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6일 수요일

창작과비평 196호 <그런 세대는 없다> 촌평. 누가 왜 자꾸 그런 세대가 있다고 우기는가

 나는 386세대(‘586’, ‘n86’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을 선호한다)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특히 386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의 어깨에 서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86세대가 과거 기득권에 저항하다가 기성세대로 성장하고 기득권이 되어 청년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명제가 일부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386세대 전체를 한국사회의 모든 병폐가 의인화된 집단으로 폄훼해버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저 명제에서 386이라는 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전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이른바 ‘386세대의 독식과 그 때문에 미래를 박탈당하는 청년세대라는 구도를 생산하는 담론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세대 간의 체계적인 불평등이 있어 386세대가 양보를 해야만 많은 사회적 병폐가 해소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세대 선정주의에 불과하다. 그 선정적인 허구성은 저자가 인용하는 다음의 조사결과만으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의 34세 이하 청년들 사이에서 386이나 586이라는 용어 자체를 잘 모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44%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386세대가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다라는 문항에 80%가 동의했다고 한다. 386세대에게 갑질을 당하고 그들에 대해 강한 원한을 갖고 있다고 말해지는 청년들 상당수가 386이라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그 유래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오래전부터 그 의미와 용례를 잘 알고 써왔던 것처럼 잔뜩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386이라는 말의 용례에는 정치사적인 맥락이 있다. 1980년대 대학생 신분으로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에 앞장섰던 운동가, 이론가들 상당수가 1990년대 말에 제도 정치권 및 학계에 진출하게 되면서 차기 리더로 촉망받는 이들을 묶어서 지칭하는 용어로, 90년대 초반에 보급되었던 가정용PCCPU모델명에 빗댄 이름이다. 이 사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유망주로 불리던 당시의 저 젊은 정치인 혹은 학자들을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집단으로 묶어 호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똑같이 출발한 386이더라도 지금은 각자가 서로 크게 다른 정치적, 사회적 위치에 서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486, 586으로 바꿔가며 쓰이면서 1960년대생 세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확장됐고, 이제는 저자가 말하듯 그 지시 대상은 50대 엘리트 집단, 진보 정치 및 시민사회 세력, 60년대생까지 뒤범벅이 되었다.

이렇게 동시에 아주 많은 것을 의미하면서 그 무엇도 확실히 지시하지 않아 내용은 빈약하지만 그 표현 자체는 강렬한 단어는 그때그때 쓸모에 맞게 변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그 쓸모란, 기득권과 비기득권 간의 사회적 갈등을 세대 간 갈등으로 치환하고, 그러면서 그 원한과 적대의 방향을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진영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같은 기성세대 기득권이라 할지라도 세대 갈등의 원한이 보수세력에게 뻗치지 않는다.

386이라는 용어의 무기화가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세력 그리고 진보진영 전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저기에 80년대 학생운동을 한 운동권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의힘을 위시한 보수세력에도 운동권 출신이 많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지점에서 <그런 세대는 없다>의 탁월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다양한 객관적 자료를 통해 세대론을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대론이 담론의 산물이라는 점을 짚어주며 세대론이 어느 세력에게 유리하게 기능하는지를 고찰하도록 유도한다. 나는 여기에 담론 공세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담론 공세는 보수세력이 유력언론과(일부 좌파 진영도 함께) 야합하여 담론을 인위적으로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담론 공세의 큰 계기가 된 사건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에 대한 20대의 유다른 반발이었다. 보수세력은 이 사건을, 견고했던 문 정권의 지지율을 20대에서부터 무너뜨릴 기회로 삼았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에서 공정이라는 말을 취해 문 정권의 자가당착을 공격하는 키워드로 활용했고, ‘불공정에 분노하는 청년세대를 호명하고 동원하기 위해 386세대를 청년의 적으로 제시했다.

보수세력의 이러한 담론 공세 전략은 조국 전 장관 검증 과정에서 붙은 시비와 이른바 인국공 사태에서 절정에 달했고 특히 주효했다. 저자가 책에서 보여주듯이 이 두 국면을 거치면서 청년공정을 연계하는 정치권 및 언론발() 담론이 폭증했다. 담론에서 무엇을 말하느냐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라고 저자가 강조한 것을 상기해야 한다. 조국 전 장관에 붙었던 불공정시비는 소위 엘리트 계층 전반의 스펙 품앗이’, 상징자본 세습의 관례에 관한 진지한 논쟁으로 이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담론 공세는 조국 전 장관 개인과 일가족을 한국사회의 모든 불공정의 화신으로 만들었고, 그에 대한 사적제재에 가까운 공격은 청년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으로 둔갑했다. ‘인국공 사태와 관련해서는 이른바 꿈의 직장이라는 말과 결부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와 불평등에 관한 문제가 함께 제기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보도는 출처도 불분명한 메신저 단체대화방의 연봉 5000 소리질러에만 주목했고, 이는 불필요한 감정싸움의 기폭제가 되었다.

보수세력의 끈질긴 담론 공세 결과, ‘386세대=기득권=문재인 정권=민주당=진보세력=무능=불공정=위선=내로남불이라는 담론 사슬이 형성됐다. 그렇게 386세대가 악의 축으로 지목되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반대편에는 청년=2030=MZ세대=공정성의 희구=불공정과 위선에의 분노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청년세대는 반정부의 첨병으로, ‘권력 비판의 핵심 병기로 내세워지게 되었다. 하지만 예컨대 조국 전 장관을 잔뜩 비난하던 청년들 중 전임 법무부장관의 이름을 하나라도 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라 확신한다. ‘조국 사태직전까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어느 정부부처 인사의 이름을 유난히 입에 올리며 반정부의 시류를 탄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부자연스러운 일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담론 공세밖에 없다.

신진욱 교수의 <그런 세대는 없다>는 여러 객관적 자료로써 386세대론과 청년세대론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그리고 일반화를 해선 안 된다라는 식의 세대론의 교과서적인 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워드클라우드, LDA 토픽모델링을 활용한 정밀한 분석으로써 특정한 세대 호명과 그에 따라붙는 의미의 연쇄가 결코 자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저자가 강조했듯이 담론은 세상에 대한 해석과 반응의 틀이다. 이 틀을 약간 비틀기만 해도 유권자 동원을 넘어 정권교체까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

전북문화저널 2022년 3월

 전북문화저널 원고 김내훈

 

대통령 선거를 치른 후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당선자의 국정 수행 긍정 전망이 50%가 채 되지 않는다. 박근혜조차도 당선 직후 긍정 전망치가 64%가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충격적인 수치다. 이것은 윤석열 당선자에게 투표한 사람들조차 처음부터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투표를 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대를 안 하는 것을 넘어 벌써 후회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잘하리라는 기대도 염원도 없이 2번 후보를 찍은 것인가? 60% 가까이 윤석열 후보를 선택한 20대 남성 유권자 대다수는 정권 교체와 이준석 대표 등의 반페미니즘 행보에 동의하는 것을 선택의 이유로 꼽았다. 나는 윤석열 후보에게 투표한 92년생 남성인 한 친구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름 신선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했으니 민주당의 폭주를 막기 위해 정권이 교체되어야 하고, 윤석열 당선자와 국민의힘은 의석수에서 크게 밀리기 때문에 균형 잡힌 국정 운영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반페미니즘, 여성가족부 폐지 따위 운운하는 것에 비하면 나름 합리적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친구의 논리야말로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 원흉이란 사회와 정부와 국가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각 주제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단행본 수십 권은 필요할 테지만 그러한 높은 수준의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사회와 정부(정치)와 국가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구별이 안 된 탓에 오늘의 선거 비극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먼저 정부와 국가를 비교하자면, 국가가 더 큰 범주의 개념이라는 것은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시간을 투자한다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전혀 어렵지 않다. 현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생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형성된 기구라고 하는 맑스주의적 국가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지배계급의 계급지배를 유지하거나 조금이나마 계급 모순을 완화하는 기능을 하는 정치 기구라고 말할 수 있겠다. 후자의 기능을 얼마나 잘 수행할 것이냐는, 국가의 키를 잡고 조종하는’(정부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guberno) 정부의 의지와 역량에 달려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를 구성하는 것으로 정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군대, 경찰 등 공권력, 검찰과 대법원, 헌법재판소 등 사법 권력 그리고 관료 등이 모두 국가의 일부로, 억압적 국가장치로 분류된다. 억압적 국가장치는 사회의 유지와 재생산을 인민의 동의 없이 폭력과 억압으로 수행한다. 이러한 비선출 권력 앞에서 개혁적 정부의 개혁 시도가 좌절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심지어 쿠데타처럼 정부를 엎어버리는 일도 있다. 쿠데타는 너무 극단적일지라도, 어찌 됐건 진보적·개혁적인 정권에 협조적인 군대나 검찰, 진보적 정책에 발맞춰 기민하게 움직이는 관료 집단 등을 상상하기는 매우 어렵다.

억압적 국가장치 외에 폭력이나 억압이 아니라 비강제적인 연성 권력으로써 사회의 재생산을 수행하는 국가장치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있다. 이것은 언론과 대중미디어, 학교 교육, 종교, 노동조합, 가정을 포함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사회의 일원, 노동자로서의 자질을 작업장 바깥의 사적인 영역에서 재생산한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조금이라도 차별을 완화하려 하는 자유주의적 조처와 정책에 눈알 뒤집힌 채 반기를 드는 종교 단체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언론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다. 민주당 정권 아래 어떤 정책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만이 제기되면 엄청난 큰일이라도 일어난 양 호들갑을 떨고, 민주당 정권 인사의 기자회견에서는 공격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권력의 감시자 행세를 한다. 이것 자체가 문제랄 것은 없다. 하지만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자 앞에서는 귀하신 분의 심기라도 건드릴까 전전긍긍하며 질문을 하는 게 외람된다며 양해부터 구한다.

이렇듯 보수세력에 유리하게 매우 불균형한 조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답시고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논리가 얼마나 천부당만부당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민주당의 총선 압승은 균형추를 아주 살짝 옮긴 것에 불과하다. 또한 21대 총선의 전체 득표수를 고려한다면 민주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인상은, 승자독식 선거 제도가 일으킨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사회는 경제와 정치와 국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우리가 으레 경제가 어렵다라고 하면서 갖게 되는 불만들 중 대다수는 사실 경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에 기인한다. 경제 자체만 놓고 봤을 때 한국은 오히려 그동안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우리의 삶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어려워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기업들이 고용을 줄이고, 더 많은 일자리에 투자하지 않고 금융과 부동산에 투자하도록 강제되는 사회 구조의 문제 탓이다. 사회 구조에 관련한 불만을 사회적 불만이라고 한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누적됐던 사회적 불만을 청년들이 높은 밀도로 응집시켜 유행시킨 단어가 바로 헬조선이다.

극심한 경쟁에 시달리며 누구보다 더 노력하면서도 보상이 따르지 않는 헬조선 사회에 대한 불만을 키우던 가운데 갑자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특히 정유라의 불공정 사례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정유라가 한국 사회의 모든 불공정과 불평등의 화신이 되었고 한국 사회 구조의 문제는 갑자기 정유라의 불공정 및 최순실 등 국정 농단 세력의 탓으로 환원되었다. 이에 따라 헬조선에 대한 사회적 불만은 정권 퇴진 요구로 빠르게 모였고, ‘정권 퇴진은 수많은 인파를 촛불시위에 동원한 강력한 기호가 되었다.

다소 도발적인 명제를 던지자면, 2016년말 촛불시위와 20대 대선은 같은 논리로 진행되었다. 사회와 정치와 국가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국민들은, 정권만 교체되면 사회 문제가 해결되고 사회적 불만이 해소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한 기대와 희망을 갖고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연달아 민주당에 승리를 안겨줬다. 하지만 복잡한 사회 구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여러 개혁 정책들은 정부를 제외한 다른 국가 장치들 앞에서 미흡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른바 조국 사태’, ‘인국공 사태’, ‘윤미향 사태’, ‘LH 사태등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가차 없는 공격과 호들갑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모든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구조가 민주당 세력으로 의인화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정부와 국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국민들에게 민주당 정부는 엄청난 의석수를 가지고도 문제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역대 가장 무능하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세력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국민에게 응징의 정서가 강하게 각인되었다. 절반 가까이 되는 유권자가 아무런 의제도 없이 혐오만 설파하는 후보에게,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은 채 그저 응징이라는 일념으로 표를 던졌다. 그리고 벌써 자신의 손가락을 저주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있다.

 

2021년 9월 지능정보윤리 이슈리포트 '관종의 세계'

 지능정보윤리 이슈리포트 김내훈

관종의 세계

 

미국에서 우유 상자 챌린지’(milk crate challenge)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우유 상자를 계단식 탑처럼 쌓아놓고 중앙 가장 높은 곳까지 걸어 올랐다가 내려가는 모습을 촬영하는 짧은 영상이다. 우유 상자가 튼튼하지 않은 탓에 굉장히 위태롭다. 열에 아홉은 중앙까지는 어떻게든 오르더라도 내려가다가 머리부터 고꾸라진다. 전신마비에서 사망까지 우려되는 일이라 끝까지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라는 말만 속으로 되새기게 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우유 상자 챌린지 영상을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여럿이서 촬영한다는 점이다. 위험천만하게 상자를 오르는 사람을 응원하는데, 오르다가 넘어지면 누구 하나 걱정하는 사람 없이 그를 둘러싸고 깔깔 웃는다. 챌린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비웃음당해 마땅하다는 듯이 말이다. 심지어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우유 상자를 차버려서 상자에 오르던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단지 웃음 때문에다. 성공하면 영상이 아무래도 심심해질 터이다. 아마 곧 본사로부터 삭제 조치 되겠지만, 유튜브에 ‘milk crate challenge’를 검색해보면 우스꽝스럽게 고꾸라지는 것을 넘어 크게 다쳐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나 아예 즉석에서 사망한 장면만 모아서 편집한 사망 모음집’(death edition)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댓글난에는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다. 멍청이들이 멍청한 짓 하다 죽은 것뿐이다.’라며 조롱하는 반응으로 가득하다.

이외에도 경악스럽고 위험천만한 챌린지가 유행한 바 있다. 수직으로 뛰어오른 사람의 종아리를 양옆에 선 두 사람이 걷어차서 공중제비를 돌게 만드는 대가리 깨기 챌린지’(skullbreaker challenge), 콘센트에 플러그를 느슨하게 꽂은 뒤 동전을 갖다 대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콘센트 챌린지’(outlet challenge), 캡슐형 세탁 세제를 입안에 넣고 터뜨리는 타이드팟 챌린지’(tide pod challenge), 공중화장실 좌변기 시트를 혀로 핥는 코로나 챌린지’(corona challenge), 알러지 약을 과복용하는 베나드릴 챌린지’(benadryl challenge) , 틱톡TikTok 및 유튜브 조회수의 꼭대기와 인간 지능의 바닥을 동시에 경신하는 영상들이 젊은 네티즌들의 인터넷 공간을 잠식하고 있다.

 

주목경제

가장 멍청한 죽음사례에 수여한다는 다윈상 후보에 오를 법한 챌린지에 참여하고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소위 인싸문화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 또래 집단 내 압력(peer pressure)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조회수 자체가 돈이 된다는 것, 즉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 관심경제)를 들 수 있다. 주목경제라는 개념은 다음의 명제에서 출발한다. 정보시대의 디지털 재화인 정보에는 희소성이 없다. 무한히 생산되고 복제될 수 있는 것에는 값이 매겨질 이유가 없다. 값이 없는 정보에 값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주목이다. 무한한 정보와 달리 인간의 주목은 유한하다.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경제학의 문제라면, 오늘날 주목과 관심의 주고받음은 엄연한 경제행위다.

주목경제 개념을 널리 퍼뜨린 미국의 저술가 마이클 골드하버M.H. Goldhaber는 쉬운 설명을 위해 자동차 생산을 예로 든다. 자본주의 선진국에 한해서 보자면, 자동차는 모든 가정에 한 대 이상 보급될 수 있을 만큼 많이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적당한 성능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또 다른 차를 향한 욕망을 놓지 못하고, 기왕이면 더 비싼 수입차를 원한다. 하지만 같은 교통 법규를 지키며 달려야 하는 조건에서 비싼 차량의 성능 차이를 십분 만끽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가격 차이가 10배 나는 두 대의 차량이 실제 성능 차이도 10배씩 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도 매우 드물 것이다. 사람들은 자동차에서 성능과 기능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 바로 기호다.

생산력 향상으로 인해 상품의 쓸모, 내구성,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것이 품고 있는 기호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자동차의 값을 높이는 것은 브랜드다. 수입차를 몰고 다니는 상류층의 기호, 고가의 수입차로 표상되는 경제적 지위의 기호, 나와 범부들을 구별 짓는 기호에 값이 매겨진다. 기호를 팔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주목이 필수적이다. 사용가치 면에서 대동소이한 상품들끼리의 경쟁은 주목도가 관건이다. 품질보다 마케팅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다.

정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주목이다. 인터넷 및 커뮤니케이션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정보의 공급은 수요를 한참 웃돈다. 무한한 정보의 물결로부터 유의미하고 유익하고 이로운 것을 추려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그나마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채 표류하다가 망각된다. 아무리 유익한 정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것이 된다. 한 사람이 동시에 보낼 수 있는 주목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정보들은 주목을 위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충분한 감식안을 갖춘 사람들에게도 필요하고 유익한 정보를 추려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자연히 당장 눈에 띄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정보에 주목할 때 금세 또 다른 정보가 밀려와서 짧은 시간 안에 주목의 밀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따라서 정보 공급자들의 주목 경쟁이 더 격해지고 콘텐츠는 으레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관심을 위한 인정투쟁

골드하버가 설명을 위해 자동차를 예로 든 데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주목경제는 정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존재하는 모든 재화에 해당되는 이야기며 인간의 노동력도 예외는 아니다. 제대로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주목이 필요하다. 학력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전반적인 역량과 교양이 상향 평준화됨에 따라 구직자들은 스펙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과시해야 하게 되었다. 신규 채용의 자리도 점점 더 줄어들면서 구직자들은 치열한 스펙 경쟁뿐만 아니라 주목 경쟁도 벌여야 한다. 일을 얼마나 잘하고 얼마나 많이 배웠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기본으로 깔아두고 얼마나 잘, 적당한 수준으로 적절한 때 뽐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완벽히 무시하면서 살기로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을 어떻게든 좋게 보이게끔 포장할 필요가 있다. “충분히 큰 공동체 안에서 동료 인간들과 살게 되면서 우리는 그들의 눈에 가능한 한 유능한 존재로 보이고 싶어 하고, 그래서 행위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속성을 그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통용되는 관종’(관심종자)이라는 말에서 종자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의 씨앗, 즉 근본부터가 다름을 의미한다. 관종의 시대(2020)라는 책을 쓴 김곡이 말한 대로 오늘날 관심은 돈과 삶의 개념 자체를 그 종자부터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일정 정도 관종끼를 갖고 살 수밖에 없다. 주목과 관심이 가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종은 더 이상 조롱과 비난이 담긴 멸칭이 아니라 과거와 구별되는 현대인의 특징으로까지 거론된다. 같은 관종이라도 좋은 관종나쁜 관종을 구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임홍택 작가의 관종의 조건이 그렇다. 그는 21세기를 리드하는 좋은 인재가 되기 위해 좋은 관종이 되기를 요구한다. 지금은 과묵히 할 일을 하는 겸손함이 미덕인 시대가 더 이상 아니며, 본인의 역량을 다만 과하지 않게, 과시할 수 있는 상황이 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여줘 유능한 인재로 눈에 띄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항시적이고 더 치열한 주목 경쟁과 인정투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조회수 장사의 조건

문제는 좋은 의미로 눈에 띄는 것을 나쁜 의미로 눈에 띄는 것이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정보는 그것의 유무익함과 상관없이 주목도로 가치가 정해지는데 눈에 띄는 무익한 정보가 눈에 띄지 않는 유익한 정보를 밀어내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특히 주목경제 시대와 데이터 시대가 맞물리면서 조회수 장사꾼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데이터는 정보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자료며, 데이터에 의미가 부여된 것이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데이터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주요한 연료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이용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뽑아낸다. 플랫폼에 입력되는 이용자의 언어, 생활 동선, 검색 기록, 소비 경향, 이용자 간 상호작용, 게시물 선호 경향, 긴 글, 짧은 글 등 닥치는 대로 수집한 데이터는 기업의 자산이 되고 다른 기업에 판매되기도 한다. 쌓인 데이터의 양이 임계치를 넘기면 일정한 패턴이 형성되는데 이것을 정보로 가공하여 상품의 수요를 분석해 맞춤형 광고를 송출하고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다. 기업의 운명 역시 남들보다 빠르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데 달려 있기 때문에 데이터 확보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더 많은 데이터 수집을 위해 더 많은 이용자 유입이 필요하다. 따라서 오늘날 플랫폼 기업은 이용료를 무료에 가깝게 낮춰 당장의 이윤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용자 확보를 더 중시한다. 그렇다고 이윤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용자들이 플랫폼을 경유해 행하는 활동들(글과 이미지 게시, 좋아요 누르기, 추천과 비추천, 댓글, 시청 행위 등)은 그 자체로 이윤을 발생시킬 수 있는 데이터가 된다. 이용자들은 상품을 구입하지 않고도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준다.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생산하는 자유무료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유명 유튜버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들이 끌어들이는 신규 이용자들과, 이들이 생산해내는 데이터로 창출한 천문학적인 이윤의 극히 일부를 떼어 준 격려금에 지나지 않는다.

코로나 챌린지, 우유 상자 챌린지 등 무익하고 무의미함을 넘어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스턴트 행위는 소셜미디어 플랫폼 기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아무런 정보값도 없고 해롭기만 하지만 빅데이터의 일부가 되어 인공지능 딥러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될 수 있다. 위험천만한 챌린지로 뭇사람의 이목을 끌어 이용자 유입을 유도한다면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든 기업 입장에서는 더없이 이롭다.

 

조회수를 높이는 쉬운 방법

눈에 띄어야만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주목경제 시대에서, 그리고 눈에 띄면 띌수록 그 주목도에 비례하여 화폐로 보상을 받는 데이터 시대에서 눈에 잘 띄는 것은 그야말로 지고의 선이 되었다. 뭇사람의 이목을 끌고 주목을 유발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양질의 콘텐츠로 승부하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콘텐츠에는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나 형식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거나, 낯설고 어려운 이슈를 더 넓은 범위의 대중이 접할 수 있게끔 연성화하는 것 등 다양하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건 목불인견 수준의 혐오스러운 연출과 언동, 폭력적이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표현 공해로 누구든지 한 번쯤은 그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이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방법이 훨씬 쉬울 터이다. 눈 딱 한 번 감고 위험한 챌린지를 성공시키고 유행시키면 단번에 이른바 인플루언서로 지위 상승을 할 수 있고 보너스로 돈도 벌 수 있으니 이제는 삼척동자도 이 행렬에 가세하고 있으며, 혐오감을 자아내는 콘텐츠가 주목 경쟁에서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미국에서처럼 저 해괴한 챌린지들이 유행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겠지만, 비슷한 사례를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유행 초기에 감염자 행세를 하며 공공장소에서 콜록거리고 쓰러지는 난동을 부리고, 도망가는 확진자와 그를 쫓아가는 당국자의 추격전을 연출해 공포감을 조성하다가 입건된 유튜버가 있었고, 투렛 증후군을 연기하며 조회수를 올리다가 발각된 유튜버도 있었으며, 움직이는 자동차 바퀴에 신체 일부를 깔리고, 전구를 씹어먹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도 있었다.

물론 관심을 갈구하는 행위가 반드시 위의 경우들처럼 분노와 혐오감을 유발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목과 관심을 받기 위해 더러운 길거리를 청소하고, 노숙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적극적인 모습을 연출하여 과시하고 다니는 사람도 매우 쉽게 접할 수 있다. ‘단지 관심받기 위해 착한 척한다라는 비아냥을 받기는 하겠지만 어찌 됐건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효과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눈에 띄는 것만이 관건이기 때문에, 선행을 과시하는 데만 집착하며 진정성과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그 상징자본, 매력자본의 알맹이만 취하려 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미국에서 특히 그러한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대규모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BLM) 시위 도중 다수의 약탈과 기물 파손 행위 등 폭동 사례가 있었는데 이러한 안타까운 사건들은 소셜미디어 관종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일찍이 열심히 가꾼 몸매를 과시함으로써 많은 구독자와 추종자를 확보한 다수의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은 사회적 이슈들에 관련해서도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폭동으로 인해 파손된 공공 기물들을 수리하고, 건설노동자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런데 이들 중 다수는 건설현장이나 청소현장에 난입하여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장비, 도구를 들고 일을 거드는 척만 하며 촬영을 한 뒤 자리를 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와 같은 관종질의 사례는 앞서 열거한 혐오감과 공포를 유발하는 망동과는 달리, 보는 사람에 따라서 더 가증스러워 보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엄청난 해악을 사회에 몰고 오지는 않는다. 다만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하지만 관종들을 향한 일반 대중의 원한과 경멸감은 이들로 인해 훨씬 크게 증폭된다. 이 와중에 이러한 관종에 대한 원한과 경멸을 자신만의 콘텐츠로 삼는 유튜버들이 나타나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관종들의 과격한 행동들, 가식과 위선, 나르시시즘을 조롱하는 것은 유튜버들의 조회수 장사의 새로운 장르, 대중에게는 새로운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관종의 생태계

인터넷의 한쪽에서는 관종들의 콘텐츠가, 다른 한쪽에서는 관종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콘텐츠가 유행함에 따라 이제 인터넷 인구는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관종들의 콘텐츠에 열광하고 모방하는 사람들, 관종들 및 관종들의 콘텐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이 위험한 짓을 하다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으면 바보가 죽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비아냥대면서 자기 효능감을 얻고 상대적 우월의식을 높이는 사람들, 둘 모두에 무관심하고 시큰둥한 사람들이 그것이다. 관종 콘텐츠들끼리의 주목 경쟁이 치열해져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될수록 두 번째 집단의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첫 번째 집단과 두 번째 집단은 공생관계를 맺는다. 관종들을 조롱하고 욕하기 위해서는 일단 관종의 콘텐츠를 공유해야 한다. 그것만으로 관종에게는 새로운 조회수 유입이 되어 더없이 도움이 되는 고마운 일이다. 관종을 조롱하는 것을 콘텐츠로 삼는 사람들로서는 소재의 원천이 마를 일 없어 편하고, 더 신랄하고 시원하게 조롱할 방법을 연마하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조회수를 끌어올릴 수 있다. 이제는 이들 사이에서도 주목 경쟁이 벌어져 날이 갈수록 조롱과 비난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보다시피 관종을 조롱하는 콘텐츠가 유행해도 관종들의 활동이 위축되지는 않는다. 조롱 콘텐츠가 유행하는 데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거짓 효능감이다. 관심 좀 받자고 저렇게 정신 나간 짓을 벌이는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는 생각에서 오는 만족감이다. 이러한 상대적 우월감은 인터넷에서 생산되는 콘텐츠들에 대한 전반적인 기대치를 낮추고 그에 요구되는 전체적인 완성도를 낮춘다. 그 결과, 관종들의 위험한 챌린지에 버금가는 혐오스럽고 과격하고 반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더라도 겉으로는 해괴망측한 짓만 하지 않으면 점잖고 유익한 정보를 담은 콘텐츠로 비춰지게 된다.

또한, 거짓 선행을 과시하는 관종들을 조롱하는 것이 일종의 유희 거리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는 선행을 베풀고 적극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 네티즌들의 시선에서 가식적인 관종질에 다름없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게 된다. 선행을 하고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 중 단지 주목과 관심을 얻기 위해 가식으로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세계의 좁은 일부가 전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모든 사회적 활동과 메시지, 어젠다들 자체가 일부 젊은 네티즌들에게 가식과 위선으로 기각된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 ‘BLM’운동을 위시한 반인종주의 메시지의 가치가 통째로 가식과 위선으로 축소되는 위험한 현상이 목격된다.

항시적인 인정투쟁과 주목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관종들에 대한 분노로 쏟아낸다. 이들 중 일부는 이러한 분노의 표출이 지속되면, 자신들의 인정투쟁 자체에 대한 환멸로 이어져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말의 가식과 위선을 전부 벗어버리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갖게 된다. 이들은 위선에 반한답시고 위악으로 나아가 과격하고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언행을 보이는 트롤로 전락하기 쉽다. 일부는 인터넷 바깥에서도 트롤이 된다. 관종을 누구보다도 혐오하고 비난하던 사람이 더 악질 관종이 되어버리는 것이 바로 관종의 세계다. ‘관심을 주지 말자’, ‘병신에게 먹이를 주지 말자라는 단순한 진단 이상의 정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소음에 불과한 것들이 유익한 정보를 밀어내고 인터넷 이용자들을 양극으로 분열시키는 관종의 생태계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나로서는 아직 과문한 탓에 불가능하다. 나도 마찬가지로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여가시간을 보내는 범부에 불과하다. 일개 네티즌으로서 건전한 정보 이용, 인터넷 이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을 정화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일단 알고리즘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다. 유튜브 메인화면 우측 상단에 있는 계정 관리 버튼을 누르면 “YouTube의 내 데이터메뉴가 있다. 여기서 영상 시청 기록과 검색 내역 기록을 중지시킬 수 있다. 혹은 인터넷 브라우저에 제공되는 시크릿 모드기능을 이용하면 된다. 이 조처를 하면 어쩌다 클릭하게 된 관종 콘텐츠로 인해 유튜브 알고리즘이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관종 콘텐츠들의 선정적인 낚시성 썸네일에 낭비하는 시간을 줄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가 되었건 관련 정보를 찾아보려 할 때 유튜브부터 검색해보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관종 콘텐츠나 음모론, 혐오 콘텐츠를 공개적으로 조롱하거나 비판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공유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조치들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안 하는 게 중요하다

창작과비평 196호 <그런 세대는 없다> 촌평. 누가 왜 자꾸 그런 세대가 있다고 우기는가

  나는 386 세대 (‘586’, ‘n86’ 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 을 선호한다 ) 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 특히 386 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