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성의 낙수효과와 퇴행
직전 대선에서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는 “정권이 바뀌면 우리 삶이 달라집니까?”라고 외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라진다. 누가 대통령이 되고 어느 정당이 집권하냐에 따라 우리 삶은 크게 달라진다. 신디 스캐치의 <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에서 말해진 시민성의 차원에서, 정치 지도자 자리에 어떤 자가 오르냐에 따라 시민성에 심각한 손상이 일어날 수 있고, 상당한 수준으로 시민성이 회복될 수도 있다. 시민성은 사회 개혁에의 헤게모니의 조건이므로 ‘우리 삶’에 직결된다.
<몸, 스펙터클, 민주주의>에서 김정환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은 박근혜와 윤석열을 끌어내릴 역량은 충만하되 박근혜와 윤석열을 뽑지 않을 수 있는 역량을 길러내지 못했다. 나는 여기에 이 명제를 덧붙이고 싶다. 이제는 박근혜와 윤석열 같은 인물을 끌어내릴 역량마저 모두 소진했을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된다. 2024년 1월 한겨레21 칼럼에 이렇게 쓴 바 있다. “극우 유튜버 수준의 인사가 각료에 있고, 대통령 본인부터가 극우 유튜버의 인식 수준에 갇혀 있으며, 이들이 일으키는 다양한 파행에 유력 언론들은 방관하거나 옹호하는 가운데 상당수 시민의 가치관 또한 그에 맞춰 변화해버렸다. 정부와 여당이 거대한 파행을 저지르면, 시민들은 봉기하지 않고 ‘쟤네들이 저럴 줄 알았다’며 냉소하고 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보다 몇 배는 더 큰 일이 터지지 않는 이상 두 번째 촛불혁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보다 몇 배 더 심각한 일은 계엄령과 내란이었다. 즉 이태원 참사,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의혹, 배우자의 명품백 수수 사건과 주가조작, 언론 탄압, ‘바이든 날리면’ 등, 윤석열이 임기 내내 심각한 문제와 스캔들을 일으키면서도 자신을 겨냥한 모든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안하무인과 몰염치를 적나라하게 노정했지만 결국 마침내 대중이 들고 일어난 것은 군인들이 국회를 막아서고 국민을 상대로 총을 겨눈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된 것을 본 뒤다. 즉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것을 이론의 여지 없이 명백히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거리로 나선 것이다.
다시 말해, 대통령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위헌이며 따라서 파면돼 마땅하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탄핵을 요구하고 나설 수 있을 만큼이나마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사람이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라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는 것이다. 윤석열의 탄핵에 반대하던 나머지는 그 최소한의 시민성마저 내던져버린, 시민에서 신민으로 퇴행한 사람들이다. 이러한 퇴행에는 여러 원인이 있는데, 무엇보다 시민성의 기준에 완전히 미달한 자들이 지도층 및 고위 공직에 있을 때 그들이 적나라하게 노정하는 ‘태도 불량’이 전 인구의 시민성에 거의 불가역적인 오염을 일으킨다는 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태도’란 신디 스캐치가 키케로의 의무론을 원용한 것을 참고한 것이다. 의무론에 따르면 입헌주의, 법치주의보다 중요한 것이 인류애와 동료에 대한 의무, 공감과 연민을 포함한 ‘태도’다. 한 사람이 개개인을 대하는 태도는 공동체에 대한 태도로 직결되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떤 몰인정, 무시, 일말의 폭력성을 노정하는 사람은 그 어떤 전문성이든 능력이든 스펙이든 갖췄든 상관없이 지도자로서, 정치인으로서 완전한 자격 미달이라는 명확하고 엄격한 도덕적 판단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스캐치가 원용한 키케로의 요지다. 시민은 시민대로 정치인들에 대한 판단을 포함한 제반 사안에 대한 판단을 법 조항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에 근거하여 역사적으로 형성해 온 고유의 기준을 확립하고 그에 따라 공직자들을 감시해야 한다. 이것이 헌법학자 스캐치가 제안한,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대안적 입헌주의의 출발점이다.
태도가 완전하게 불량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일어나는 참사가 내란 사태다. 내란은 금방 일단락됐지만, 심각한 상흔을 입혔다. 탄핵안이 가결되고 헌법재판소에서 인용이 되기까지, 여기에는 다 쓸 수 없을 만큼 온갖 이상하고 이례적인 일들이 일어나면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대통령 경호처는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윤석열 구속 집행을 가로막고, 겨우겨우 구치소에 잡아넣으니까 담당 재판장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윤석열을 석방하고, 헌법재판소 변론 종료 후 파면 선고일이 끝없이 늦춰지고 헌법재판관 두 명의 퇴임일은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평론가들, 법조인들은 헌재가 논쟁의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한 세심히 검토를 거친 선고문을 작성하느라 시간을 길게 들이는 거라며 대중을 안심시키고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지만, 평의 절차가 ‘정상 범주’의 기간을 넘기면서부터는 그들조차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경계심을 표출하기 시작했고, 기자들 사이에서는 온갖 근거 없는 지라시들이 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탄핵 선고일만 정해지고 선고만 한다면 당연히 윤석열의 파면 결정이 내려지리라는 확신은 변함이 없었다. 한국의 민주공화정을 지탱하는 시스템에 대한 견고한 신뢰가 있었다. 그 신뢰를 공유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 민주주의를 지켜냈고, 그 신뢰로 무장한 야당 정치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었다. 헌법재판관이라 불리는 8인의 개인들이 최종심급에서 어떤 판결을 내리냐에 따라 한국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뀔 판이었다. 정말로 만에 하나, 헌법재판관 중 말 그대로 미치광이가 있어서, 탄핵 인용에 훼방을 놓고 어떻게든 억지 논리로 기각이나 각하 의견을 내는 자가 3인 이상 있어서 선고가 늦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은 떨쳐낼 수 없었다.
즉 시스템이 아무리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운용 주체가 그것을 무시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비록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이 확인되기는 했지만,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을 엄습했던 저 불안감, 염려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를 많이 목격했다.
특히 내란 사태 및 탄핵 가결 이후 윤석열 정부의 국무위원들이 보인 추태들은, 시스템을 제대로 운용해야 할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마음먹고 그것을 무시하고 부정해버리면 그들을 제지할 방법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회가 정당하게 선출한 헌법재판관을 ‘즉시’ 임명하지 않고 무논리로 임명을 미루었지만 야당이 할 수 있는 일은 탄핵으로 그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것 외에 없었다. 그 뒤 최상목 부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 역시 아무런 설명과 논리 없이 국회 못의 헌법재판관 3인 중 2인만 임명하는 불가해한 일을 벌였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명백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최상목 부총리는 ‘헌재 결정을 존중한다’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나머지 1인을 임명하지 않았다. 대통령 대행으로 있는 동안 그는 ‘걸어 다니는 위헌’, ‘위헌 현행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으로 불리면서도 아무런 처벌 없이 장관 겸 부총리직을 유지했다. 명문화된 처벌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처벌 조항이 없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공직자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지 않아서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공직자들이 헌법과 법률을 지키지 않을 시 바로 파면되고 처벌받는다는 법을 새로 제정하는 것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위와 같이 대통령을 포함한 공직자들이 헌정질서와 법치를 내놓고 무시하는 일을 방지하려면, 그들이 법질서를 우회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상상해서 아주 촘촘한 그물망을 짜듯이 세밀한 디테일까지 고려해서 법안을 작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정치의 사법화’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공직자를 포함한 정치인들의 모든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이 위법이냐 위법이 아니냐에만 맞춰지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에서 한국 정치에 남는 것은 이른바 '법 기술자'들이 법망의 사각지대를 헤집고 다니면서 온갖 특권을 누리는 동시에, 경쟁 진영에게는 극도로 엄격한 법의 적용으로 피선거권을 박탈시키는 공세뿐이다. 결국,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노정한 그 모든 추태의 훨씬 더 심각한 양상만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스캐치의 통찰이 빛난다. 그는 성문화된 규칙과 법질서의 존재가, 사람들이 규칙 없이 던져지면 서로 죽이고 훔치는 야만인으로 퇴행할 거라는 암시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어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문제를 더 많은 규칙, 더 세목으로 들어가는 법률의 제정으로 해결하려 하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은 것은, 시민들이 점점 더 정치 엘리트와 사법 엘리트에게 의존하게 되어 그들이 내리는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무기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스캐치는 젊은 시절에는 의원내각제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대통령제보다 의원내각제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체제의 비교를, 그 자신이 훗날 부정하면서 규칙·제도·체계를 바꿈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기대와 의지 자체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그 위험은 글자로 쓰인 규칙만 잘 준수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다. 이 믿음 아래서 대중은,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가 정말로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질문하는 법을 망각하게 된다. 즉 리더십에 대한 비판의식을 잃어버린다.
대중의 정치혐오와 무관심이 증폭하고 정치의 사법화가 가속되는 가운데, 한국사회에 산적한 여러 문제의 원인이 특정 세력의 ‘나쁜 정치인들의 부패와 비리’로 환원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그에 따라 자연히 한국사회의 발목을 붙잡는 몇몇 ‘나쁜 정치인들’을 잡아들여 감옥으로 보낼 능력이 있는 ‘법 전문가 지도자’에 대한 환상과 열망이 발생했으며, 정치인으로서 비전이나 대표성이 아니라 전과의 유무가 대통령의 자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그 귀결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그는 2022년 20대 대통령 선거 기간 내내 어떤 비전이나 아젠다, 정책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고 역사의식 부재, 시대착오적 세계관만 노정하며 ‘정권 심판’만 반복적으로 외쳐댔다. 그런데도, 당시 정치가 어느 정치인이 무슨 법적인 문제를 저질렀고 그를 법적으로 처벌할 역량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의 문제로 환원되는 바람에 정치 경력이 전무한 검사가 ‘법 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으로 직행하게 되었다.
그래도 어쨌든 훌륭한 시민성을 갖춘 한국의 훌륭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 응원봉을 들었던 덕에 자격 없는 대통령을 또 한 번 축출할 수 있었던 만큼, 국제적으로도 모범이 되는 한국인의 시민성이 한국 정치를 어떻게든 견인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 전망을 가져도 되는 것은 아닐까? 20대 대선 때 정확히 이 낙관적 전망으로, ‘최악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시민들이 봉기하여 끌어내릴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치며 차선이나 차악의 후보를 뽑는 ‘전략 투표’가 아니라 최선의 후보를 뽑는 ‘소신 투표’를 독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른바 ‘대놓고 나쁜’ 세력이 민낯을 드러내면 또 촛불혁명을 일으키면 된다는 것이다. ‘소신 투표’를 독려하는 데 동원되는 이러한 낙관의 논리는 매우 섣부르며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대중의 시민성과 지도층의 시민성은 서로 얽혀 있다. 말인즉 둘이 동기화되어 있어 어느 하나가 수준이 떨어지면 다른 하나도 같이 떨어진다. 더 간단히 말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대통령을 포함한 지도층이 극언을 일삼고 혐오와 차별, 폭력성 등 시민성의 결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 일반 대중 사이에서 그에 상응하는 혼란이 발생한다.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의 일상 언어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나뉜다. 사적이고 편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있고,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나 공공장소에서 할 수 있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사회적 체면과 평판을 고려해서 극언을 참아야 하고, 통념에 어긋나는 견해는 숨기거나 우회적으로만 드러내고 폭력성을 억누른다. 공동체가 ‘정상’으로 승인하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언행으로써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함이다.
위선 없는 정치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동등하고 자격을 갖춘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실제 자신보다 더한 모습으로 가장한다. 장 자크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우월성에 대한 욕구가 발생한다. 따라서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징표를 둘러싼 경쟁이 일어난다. 경쟁의 일환으로, 실제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공동체의 규범을 준수하고, 사회적으로 확립된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고 행동한다. 즉 가식과 위선이다. 가식과 위선으로 형성되는 인정관계는 사회의 근간 그 자체다. 사회관계는 어떤 사람들을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상호 간 어떻게 인정받는가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치 행위는 반드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통치자들은 시민들을 유권자로 인정하고 동등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해야 하며 그로써 유권자들로부터 자신이 통치할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자연히 일정 정도의 위선이 없을 수 없다. 자신의 됨됨이가 남들보다 낫다는 것을 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선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노골적인 폭력’과 ‘무시’다. 위선적인 정권 하에서는 시민들이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배신감을 토로할 수 있지만, 뻔뻔한 정권 하에서는 애초에 약속된 것이 없기에 배신감조차 느낄 수 없다. 오직 절망과 각자도생만이 남을 뿐이다. 따라서 전략 투표를 통해 위선적인 세력을 선택하는 것은, 적어도 시민과 권력 사이에 ‘약속’과 ‘책임’이라는 언어가 통용되는 최소한의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문재인 정권을 겨냥하여 배신과 위선을 집요하게 공격한 끝에, 배신하지 않고 위선을 떨지 않는 자들이 집권했다. 하지만 일체의 가식과 위선 없는 정치인을 지지할 바에 착한 척하는 정치인에게 배신당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 일체의 정치와 시민성, 공동체의 건강한 존속을 위해 옳은 일이라고 단언하는 바다. 위선 없는 정치는 인정 없는 정치며, 시민을 유권자로서, 동등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시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일절의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배신과 기만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나 통치가 아니라 군림과 다름없다. 대놓고 나쁜 게 위선보다 낫다는 발상이 퍼진 탓에 정부가 국민을 인정은커녕 노골적으로 무시했음에도 국정 지지율은 더 떨어지지 않고 국민은 국민대로 국가에게 인정받지 못한 채 각자의 인정투쟁에 엄청난 혼란을 겪었다. 바로 이 혼란으로 한국인의 시민성에 심각한 손상이 일어났다.
공직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극언을 하는 모습을 보면 어디까지가 공적 자리에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말인지 판단 기준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전까지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라도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왜곡된 젠더의식, 인종적 편견과 혐오, 극단적 사상을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할 용기를 얻는 사람이 생기고, 극언을 일삼는 정치인을 매개로 비슷한 사람들이 연결되어 결집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자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상투어가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라는 말이다. 시민성의 심각한 결여를 노출한 뒤 주변인에게서 멸시와 비판을 받으면 ‘내가 누구를 때리기라도 했냐’, ‘틀린 얘기도 아닌데 왜 욕하냐’라며 항변한다.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공동체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의례와 관습에 따른 허용 범주를 벗어난 언행은 공동체의 결속과 화합을 다지는 약속을 깨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런 자들은 공동체의 가치관과 관습은 일절 무시하고 오직 최종심급에서 법에 의해서만 심판을 받는 것을 공정하다고 여긴다. 인정은 어디에도 없고 일상의 모든 판단을 명문화된 법과 규칙에 맡겨버리는 일상의 사법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시사하듯 정치의 사법화에서 일상의 사법화로 이어지는 것은 낙수효과에 빗댈 수 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의 공격적 언행이(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회 전반에 정화하기 힘든 오염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중의 시민성에 대한 섣부른 낙관이 위험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정치 지도층이 어떤 위선도 없이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면 대중이 바로 들고 일어날 거라는 희망은 전혀 근거가 없다. 오히려 대중의 시민성이 정치 지도층의 시민성과 함께 퇴행한다.
‘낙수공격’(Trickle-down Aggression)이란 말이 있다. 여성주의 철학자 케이트 맨이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캠페인을 비판하며 쓴 용어다. 높은 지위, 상위 계층에 있는 사람의 공격적 언행이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로 ‘낙수효과’에 빗댄 것이다. 정말 편한 사이의 친구들과 있는 사적 자리에서조차 차마 하기 힘든 여성혐오·인종차별적 발언을 대선 후보가 하는 것을 보고 심지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어디까지가 공적 자리에서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말인지 판단 기준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여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왜곡된 젠더 의식과 인종 편견 및 혐오를 눈치 보지 않고 표현할 용기를 얻은 사람이 생기고, 더 나아가 트럼프 같은 인물을 매개로 비슷한 견해를 지닌 사람들과의 연결 가능성이 커져 이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담론에 일으키는 소음의 크기도 매우 커지기 때문이다.
이는 막말하는 정치인이 꼭 최고 권력의 위치에 올라야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방송심의가 없는 유튜브 방송 등에서 이른바 ‘프로보커터’로 활약하는 극우 논객과 정치인이 쏟아내는 막말, 폭력적인 언사, 위험한 신념의 강렬한 표현은 그 자체로도 해롭지만, 담론의 창(overton window)을 더 오른쪽의 극단으로 옮기는 동시에 우측 편향으로 협소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해하다.
이들이 개진하는 과격하고 폭력적인 행태와 메시지는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는’ 범주에 속했겠지만, 유튜브와 카카오톡 등 소셜미디어로 대중에게 널리 퍼지고 가시화하면서 이들의 이념은 천천히 ‘극단적인’ 것의 표상을 점하게 된다. 이제 이런 극우 유튜버와 대동소이한 이념과 가치관의 소유자지만 과격한 행태와 막말만 안 하는 사람은 갑자기 ‘합리적인 보수’ ‘말이 통하는 보수’로 평가될 수 있다.
트럼프 시대 이래로 미국에서 낙수공격 현상은 정말 많은 사람의 가치관을 바꿔버렸다. 트럼프가 집권하는 동안 혐오범죄가 크게 늘었고 반유대주의도 급증했다. 더욱이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시위대에 총기를 겨눴던 부부에게, 심지어 총을 발포해 두 사람을 사살한 청소년 카일 리튼하우스에게 당시 트럼프 정부와 공화당이 보인 온정적인 태도와 관용은 사실상 ‘그래도 된다’는 메시지가 되어 극우 자경단에 엄청난 힘이 됐다. 이 사건들과 맞물려 미국인의 분열은 가속돼, 트럼프가 패배한 2020년 대선 결과를 인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국회의사당을 습격하고 점령하는 데 이른다.
한국의 형편이 미국보다 결코 낫지 않았다. 2024년 1월, 당시 제1야당 대표가 겪었던 살인미수 테러 사건에 관련하여, 목에 칼이 찔리고 숨질 뻔한 피해자에서 석연찮은 특권 및 특혜의 수혜자, 지방을 무시하는 사람으로 프레임 전환을 시도하다가 이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하는 행태를 보인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일부 시민에게 매우 유해한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피습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송출한 유튜버 이봉규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초청자 명단에 있었고 초대 시민사회수석이 그의 방송에 출연한 바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사실상 대통령 차원에서 극우 유튜버의 망동을 승인한 것과 다름없고, 그들의 음모론과 여론 분열 책동에 당연히 정부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진보 성향의 몇몇 논자는 꾸준히, ‘차악이 최악’이라는 이유로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정말로 차악이 아닌 최악의 정치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집권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랬을까? 윤석열과 국민의힘을 위시한 보수세력이 민주당과 다르게 적어도 위선을 떨지 않고 ‘대놓고’ 나쁘니까 국민이 바로 봉기해 두 번째 촛불혁명을 일으킬 거라는 희망을 표시했다. ‘배신’과 ‘기만’에 대한 악감정에 훨씬 무거운 가중치를 두다 못해 처음부터 당당히 망언을 쏟아내고 한국 사회의 공공성을 짓밟는 정치세력의 집권을 묵인한 이들이 가졌던 희망은 전혀 근거가 없었다.
정치에서 ‘인품론’이 다시 중요하게 제기되어야 할 때다. ‘태도가 본질이다.’
대선 때 권영국 후보가 말한 것처럼 진보진영의 일부 제도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상투적으로 ‘시스템과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어느 진영이 집권하고 누가 대통령이 되든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라며, 사회혁명의 열망을 빙자한 냉소를 내비쳐왔다. 그러나 결국 정치와 통치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 좋은 나라를 만들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심각한 태도 불량을 위선으로 은폐할 의지도 없이 대놓고 드러내는 사람이 정치 지도자가 되었을 때 정치를 회복이 어려운 수준으로 망가뜨릴 것임은 자명하며 우리는 이미 그것을 생생히 목격하고 체험했다. 정치, 경제 등 사회의 제반 부문에 심한 손상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시민성에도 심각한 퇴행을 초래했다. 망가진 정치의 지형 위에서 시민성을 망각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존재를 향한 분노와 울분의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분출로 의사소통을 대신하고 있으며, 그것을 당장 눈앞에서 치워달라는 요구의 외침으로 정치를 대신하고 있다.
일부는 심지어 모든 문제를 제도와 시스템, 사회와 구조의 문제로 환원하고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며,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등에 대해 어느 세력이 집권했든 간에 필연적인 참사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설가 박민규가 말했듯, 참사의 본질은 선박이 침몰한 ‘사고’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선박이 천천히 침몰하는 동안 당국이 넋 놓고 있었던 것까지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결국 제도, 시스템을 운용하고 당국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이고,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다.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로, 공공성 의식을 완전히 결여한 행정으로 인한 경찰력의 공백과 안전관리에의 무의지마저 구조 탓하는 것은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스템 운용 주체는 ‘사람’이다. 제도가 완비되어 있어도 사람이 의도적으로 시스템을 해킹하려 하면 그것을 막을 방법이 많지 않다. 반대로, 제도가 미비하더라도 공공성에 대한 감수성과 시민성의 태도를 갖춘 사람이 집권하면,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여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의 방역 성과와 이태원 참사 당시의 무정부 상태의 차이는 오직 누가 통치했는가의 차이에서 비롯했다.
<우리는 지금 시민성의 최후의 보루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다. 내란에 준하는 헌정 유린이 자행되고, 극우적 광기가 거리를 덮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많지 않다. 가장 이상적인 후보, 내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정당은 투표용지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투표는 연애 대상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투표는 나와 내 이웃이 살아갈 세상의 ‘바닥’이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전략 투표는 나의 고결한 신념을 굽히는 굴욕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야만의 홍수가 밀려올 때, 비록 허술하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위선’이라는 이름의 방파제라도 쌓아 우리 사회가 완전히 잠기는 것을 막아내려는 숭고한 시민적 결단이다.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최악을 징벌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위선을 선택하는 것은 뻔뻔함을 응징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이 ‘불만족스러운 선택’을 통해, 적어도 혐오가 상식이 되고 무지가 자랑이 되는 세상이 오는 것을 막아낼 시간을 벌 수 있다. 그 벌어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시 시민성을 훈련하고, 공론장을 복원하며, 언젠가는 차악이 아닌 차선을, 차선이 아닌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을 일궈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부디, ‘선명성’이라는 환각에 취해 최악의 괴물을 방조하지 말자. 소신을 지킨답시고 뒷짐을 지고 있는 사이, 당신의 이웃이, 그리고 시민이라는 이름의 가치가 죽어가고 있다. 지금은 냉소할 때가 아니라,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둑을 쌓아야 할 때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진짜 시민의 의무다.>
<>안에 있는 문단은 인공지능의 작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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