람들의 부캐 활동은 존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더 신나게 설칠 빌미가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위험천만한 ‘일베 용어’ 따라하기

더불어민주당과 정부에 적대적인 좌파 진영 일부에서 이른바 ‘일베 용어’를 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부캐를 연기하는 것이라고 봐야 할까? 극우 진영에 의해 오염된 단어를 아이러니한 전유의 전략으로 ‘되찾아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의 발로라고 봐야 할까? 좌파가 극우의 언어를 입에 담는 것으로 언어가 정화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좌파의 언어가 오염된다. 몇몇 문화연구자들이 부캐를 고정된 자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출구와 같은 것이라고 했듯이, 좌파적 신념을 알리바이 삼아 일베 용어를 입에 담는 이들은 부캐를 빙자하며 본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2021.11.7. 일그러진 청년서사 ‘설거지론’…그들은 왜 여성들을 노리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일그러진 청년서사 ‘설거지론’…그들은 왜 여성들을 노리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 수정 2021-11-07 09:05
  • 등록 2021-11-07 09:05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누구나 살다 보면 어느 정도는 이상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다. 대학 졸업하고 구직할 때가 그렇다. 분명히 사회가 하라는 대로 다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기대와는 다르게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념은 원한으로 누적된다. 하고 싶은 것들 참아가면서 따랐던 ‘사회가 하라는 것’에 대한 원한이다.

주목경제 시대에 사실상 모든 재화는 그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서 인간의 주목이 필요하다. 그것의 사용가치만으로는 값이 제대로 매겨지지 못한다. 손목시계를 예로 들면, 그로부터 기대되는 바의 기능은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훨씬 웃돈다. 가격 차이가 백배, 천배 이상 나는 두개의 손목시계가 실제 성능 차이도 그만큼 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손목시계의 가격을 높이는 것은 브랜드, 기호다. 고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상류층의 기호, 평범한 장삼이사와 나를 구별 짓는 기호에 비싼 값이 매겨진다. 이 기호를 제값에 팔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의 주목이 없어선 안 된다. 성능 면에서 대동소이한 상품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품질만큼 마케팅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

사회 요구에 ‘관종’도 마다않았지만
불공정·불평등 퍼진 사회 겪은 뒤

노동력도 주목받아야 하는 시대

주목경제의 논리는 인간의 노동력에도 해당한다. 인간의 노동력이 제값을 부여받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역시 주목이 필요하다. 사람은 많은데 대학 진학률은 갈수록 올라가며 학력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전반적인 작업 역량과 교양 수준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이제 구직자들은 자격증, 외국어 실력 등 스펙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과시해야만 하게 되었다. 신규 채용도 갈수록 줄어듦에 따라 지금 청년 구직자들은 치열한 스펙 경쟁에 주목 경쟁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한다.


일을 얼마나 잘할 준비가 돼 있고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지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얼마나 잘 뽐낼 수 있느냐다.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주목이 가치를 결정하는 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때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관종’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원래 모습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비춰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가꾸는 것을 넘어 그것을 더 많은 사람의 눈에 보이게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관종이라는 말은 더 이상 조롱이 담긴 멸칭이 아니라 현대인 혹은 ‘신인류’의 특징으로까지 거론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관종은 욕으로 쓰였지만 이른바 ‘좋은 관종’도 있으며 모두가 좋은 관종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관종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임홍택 작가는 21세기를 리드하는 좋은 인재가 되기 위해 좋은 관종이 되기를 요구한다. 겸손함이 미덕인 시대는 갔다. 자신의 역량을 과하지는 않게, 적당한 수준으로 적절한 때에 적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만 유능한 인재로 눈에 띌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유능한 인재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 스펙뿐만 아니라 인격도 도야해야 하고 가식이라도 떨면서 착한 척하며 봉사 활동도 해야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더 치열한 주목 경쟁과 항시적인 인정투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사회가 하라는 건 다 한 것 같은데 괜찮은 일자리는 좀처럼 구해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누구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너무 쉽게 정규직이 되는 것 같고, 공정과 평등을 외치던 정치인들이 특권을 이용해 자식들을 명문대에 보내거나 좋은 데 취직시키는 사례가 너무 많이 눈에 띈다. 착한 척, 가식은커녕 일체의 사회적 의례를 무시해버리고 금도를 완전히 깨버리는 ‘선 넘는’ 콘텐츠로 일약 스타 유튜버가 되어 떼돈을 버는 사람도 너무 많이 보인다. 지켜야 할 것 다 지키며 살아왔던 자신만 손해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는 당장 하고 싶은 것들 조금만 참고 노력하면 언젠가 성공할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듣기 좋은 말만 하던 기성세대, 위정자들의 저 위선에는 치가 떨린다.


위선을 향한 분노는 뚜렷한 기대 이득과 성과가 보이지 않는 끝없는 인정투쟁에 대한 환멸과 겹치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말의 의례, 예의범절, 가식, 가면 일체를 내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자극하곤 한다. 지금 20대 안에서 지고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위선은 나쁘다’라는 명제는, 특히 위악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의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에 익숙한 20대 남성들에게 자신들의 (적어도 웹상에서나마의) 반사회적 언행들을 정당화하는 명제가 된다. 이들은 인터넷을 떠도는 온갖 ‘사이다’ 썰, 예컨대 ‘맘충’이나 ‘잼민이’들을 ‘참교육’했다는 경험담들을 읽으며 파워트립의 환상에 젖어들고,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러지 못하지만, 유일하게 용기를 내서 상대방에게 일침을 빙자한 폭언을 시원하게 퍼붓는 나’를 상상하며 조커에 빙의한다.


“위선” 핑계로 잇단 반사회적 행동
약자인 여성·어린이 공격대상 삼아

자기 합리화 위해 약자를 저주

그리고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최소한의 매너까지 내던져버린다. 교사들로부터 ‘공부를 더 하면 아내 얼굴이 달라진다’라는 말을 들으며 성장한 이들에게 구애 활동이란 구직 활동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구직 활동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해도 어차피 운 좋게 잘생기게 태어났거나 돈 많은 사람들에게 이성을 빼앗기므로 잘 보이려고 노력해봤자 부질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는다며 여성들을 저주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변변한 일자리도 못 구하고 연애 및 결혼에도 실패한 자신의 쓸쓸한 신세에 상대적 우월감이나마 얻고자 상상으로 밟고 오를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대상은 여성과 어린이 외에는 별로 없다. 그래서 만들어낸 서사가 이른바 ‘설거지론’이다. 새롭게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역사가 유구한 ‘취집’ 서사와 다른 건 전혀 없는데, 여성을 욕하는 것을 넘어서 ‘취집하는 여자’와 ‘결혼한 남자’에 대한 조롱이나 연민이 한 층위 더해진 것이다. 조롱이든 연민이든 핵심은 결혼 못 한 내가 결혼한 남자 혹은 ‘퐁퐁남’보다 차라리 낫다는 위안이다. 보잘것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아침밥 차려주고 도시락 싸주는 여자를 기다리며 결혼을 미루는 내’가 현명한 것이라는 위안이다.

2021.10.16. ‘인싸’ 되려고 도둑질 인증…그 ‘관종을 조롱하는’ 진짜 악질 관종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인싸’ 되려고 도둑질 인증…그 ‘관종을 조롱하는’ 진짜 악질 관종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위험한 도둑질 ‘디비어스 릭’

  • 수정 2021-10-16 11:38
  • 등록 2021-10-16 11:38
최근 미국에선 위험천만한 ‘우유 상자 챌린지’(오른쪽 사진)에 이어 공중화장실 물건을 훔치거나 파손하는 ‘디비어스 릭’(사악한 도둑질) 같은 부적절한 틱톡 트렌드가 유행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최근 미국에선 위험천만한 ‘우유 상자 챌린지’(오른쪽 사진)에 이어 공중화장실 물건을 훔치거나 파손하는 ‘디비어스 릭’(사악한 도둑질) 같은 부적절한 틱톡 트렌드가 유행하고 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미국에서 또 다른 틱톡 트렌드가 최근 한달 동안 유행하고 있다. 트렌드에 붙여진 이름은 ‘디비어스 릭’이다. ‘악마의 도둑질’, ‘사악한 절도’ 정도로 번역되는 이 말에서 ‘릭’(lick)은 요새 젊은 미국인들이 절도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는 것 같은데, 어떻게 옮기느냐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틱톡이라는 소셜미디어가 무엇인지, 틱톡에서 특정 콘텐츠가 어떤 방식으로 유행을 타는지 자세히 알 필요도 딱히 없다. 다만 해괴망측한 행동을 하고 인증하는 것이 십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사실만 알면 되겠다. 그 해괴망측한 행동이란 학교 화장실 등 공중화장실에 비치된 물건들 예컨대 손세정제, 휴지걸이, 방향제, 심지어는 세면대와 변기를 떼서 집으로 훔쳐 오는 것이다. 훔칠 물건이 마땅치 않고 변기통을 떼기도 쉽지 않다는 판단이 들 때는 화장실을 어지러뜨리고 기물을 파손하는 행위를 촬영한다. 한 십대 틱톡 이용자가 입학한 지 한달도 안 되어 벌써 ‘악랄한 짓’을 했다며 학교 화장실에서 훔쳐 온 손세정제 통을 촬영해 올린 것이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위험천만한 우유 상자 챌린지 이어
미국 청소년 학교 변기 등 절도 유행

입학 한달 만에 “악랄한 짓 했다”

유행이 번지면서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국의 공립학교들은 지정된 시간 외의 화장실 이용을 일절 금지했다. 매우 급하다 싶으면 교사가 따라가서 감시하게 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이야기가 아니다. 학생들은 어른의 통제 없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화장실 가서 볼일 보고 돌아올 것이라는 신뢰마저 스스로 없애버리고 있다. 유행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화장실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을 넘어서 일반적인 절도 행위가 십대들 사이에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일말의 수치심 없이 ‘디비어스 릭’이라는 제목의 인증샷을 올린다. 이 모든 게 단지 틱톡 조회수를 올려서 잠시나마 유명인이 되고 소위 ‘인싸’가 되기 위해서다. 또래들에게 암묵적으로 행동이나 비슷한 생각을 강요하는 ‘또래 압박’ 때문에, 하기 싫어도 하는 경우도 많다.


우유 상자를 계단처럼 쌓아놓고 올라가는 ‘우유 상자 챌린지’가 유행한 것이 불과 두어달 전이다. 플라스틱 상자가 튼튼하지 않은 탓에 굉장히 위태로우며, 열에 아홉은 오르는 자의 흔들리는 다리에 상자가 같이 흔들려 무너져버린다. 상자에 오르던 사람은 대개 머리부터 고꾸라진다. 전신마비에서 사망까지 우려되는 일이라 영상을 끝까지 볼 엄두도 안 난다. 심지어 우유 상자 챌린지를 할 때 옆에서 구경하거나 촬영해주던 사람이 상자를 차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게 더 재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우유 상자 챌린지 유행은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크게 다치는 것을 넘어 땅바닥에 피가 흐르는 장면이나 즉석에서 사망한 장면만 모은 ‘사망 모음’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에 틱톡 본사는 우유 상자 챌린지 영상을 죄다 금지하는 조처를 내렸다.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본사에서 개입하자 그다음에는 도둑질과 문화유산이나 공공시설들을 부수는 반달리즘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우유 상자 챌린지나 디비어스 릭 같은 틱톡 영상들이 유튜브에 재업로드가 되면 조롱과 비난 일색의 댓글들이 달린다. 인류애와 희망을 잃었다거나 하는 댓글이 대다수며, 인류가 죄다 물갈이되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가장 많은 ‘좋아요’를 기록하고, 위험한 틱톡 챌린지로 입원했다거나 사망했다는 소식에는 “잘 죽었다”, “멍청이들이 멍청한 짓 하다 죽은 것뿐이다”라는 식의 경멸감 가득한 조롱이 지배적이다. 관심을 위해서라면 범죄 행위나 목숨을 위협하는 짓까지 불사하는 관종들에 대한 늘어만 가는 경멸감과 혐오감은 어떤 이들에게는 손쉽게 인플루언서가 되게 만드는 원료가 된다. 바로 관종을 조롱하는 것을 자신만의 콘텐츠로 삼는 유튜버들이다.

관종들의 황당한 만행들, 조회수는 높이고 평균수명은 낮추는 위험천만한 행위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유튜버들에게는 조회수 장사의 새로운 장르, 대중에게는 새로운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관종에 대한 조롱과 비난으로 맞불을 놓아도 관종의 활동이 위축되지는 않는다. 당연히 관종을 조롱하는 유튜버들과 관종들은 공생관계에 있다. 관종을 조롱하기 위해서는 일단 관종의 콘텐츠를 소개하고 공유해야 한다. 그러면 조롱 유튜브를 본 사람 중 일부는 그 관종의 원래의 게시물로 원정을 가서 악성 댓글을 달고 공격한다. 관종으로서는 새로운 조회수 유입이 되어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관종 조롱 유튜버들로서는 소재가 끊일 일이 없어 매우 편하다.


‘관종들 비난하는 관종’ 등장하기도
조롱 콘텐츠도 악질 아닌지 의심해야

관종의 적은 또 다른 관종

관종의 적은 조롱 유튜버가 아니라 또 다른 관종이다. 네티즌들의 관심을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관종들은 더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기 위해 더 기괴하고 더 위험한 스턴트 행위를 상연한다. 조롱 유튜버들도 관심 경쟁의 압박을 피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플루언서 지위를 유지하려면 더 신랄하고 더 시원하게 조롱과 비난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 급기야 새롭고 참신한 소재를 선점하기 위해 무관심으로 잊힌 관종을 발굴해내기도 한다. 관종의 행태를 비난하기 위해,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수 있었던 백해무익한 관종 영상을 기어이 끄집어 올려서 기괴한 ‘프릭쇼’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관종 조롱 콘텐츠의 유행에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거짓 효능감뿐이다. 관종들에게 욕 한 바가지 날려줌으로써 정의 구현을 한다는 착각, 관심과 조회수의 노예가 되어 미친 짓을 벌이는 광인들보다는 내가 낫다는 생각에서 오는 만족감이다. 이러한 상상의 상대적 우월감을 얻어가고자,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조롱 콘텐츠를 시청한다. 이들이 제공하는 ‘사이다’에 중독되어선 안 된다. 관종 조롱을 콘텐츠로 내세우는 사람이 오히려 더 악질의 관종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2021.9.26. 폐기처분급 먹방은 어떻게 ‘성공한 폭망’이 됐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폐기처분급 먹방은 어떻게 ‘성공한 폭망’이 됐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먹방으로 성공하기

테이스티훈의 ‘엔지급 영상’에 열광
요리 실패 먹방으로 역대급 조회수

  • 수정 2021-09-26 09:28
  • 등록 2021-09-26 09:28
유튜버 테이스티훈은 지난해 ‘치즈퐁듀치킨’ 요리 실패 영상으로 역대급 조회수를 기록했다. 유쾌한 실패를 통한 성공과 시선끌기용 혐오 연출은 구분돼야 한다. 유튜브 갈무리
유튜버 테이스티훈은 지난해 ‘치즈퐁듀치킨’ 요리 실패 영상으로 역대급 조회수를 기록했다. 유쾌한 실패를 통한 성공과 시선끌기용 혐오 연출은 구분돼야 한다. 유튜브 갈무리

얼마 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마이클 샌델 교수와의 대담에서 ‘먹방 유튜브로 성공하여 기존 방송 엘리트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한국의 경쟁 환경’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것을 반박할 생각은 별로 없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극소수의 성공 사례를 가리키며 ‘저것 봐, 너도 저렇게 하면 된다고’라고 말하던 데서 한 발짝도 못 나간 발언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먹방 콘텐츠가 어느새 레드오션이 됐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이 대표의 발언 때문이다. 먹방은 이미 외국에서도 많이들 따라 하고 있다. 한국의 먹방 유튜버들은 특유의 과한 리액션과 추임새를 내뱉는 외국 유튜버들과 경쟁해야 한다. 이미 엄청난 식사량과 화려한 입담을 뽐내던 기성 코미디언들이 취미로 먹방을 시도하면 이들과도 어려운 경쟁을 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이후 헬스장을 열지 못하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먹방을 시도하다 인기를 끌기 시작한 헬스트레이너 출신 유튜버, 쿡방을 겸하는 셰프들의 먹방과도 경쟁해야 한다. 먹방 유튜버들은 새로운 경쟁에서 승리하느냐, 살아남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적어도 그동안 확보해둔 주목도와 조회수를 경쟁자들에게 상당 부분 빼앗기게 되어 그 자체로 상당한 손해를 본다.

우스꽝스러운 실패, 그 성공의 역설

먹방으로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성공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이미 포화될 대로 포화된 먹방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길이 없지는 않다. 연예인 버금가는 입담 벼리기, 외모 가꾸기, 누구보다도 더 맛있게 먹기,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희귀 음식 구해서 먹기, 더 많이 먹기, 더 빠르게 먹기, 이색적인 장소에서 먹기, 창의적인 방식으로 먹기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리를 굴려 새롭고 참신한 방법을 생각해내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아이디어를 실제로 행하기는 곱절로 어려울 테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쉬운 방법으로 대박을 터뜨린 먹방 유튜버가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사람은 음식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도 먹방으로 성공했다는 것이다.


게임 유튜버로 활동하다가 사이드 프로젝트(부업)로 먹방을 시도한 ‘테이스티훈’은 영상 3회차 만에 먹방 역사에 전례 없는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퐁듀(퐁뒤) 기계를 사용해 ‘치즈퐁듀치킨’을 만들어 먹으려 했다. 그가 간과한 사실은 이 요리를 위해 별도의 퐁듀용 치즈를 쓰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치즈에 우유나 크림을 첨가해 점성을 낮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걸 모른 채 평범한 모차렐라치즈를 프라이팬에 녹인 뒤 그대로 중탕기에 부었다. 끈적끈적한 치즈를 곧바로 기계에 부으며, 이 방식이 맞는지 스스로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끈적한 치즈는 나선형 펌프를 타고 분수 뚜껑을 밀어내며 회오리쳤다. 치즈 회오리는 사방으로 튀면서 테이스티훈의 안면을 강타했다. 예상치 못한 참사에 그는 기계를 끄고 엉거주춤하다가 흩어진 치즈 조각을 수습하고 어설프나마 치즈가 얹힌 치킨을 먹었다.


이 영상은 바이럴(입소문)을 타면서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졌고, 1500만회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테이스티훈은 이 영상으로 일약 가장 유명한 먹방 유튜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테이스티훈의 이 영상이 제대로 먹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먹방의 본령을 완벽하게 배반한 영상이자 폐기처분해 마땅한 엔지(NG) 영상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 먹방을 그대로 내보냈고 스타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성공한 실패’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만 적당히 실패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먹는 모습이 어설프다거나,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촬영되지 않았다거나, 멘트가 재미없다거나, 전체적으로 지루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중간하게 실패하면 그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민망해지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 전에 파안대소부터 터뜨리게 만드는 ‘더 우스꽝스러운 실패’여야 한다.


우스꽝스러운 실패의 역설적인 성공 사례는 영화계에서는 역사가 길다. ‘못 만든 영화’의 대명사 <더 룸>(2003)은 구미의 젊은 네티즌 사이에서 그 자체로 개그 소재가 되고 ‘밈’의 소재가 된다. 개봉 당시에는 본 사람이 거의 없이 대중에게 철저히 외면받았지만, 10년이 지나고 뒤늦게 영화의 ‘우스꽝스러움’이 바이럴을 타면서 컬트 영화로 거듭났고, 이후 주기적인 팬 상영회가 열림은 물론 연극과 비디오 게임, 뮤지컬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훗날 주연배우 중 하나가 <더 룸>의 제작 과정을 회고한 책을 냈는데, 배우이자 감독인 제임스 프랭코가 이 책을 영화화하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실패의 성공 역설 보여
오직 시선끌기용 혐오 연출과 달라

조회수 끌려 연출한 ‘혐오’와 달라

한국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과 <클레멘타인>(2004)은 못 만든 한국 영화의 대명사로 꼽힌다. 둘 다 개봉 당시에는 완전하게 외면당하고 감독의 커리어는 바로 끝장날 정도로 망했지만 몇년 뒤 영화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역시 한국 영화 명작은 클레멘타인이죠”라는 식의 반어적 농담이 유행했다. 뒤이어 몇몇 젊은 네티즌이 해당 영화들에 ‘별점 세례’(별점 테러의 반대 경우)를 퍼부었고, 영화의 우스꽝스러운 연출과 스토리, 연기 등이 농담 소재가 되면서 비슷한 연도에 개봉해 어중간하게 흥행한 영화들보다 훨씬 많이 회자되는 영화가 되었다. 그러니까 망하더라도 시원하게 ‘폭망’하면 어지간한 수준의 콘텐츠보다 훨씬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하면 되겠다. 하나는 창의적인 발상으로, 더 양질의 콘텐츠로 승부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누구라도 한번 보면 웃음부터 터뜨릴 수밖에 없는 우스꽝스러운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다. 문제는 저 우스꽝스러움과 혐오스러움을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조회수만 올리면 된다는 일념으로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는다거나, 혐오스러운 장면 연출로 소음을 일으켜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든 그쪽으로 몰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무래도 이편이 훨씬 쉽기 때문일 테다.

2021.9.5. 어쭙잖은 세대 영합보다 ‘대놓고 꼰대’가 낫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어쭙잖은 세대 영합보다 ‘대놓고 꼰대’가 낫다

대선 후보들 자상한 부모 되기 경쟁
진짜 어른 찾는 MZ층 오히려 반감

  • 수정 2021-09-05 09:02
  • 등록 2021-09-05 09:02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국민의힘)이 각각 e스포츠경기 체험과 ‘민지(MZ)야 부탁해’ 유튜브 캠페인을 통해 젊은 세대 표심을 겨냥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튜브 갈무리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윤석열 전 검찰총장(국민의힘)이 각각 e스포츠경기 체험과 ‘민지(MZ)야 부탁해’ 유튜브 캠페인을 통해 젊은 세대 표심을 겨냥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튜브 갈무리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정치인의 ‘탈꼰대’ 흉내

2011년 ‘셔플댄스’ 유행이 전국을 강타한 일이 있었다. 유치원에서도 가르칠 정도였다. 그리고 1년 뒤 열풍이 다 식어갈 무렵 한 대기업에서 몹시 민망한 텔레비전(TV) 광고를 송출했다. ‘김 부장’이 부하직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인터넷에서 셔플댄스 추는 법을 검색하고 혼자서 몰래 연습한 뒤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춤을 춘다. “아는 만큼 가까워집니다”라는 문구가 나오면서 끝난다. 해당 광고는 일부 젊은 시청자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다. 이들의 조소 섞인 반응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같이 유행 가요 부르고 춤추는 상사가 아니라 야근, 회식 강요하지 않고 월급 제때 주는 상사를 원한다. 우리는 상사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 몇몇 대선 경선 후보들이 ‘틱톡’(최대 15초짜리 동영상 공유 플랫폼) 촬영하고, 이상한 챌린지 하고, 롤(League of Legends) 게임 하고, 민지(MZ)가 어쨌다느니 하는 모습을 보면 저 황당한 광고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맘대로 시켜, 난 짜장면”

임홍택 작가는 <90년생이 온다>에서 신 직장인 꼰대 체크리스트를 소개한다. 항목은 23개인데, 테스트 결과 해당 사항이 하나라도 있으면 꼰대라고 불려야 한다. 임 작가가 의도한 바는 그만큼 노력을 많이 하라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언젠가, 꼰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천천히 개선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과 꼰대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노력은 완전히 다르다. 그나마 단기간에 해낼 수 있는 것은 후자의 노력이다. 하지만 어쭙잖은 노력은 오래가지 못한 채 그동안 가져왔던 관성과 반드시 충돌한다. 그렇게 발생하는 잡음의 우스꽝스러움은 중식당에서 직원들에게 먹고 싶은 거 뭐든 주문하라고 해놓고, 본인이 먼저 짜장면 한그릇을 시키는 상사에 비견된다. 처음부터 저렴한 메뉴로 통일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이런 사람을 더 경멸하는 청년 정서부터 이해해야 한다.


어설픈 ‘탈꼰대’ 제스처에 대하여 슬라보이 지제크는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주말 오후, 아버지는 아들이 할머니 댁에 방문하기를 원한다. 고전적으로 권위적인 아버지라면 “할머니 댁에 다녀와라. 네가 지금 뭐라고 하건 상관없어. 할머니를 잘 모시는 게 네 의무야”라고 할 것이다. 비권위적인 아버지를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할머니께서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지? 꼭 갈 필요는 없어. 가고 싶으면 가는 거야.” 그의 메시지에는 ‘할머니 댁에 가기를 바란다’와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스스로 원해야 한다’라는 이중의 명령이 있다. 아들은 그것을 모를 리 없으며 따라서 역설적으로 비권위적인 아버지에게서 더 큰 압력을 느낀다. 지금 정치인들이 청년, 엠제트(MZ)세대, 2030, 90년대생들의 의견을 경청한다거나, 이해해본답시고 취하는 과시적 제스처들에서 청년들이 받는 인상을 지제크의 이야기에 비유할 수 있다.


꼰대에 대한,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이유는 제대로 된 어른으로서 롤모델의 형상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를 채울 만한 새로운 롤모델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가 일정 기간 이상 지속되면 혼란이 가중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으레 과거를 돌아보며 과거에서 답을 찾는다. 꼰대를 잔뜩 욕하던 젊은 사람들이 갑자기 지극히 권위적인 ‘스트롱맨’에게 열광하게 된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게 없다. 이것은 역이용할 여지가 있다. 전통적으로 보수진영은 ‘엄격한 아버지’, 진보진영은 ‘자상한 부모’ 모델과 결부되어왔다. 지금 보수진영은 젊은층에 영합하기 위해 ‘엄격한 아버지’를 연성화하다 못해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경박해지고 있다. 엄격한 부모, 능력 있고 책임감 있고, 험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근엄한 어른의 빈자리를 점유할 기회다.


이제 와서 젊은층에 영합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기존 방침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모습을 보여봤자 별 소득은 없다. 오히려 부화뇌동으로 보이고 우유부단하게 보이고 만만하게 보인다. 젊은이들이 정부 여당과 기성세대에 갖고 있다고 전해지는 페미니즘의 어떤 면들, 위선, 내로남불 등 문제에 결부된 불만, 분노는 몸통이 아니라 잔가지에 불과하다. 예컨대 정부 여당이 페미니즘 관련 어젠다나 메시지를 철회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른바 ‘이대남’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페미니즘과 관련한 또 다른 불만을 계속해서 찾아내거나 만들어낸다.


해결 안돼도 ‘나빠도 새것이 낫다’
인기영합용 제스처로 표심 못잡아

인기 영합용 탈꼰대 제스처 안돼

정치적 상상력이 협소하고 빈약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몸통’의 문제를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며 그 자체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대신 그 끓어오르는 불만을 표출할 만한 대상을 찾는다. 포퓰리스트, 정치 유튜버, ‘사이버 레커’들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공유하면서 잔가지의 문제들에 대한 ‘학습된 분노’를 서로 증폭시킨다.

지난 재보선에서 나타난 30대 이하 유권자의 돌출적인 투표 경향은 다음과 같은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금언으로 요약된다고 생각한다. ‘옳지만 낡은 것보다 나쁘더라도 새로운 것이 낫다.’ 정치적 확신이 없는 이들에게 당장 새로운 것이란 정권교체다. 하지만 정권교체만으로 몸통의 문제가 해결되리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이대로 발본적인 변화 없이는 과거 세대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어떠한 변화를 요구해야 하는지 아직 잘 알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30대 이하 청년들 몇명 불러다가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이냐라고 물어봤자 큰 의미가 없다. ‘지금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옳다’는 확신을 단호하게 갖고, ‘내가 원하는 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로 일관하며 실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낫다.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잡음과 갈등에도, 좌고우면 않고 ‘척’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편이 낫다. 당장은 꼰대처럼 보이겠지만 인기 영합용 탈꼰대 제스처보다는 대놓고 꼰대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낫다.

2021.8.14. ‘위선 프레임’은 흥미롭다, 그러나 위험하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위선 프레임’은 흥미롭다, 그러나 위험하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프레임의 문제

60여건 성범죄 연루된 미 ‘국민아빠’
성범죄자란 사실보다 ‘위선자’ 지탄

  • 수정 2021-08-14 11:47
  • 등록 2021-08-14 11:47
미국 코미디언 빌 코스비(가운데)가 성폭력 유죄 판결을 받고 2년간 복역하던 도중, 지난 6월 재판에 넘겨지는 과정 등에 절차적 하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석방돼 그의 대변인(오른쪽)과 함께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코미디언 빌 코스비(가운데)가 성폭력 유죄 판결을 받고 2년간 복역하던 도중, 지난 6월 재판에 넘겨지는 과정 등에 절차적 하자가 있었다는 이유로 석방돼 그의 대변인(오른쪽)과 함께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코미디언을 물으면 빼놓지 않고 놈 맥도널드를 꼽는다. 그는 굉장히 아슬아슬한 유머를 구사하는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기도 한다. 얼마 전 미국의 코미디언 빌 코스비가 성폭력 혐의로 복역 중이다가 돌연 석방되어 미국 사회가 떠들썩한 일이 있었다. 마침 코스비의 성폭력에 대한 폭로가 여기저기서 나올 때 놈 맥도널드가 그에 관한 조크를 던진 바 있는데 이게 굉장히 재미있어서 여기에 간단히 소개를 해볼까 한다.

“친구 한명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 빌 코스비가 최악인 점은 그가 위선자였다는 점이라고. 난 동의하지 않았지. 그게 최악이라고? 강간범이라는 게 최악이 아니라? 그다음으로 최악인 건 약을 먹였다는 거고, 위선자였다는 건 저 한참 밑에 있어야지. 내가 전문가는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강간범들이 위선자들이었을 거야. 안 그래?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거 아니야. ‘나는 강간하고 싶어.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간이 좋다고.’ (이렇게 말했으면)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니까 최악은 아니겠네? 우리가 여자애라고 상상해보자. 빌 코스비가 나한테 접근하더니만 갑자기 내가 쓰러져버린 거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이게 뭐야, 내 눈앞에 웬 코스비 성기가 있네. 코스비 성기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지? 가만있어봐, 이제 기억이 날 것 같아. 아무래도 도움을 구해야겠어. 도와주세요! 위선이야! 빌 코스비가 나한테 위선을 저지르고 있어요!”

‘국민아빠’ 코스비의 실체

잘 알다시피 빌 코스비는 ‘국민아빠’로도 불리던 전설적인 원로 코미디언이다. 미국의 코미디언은 물론이고 많은 연예인이 코스비의 시트콤을 보고 그를 존경하면서 성장하고 연예인의 꿈을 키웠을 테다. 코미디언들에게 빌 코스비 성대모사는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따라서 코스비의 성폭력 폭로가 나왔을 때 미국 연예계가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도 만만찮게 나왔다. 사실 코스비의 만행은 미국 연예계에서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폭로가 나오기 한참 전부터 코미디 프로그램들에서는 코스비가 거론될 때면 항상 성추행 관련한 인사이드 조크(특정 집단 내에서만 이해하는 농담)가 은근하게 나오곤 했다. 하지만 코스비가 거물이었던 탓에 대놓고 이야기하거나 그의 행동을 막을 시늉이라도 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자신의 스탠딩 코미디 쇼에서 “그 새끼 강간범이에요”라고 외쳤던 해니벌 버리스가 유일할 것이다.


미국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사례와 비슷하게 코스비는 할리우드 동료 연예인들과 고위 관계자들의 방관 혹은 비호 아래 수많은(알려진 고소만 60건이 넘는다)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했다. 비호라는 말이 지나칠지도 모르지만, 상당수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억만장자이자 끔찍한 조직적 성범죄자였던 제프리 엡스틴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사실이 드러난 만큼 미국 대중이 코스비에 관련해서도 비슷한 의구심을 갖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러한 대중의 시선을 의식한 연예인들은 가장 존경하는 연예인으로 코스비를 꼽고 그와의 특별한 인연을 과시했던 과거를 뒤로한 채 코스비가 위선자라고 비난했다. 성범죄자를 가리켜 위선자라고 비난한 의도는 매우 뻔하다. 선한 척을 했기 때문에 그의 만행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와 가깝게 지냈지만 자신하고는 전혀 무관한 일로 거리를 두려는 의도였다. 놈 맥도널드는 바로 이것을 조롱한 것이다.


범죄에 위선 프레임이 씌워지면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라져버린다. 범죄행위 그 자체 말이다. 한국에서 정부·여당발 비위가 보도될 때면 항상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 키워드가 위선이다. 위선을 욕하기는 쉽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짓을 저지른 사람도 돌을 던질 수 있다. 위선 프레임이 강해지면, 비리를 저지른 사람과 같이 상류층 사회에서 암암리에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널리 자행되던 방식으로 부정 축재에 가담했거나 그것을 지근거리에서 뻔히 지켜봐왔던 다른 사람은 은근슬쩍 비난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어떤 비리를 저지른 유명인과 사회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유난스럽게 그의 위선과 ‘내로남불’을 물고 늘어진다면 한번쯤 의심을 해봄 직하다.


범죄·비리행위에 반복된 위선 프레임
대놓고 나쁜 자를 더 자유롭게 한다

‘위선 프레임’으로 진실 흐려선 안 돼

그리고 위선을 욕하기는 더 재밌다. 위법행위 자체와 전혀 무관한 피의자의 과거사까지 캐내어 단죄의 레토릭으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위선을 떨며 던졌던 사회적 메시지 및 활동들과 그 사람이 저지른 범죄행위를 열거하여 그 부조리함을 조롱하고 망신 주는 것은 일종의 오락거리가 되고 있다. 지배 계층의 표리부동함을 폭로하는 데에는 이만하게 탁월한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유희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위법행위가 시야에서 사라질 뿐만 아니라, 위선의 일환으로 던진 사회적 메시지의 가치마저도 깡그리 부정돼버린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한 남자가 성범죄를 저질렀다. 그런데 이 사람이 활발하게 여성혐오를 비판하고 페미니즘을 주창하던 사람이다. 언론은 그 사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여론은 이 사람의 위선을 비난한다. 이러한 가십거리가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반복되면 ‘남성 페미니스트=위선’이라는 등식이 만들어지고 이것은 곧 ‘페미니즘=위선’으로도 이어진다. 이런 식으로 사실상 모든 진보적 의제에 위선 프레임이 씌워지고 있다.

범죄·비리행위에 위선 프레임 씌워지기가 반복되면 결국 ‘위선은 나쁘다’라는 공식만 남게 된다. 이 공식은 청년들 사이에서부터 천천히 지고의 가치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말하자면 ‘생각의 그물망’처럼 되어, 위선을 떨지 않고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는 사례는 이 그물망에 걸리지 않게 된다. ‘적어도 위선자는 아니니까 최악은 아니네?’라는 놈 맥도널드의 웃긴 대사는 지금 여기저기서 아주 진지하게 언명되고 있다.

창작과비평 196호 <그런 세대는 없다> 촌평. 누가 왜 자꾸 그런 세대가 있다고 우기는가

  나는 386 세대 (‘586’, ‘n86’ 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 을 선호한다 ) 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 특히 386 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