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6일 화요일

For Magazine. Moth People. 나방인간.

 for magazine

 

위대한 코미디언 놈 맥도널드의 농담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한 나방이 어느날 밤 족부의학과 진료실로 들어간다. 의사는 그에게 문제가 무엇인지 묻는다. 나방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매일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의 몸뚱이를 끌고 일하러 갑니다만 이제는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에 자다 깨서 옆을 보면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낯선 늙은 여자가 누워 있어요. 딸 알렉산드리아는 독감으로 죽었고, 나의 아들,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이런 말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만 아들놈의 눈을 보면 내가 거울을 볼 때 항상 보이는 그 비겁한 겁쟁이의 얼굴만 보여서 말이죠. 만약 그 겁쟁이가 조금만 용기가 있었더라면, 침대 머리맡에 장전된 채로 보관해두는 권총에 손을 뻗을 용기만 있었더라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저는 나방이지만 가끔은 거미가 된 기분입니다. 지옥불 위에 펼쳐놓은 거미줄을 간신히 붙들며 위태롭게 살아가는 거미 말이죠. 너무 힘듭니다.”

그의 푸념을 들은 의사는 이렇게 묻는다. “정말 힘드시겠습니다만, 정신과를 찾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 왜 여기로 오신 거죠?” 나방은 이렇게 대답한다. “불이 켜져 있어서요.”

 

세계적인 극우화 물결이 심상치 않다. 트럼프는 재선 실패 후 의회 폭동을 선동하며 바이든 행정부 기간 내내 극언을 일삼다가 기어이 다시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영국의 UKIP은 영국 개혁당(Reform UK)으로 변모하여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독일의 AfD 역시 집권당을 위협하는 지지율을 보인다. 일찍이 2016년 평화적 탄핵으로 민주주의가 공고함을 입증한 바 있었던 한국도 예외일 수 없음을 알려주듯, 직전까지 검찰총장이었던 윤석열이 2022년에 정치에 나서자마자 대통령이 되고, 집권 3년차에 친위쿠데타, 내란을 일으켰다. 천만다행으로 내란은 평화적으로 진압되어 민주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뤄졌지만, 여전히 윤석열을 지지하고 내란을 옹호하며 직전 선거가 부정선거라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특히 한국의 30대 이하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런 사람이 많다는 점이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점이다. 지난 대선에서 20대 유권자 중 극우로 분류되는 두 후보에게 투표한 비율이 리버럴로 분류되는 후보에게 투표한 비율을 상회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성에 한하면 더 심각하다. 20대 이하 남성이 리버럴 후보에게 투표한 비율은 모든 세대 중 가장 낮다.)

한국에 한해서 말하자면, 청년층의 극우화 경향에 대하여 논단은 생각 외로 크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상당수 비평가들은 청년층의 극우화 경향을 그 자체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기성정치의 위선과 양당 구조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오류며,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사람의 시민성에 회복하기 힘든 손상이 일어났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을 전제해야 논의가 막다른 길에 부닥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의 극우 문제를 정치학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면 시민성의 퇴행을 직시하기 어렵다. 정치적으로만 바라보면, 그것은 다만 사람들이 어떤 정치인과 정당을 지지하냐의 문제로 축소되며, 정치 외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극단성을 놓치기 쉽다. 이 극단성은 정치 성향을 불문하고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 말한 극단성이라는 것을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특정 세력에 대한 지지나 뚜렷한 이념이 형성되기 이전의, 맹아적 상태의 강한 에너지다. 그 양상은 이른바 급발진의 형태로 나타난다. 특정 정치인이나 이슈 등 제반 사안에 대한 판단의 축이 극호(신격화)와 극불호(극혐)라는 양극단만 남아 있으며, 외부로부터 입력된 정보에 대한 반응이 반사적으로 양극의 형태로만 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성의 경향의 원인을 나는 정치와는 무관한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감수성의 빈곤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감수성이란, 흔히 이해되는 것처럼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부터 쏟고, 계절이 바뀌고 기온과 습도의 변화에 따라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을 가리켜 감수성이 풍부하다 혹은 예민하다고 할 때의 감수성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말하는 감수성은 자신의 감정 상태의 변화, 신체가 경험하는 일체의 감응에 대한 성찰력을 가리킨다. 슬픈 영화든 기온이나 습도 변화든 외부 환경으로부터 가해지는 자극에 대하여, 의식하기 어려울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를 판단하고 어떻게 반응하면 적절한가를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뇌에 대해 한 이야기를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흔히 이해되는 뇌는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같은 기억의 저장고로, 살면서 체험한 것들을 기억으로 차곡차곡 쌓는 기관이지만 베르그손에 따르면 뇌는 인간이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인간 신체가 세계로부터 받아들이는 일체의 이미지들(자극, 정보)을 선별하는 기관이다. 말하자면 거름망과 같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필요한 것들을 선별적으로 의식화하고 나머지는 무의식으로 보낸다. 그래야만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현명한 행동으로 반응할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생물은 외부로부터의 일체의 자극에 즉시 반응한다. 자극의 입력과 반응으로의 출력 사이의 거리가 0인 것이다. 반면 뇌가 입력들을 선별한다는 것은, 자극에 대한 반응에 지연을 둔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 간극에 시간이 발생하여 작용과 반작용의 결정성에 미결정성이 생기고 창조성과 자유가 탄생한다. 요컨대, 자극의 입력에서 반응의 출력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경로가 뇌 안에 생성되며 이것이 곧 마음의 탄생이라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에 대해, 이 복잡한 회로를 거쳐 분석하고 계산하여 걸러낼 것은 걸러내고, 성장 과정에서 누적해온 경험에 비추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한다. 나는 이 회로가 단순한 사람을 가리켜 감수성이 빈곤한 사람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어린이를 웃기거나 울리기가 그토록 쉬운 이유가 어린이는 아직 이 회로를 성숙히 발달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자신이 경험하는 불쾌한 감각과 그로 인한 기분 나쁜 감정을 언어로 잘 표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악부터 쓰고 울음부터 터뜨리는 것이다(리사 펠드먼 배럿의 <How emotions are made>을 참조하라).

말하자면, 불시에 찾아오는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사회화의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것 등의 정보의 입력에서 반응으로 출력되는 경로가 얼마나 길고 짧냐에 따라 포용 관용이 될 수 있고 혐오 폭력이 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건대 현재 한국 사회는 후자로 기울고 있다. 특히 젊은 사람을 필두로 미취학 아동의 수준을 밑도는 빈곤한 감수성, 뇌내 회로의 단순함을 노정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갈수록 더 노골화되는 한국 청년층의 문해력과 어휘력의 저하 경향과 맞물려 전례 없는 퇴행을 야기하고 있다.

현대인의 리터러시를 연구하는 조병영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문해력의 저하는 맥락 파악의 무능력으로 이어지는데 그 전형적 증상 중 하나가 특정 단어에만 반응하고 집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조병영의 <읽는 인간> 참조). 이것은 갈수록 많은 사람이 자신이 싫어하는 어떤 것을 표상하는 특정 단어나 이미지가 보이면 화부터 내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한국에서 있었던 대표적인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맥락을 설명하자면, 한국에서는 지난 10여년동안 페미니즘에 대한 청년 남성의 백래시가 문제적이었는데, 한국 청년 남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연상케 하는 무언가가 보이면 즉각적으로 신경질적인 매우 싫음의 반응을 보이는 데로 발전했다. 이러한 급발진은 현실에서의 폭력으로도 이어진다. 2023년 어느 편의점에서 일하던 여성 직원 일면식도 없었던 20대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다. 범행 당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머리가 짧은 걸 보니 페미니스트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여자가 머리가 짧다 여자의 관념을 깨므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는 처맞아야 한다라는 논리로 행동한 것이다. 단순히 자신의 기분을 다소 거슬리게 하는 특정 단어나 이미지에 집착하여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공격성을 드러내는 일차원적 인간이 한국사회 전면에 드러난 순간이다. 자극의 입력부터 출력까지의 회로의 거리가 0에 수렴한 아메바적 인간의 탄생이다.

이것이 과연 한국만의 문제일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다. 숏폼 콘텐츠와 밈의 소비가 디지털 생활의 큰 일부를 차지하는 문화권이라면 이 문제를 피하기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밈을 통한 소통이 위험한 까닭은, 밈은 정보의 입력에서 판단의 출력으로 이어지는 회로의 정해진 공식, 남이 만들어낸 주형이기 때문이다. 즉 뇌의 회로를 스스로 형성하는 대신 남이 만든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으로, 말 그대로 남이 생각하라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접하는 모든 사물, 사안, 사건에 대해 밈을 통해 인지하며, 어떤 것에 대해 반사적으로 호불호를 결정하고 그 이유는 나중에 찾는다. 언론권력, 정치권력이 그것을 알려줄 때까지.

이처럼 어떤 자극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사는 것은 작용 반작용의 결정성과 필연성으로 움직이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시간은 무의미해진다. 이에 관련하여 영국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말한 바와 연결하면 좋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이 시간을 서사로 종합하지 못하고 지금만 살고 있다. 지금의 나가 과거의 경험이 누적된 산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지금의 행동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상상하지 못한다. 시야가 지금 여기에만 머무르게 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만 집중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체의 정치, 시사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하지만 단순 무관심이 아니라 반성적 무기력이다. 현재 살고 있는 삶의 조건과 사태가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정치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믿고 있다. 쾌락 추구 외에 할 것이 없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뭔가를 길게 고민하고 관조하고 천천히 즐길 여유도 없다. 영화는 빨리감기로 보거나 유튜버가 편집한 짧은 버전으로 본다(이나다 도요시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참조). 미학, 연기, 기다림, 서스펜스를 즐길 여유도 없이 그저 내용만 습득하는 것이며 제대로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 즐길 때조차 집중을 못하는 상황에 일체의 감정이 집중되지 못하고 산만해진다. 그때그때 분노를 돋우는 여러 썰들만 보면서 혼자 흥분하고 만다. 이게 반복 지속되어 누적되는 동시에 집중되지 못하면 당장 눈앞의 적에게 모든 분노가 향한다.

반성적 무기력의 원인이 되는 사회경제적 불안은 그것만으로 어떤 정치적 결집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 불안이 어떤 특정한 대상을 향한 불만으로 표출되려면 번역되어야 한다. 사회적 불만에서 문화적 불만으로 올라가면서 대상이 좁아진다. 가장 합리적인 불만의 방향은 사회구조여야 하지만 자신의 불안감을 성찰할 줄 알아야만 거기까지 시선이 닿는다. 자신을 둘러싼 생활 환경 및 조건의 변화와 유동성에 대해 신체가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면 그 불안감의 성질이 무엇인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채 나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언짢게 하는 대상을 향해 불쾌감을 반사적으로 표시하는 것으로서만 정치적 의사 표시를 대신한다. 그 대상을 제시하는 주체가 포퓰리스트와 미디어권력이다.

문화적 불만은 소수자 집단이 문화적으로 억압받는 데서 가지는 불만이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은 인구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비소수자가 스스로 피해자라고 믿으며 문화적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자들에게 미디어권력이 예컨대 성소수자나 이주민, 무슬림, 혹은 중국인(현재 한국 극우의 세계관에서 중국인이 가장 큰 위협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을 가리켜 저 자들이 당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제시하면, 즉 불빛을 제시하면 나방처럼 달려든다. 앞서 소개한 농담의 주인공 나방처럼, 세상 모든 고민을 짊어진 것처럼 고뇌하며 실존적 위기에 맞서 하루하루 투쟁하지만 결국 실질적인 행동은 관성적으로, 의식이나 이성과 무관하게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 켜놓은 불빛만 좇으며 사는 것이다.

 

신인류가 탄생했고 그들은 빠르게 주류로 올라서고 있다. 나방 인간, 일차원적 인간, 아메바적 인간 말이다. 이 점을 전제해야만 막다른 길에 부닥치지 않고 후속 논의의 길이 열릴 수 있다. 나방 인간이 따라가는 불빛을 움직이는 자가 누구인가, 그 불빛을 어떻게 뺏어올 것인가, 일차원적, 아메바적 인간을 어떻게 재사회화할 것인가, 그게 어렵다면 불빛을 이용해서 어떻게 그들을 동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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