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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빠는 실체가 없다

 

오쟁이를 진(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남편에게는 반드시 바람난 아내가 필요하다.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이라는 글을 쓴 지젝에 따르면 아내가 정말로 바람이 났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남편의 망상은 병리적이다. 자신의 찌질하고 무능력한 비참한 삶에 대하여,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외간남자와 놀아나는 헤픈 여자에게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초라하나마 삶을 지탱할 수 있다.

논평마다 대깨문, 문빠 운운하는 리버럴/좌파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빠는 새로운 홍위병인가? 문빠는 실체가 없다.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들이 공격하는 허수아비인 '포스트모던 네오맑시스트'나 트럼프가 국가전복세력이라 주장하는 안티파Antifa와 같은 존재다. 문빠가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물론 아니다. 다만 문빠를 문빠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일괴암적인 세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빠가 있으면 낙빠, 명빠, 경빠, 추빠, 박빠도 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를 의인화하여 특정 정치인을 아이돌 소비하듯 정치를 대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슨 일만 있으면 '문빠다!' 외치며 '문빠들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오쟁이 진 사람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런 비평가연하는 사람들이 일신상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의 곤궁함의 막후에 어떤 세력의 농간이 있다고 믿는 것은 병리적이다.

이른바 '정치 팬덤' 담론은 다소 김빠진다. 그리고 대체로 악의적이다. 많은 사람이 정치 팬덤의 기원을 노사모에서 찾는다. 16대 대선 민주당 경선 때 노무현은 아웃사이더였고 정치적 기반은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 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경선 승리는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노사모라는 노빠 세력은 확실히 하나의 실체가 있는 정치적 집단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인터넷과 정치의 접목이 아직 낯설었을 때 3-40대 젊은 유권자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유연하고 느슨한 조직력을 유지하며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역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은 좌우와 세대를 막론하고 인터넷 정치의 게릴라전은 상수다. 정치 팬덤을 보는 시선이 20년 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정치 팬덤은 여야와 인물을 불문하지만 유난히 평단에서는 친문 성향의 동의어와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본다. 18대선 직후부터 몇 년 동안의 종합편성채널의 각종 시사프로그램을 반추하면 생각외로 여권 성향과 야권 성향의 패널들이 어느 정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지금은 안 나오지만 당시 수도꼭지마냥 '틀면 나오는' 정치평론가를 참칭하던 사람들로 황태순, 민영삼, 황장수 등이 있었다. 각각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언론특보, 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 및 문재인 대선 후보 선대위 전략단장, 16대 새천년민주당 낙선의원이다. 또한 TV조선에서 이름을 내걸고 프로그램을 진행한 장성민 역시 16대 새천년민주당 의원직을 지냈다. 모두 공통적으로 반노 인사들로서 친노 진영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혹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데올로그로 나서 친노/친문 패권을 외쳤고 이것이 정치권 바깥의 지지자들에게도 뻗쳐 친문 정치 팬덤 담론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러나 18대 대선 직후부터 19대 대선 직전까지 친문은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다. 문재인이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일 때도 당 안팎에서 두들겨 맞았다. '친문 패권주의'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온 시기는 문재인이 당대표로서 계파중심 보스정당을 청산하고 시스템정당을 관철시키려 했을 때다. 이때 얘기된 '친문 패권'이란 시스템 앞에서 풍전등화 신세가 된 당시 반문 중진의원들과 끈떨어진 정치인 출신 종편 패널들의 되도 않는 원한감정의 기표일 뿐이다. 당에는 없는 그 실체를 당 밖에서 찾다가 친문 팬덤으로 '친문 패권'의 빈 속을 채운 것이 지금의 문빠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희준 동아대 교수가 프레시안에 거의 똑같은 얘기를 했더라.

"친문 패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들이 주장하는 패권주의란 문재인이 나눠먹기를 거부하자 탈당해 떨어져 나간 호남 의원들, 그리고 자신의 지분을 보장해주지 않자 화가 난 당내 다선 의원들이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해 집어든 프레임일 뿐이다. 그들이 문제 삼는 패권주의적 행태라는 것도 고작 지지자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벌이는 집단행동뿐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49064?no=149064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정치 세력은 처음부터 주어진 정체성을 근간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치 세력은 가변하고 다질적인 정체성의 여러 집단이 우연한 계기를 맞아 특정한 기표를 구심점으로 결집한 일시적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문빠'는 빈 기표이며 그 내용물은 계속해서 바뀐다. 문빠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그 특정한 기표는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변혁이다.

2016년 촛불을 결집시킨 것은 '박근혜 퇴진'이다. 반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사람, 이석기 석방을 외치는 사람, 비박 성향 여당 지지자들까지 이질적인 요구들을 갖고 거리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결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두 가지의 공통된 요구가 촛불집회의 간판이 되어 이질적인 요구들 간의 상호충돌이 최소화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 촛불은 지도자만 갈아치웠을 뿐 유의미한 사회변혁은 이루지 못했다고 논평하는 사람이 많다. 촛불의 소명을 문재인 정부가 배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촛불의 목적은 사회변혁이 아니었다. 촛불의 명분이 사회변혁이었으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회변혁은 추상적이다. 진보 세력은 정치적 상상력이 부족한 대중을 상대로, 그들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박근혜 퇴진을 넘어 진보적 의제로 전환시킬 헤게모니 전략이 부재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약속이다. 박근혜 퇴진이 그것이다. 

촛불 이후 현재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기표는, 입을 열 때마다 문빠 운운하는 논객이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문재인 개인'이 아니라 적폐청산이다. 21대 총선 결과를 보며 혹자는 부르주아 정당의 승리라고 비아냥댔지만 이것은 오히려 민주당 압승의 역사적 의의와 당위성을 드러내는 말일 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군주제 멘탈리티에 머물러 있는 정당을 상대로 부르주아 공화파가 승리했다는 얘기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정부 여당 지지자들은 사회변혁이 아니라 정치변혁을 위해 결집한다. 

논객들은 문빠들에게, 문 정부 지지하고 보수정당 욕하는 것만으로 민주 진보 시민의 소임을 다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문빠 욕하는 것으로 지식인의 소임을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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