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술 문화연구 저술가 클레이 셔키의 책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원제 Here comes everybody)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여러 개 소개된다. 이바나라는 사람이 택시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는데 집 가서 확인해보니 사샤라는 사람이 그것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바나는 사샤에게 연락해 집으로 보내주기를 공손히 부탁했는데 10대 여성이었던 사샤는 이바나에게 인종주의적 조롱과 협박이 담긴 메일을 보냈다. 이바나의 오빠 에반은 '도난당한 휴대폰'이라는 인터넷 페이지를 만들어 사연을 알렸다. 사연은 널리 공유되었고 며칠도 안 되어 사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이스페이스를 발견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계속해서 일의 진행 상황을 묻는 사람, 격려해주고 도와주겠다는 사람들로부터 메일이 수없이 날아왔다. 사샤의 집주소를 알아내 직접 찾아가서 집을 촬영해 페이지에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에반은 그가 만든 페이지에 자유게시판을 만들었는데 곧바로 접속자들이 폭주해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도난이 아니라 분실로 취급하며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민원이 엄청나게 빗발쳤고 경찰은 결국 입장을 바꿔 에반이 페이지를 만든 지 일주일 만에 사샤를 체포하고 휴대폰을 이바나에게 돌려줬다.
"사샤 엄마는 딸이 체포되던 날 한 기자에게 "전화기 한 대 때문에 이렇게 골치를 썩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기억에 남을 말을 남겼다. 하지만 골치 썩게 한 것은 전화기가 아니라, 전화기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 즉 에반의 사이트에서 하나로 뭉친 사람들, 마이스페이스 신상정보와 가족의 주소를 찾아내고 경찰서에 압력을 넣게 도와준 사람들이었다."(클레이 셔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갤리온, 15쪽)
이 에피소드가 갖는 의의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경찰 행정까지 좌우하는 다수 인민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더 실용적인 측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따로 있다. 바로 '그럴듯한 약속'이다. 단순히 '휴대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내세웠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없었다. '도둑을 단죄합시다'라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추상적이다. 에반은 많은 사람의 흥미와 정의감을 자극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메시지를 제시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그럴듯한 약속'이다. 2016년 촛불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럴싸한 약속이 촛불의 간판으로 내세워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퇴진'이 그것이다. 그게 아니라 '사회구조 변혁', '제왕적 대통령제 철폐' 따위였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모일 수가 없다. 월스트리트점령운동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이유는 이들이 제시한 "1% 대 99%"가 너무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세력화와 결집은 미리 주어져 있는 정체성(이를테면 노동자, 이주민, 소수민족, 성소수자 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 세력이나 정체성 모두 공통된 요구를 가진 사람들의 일시적인 집합체다. 일시적인 집합과 그것의 지속성 있는 응고는 특정 기표를 구심점으로 이루어진다. 이질적인 사람들이 갖는 여러 가지 요구들 중에 당장 급한 것 예컨대 굶어죽지 않을 권리가 있으면 좀더 장기적인 목표 이를테면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있을 테다. 이러한 양극의 기표들 가운데서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당히 거창하면서 결과가 그림이 그려지는 메시지가 관철되어야 한다. 이 기표에 특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사람들의 상호충돌이 제어될 수 없어 결집이 지구력을 갖기 어렵다. 이것이 헤게모니적 기표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메시지들이 의인화된 한명의 개인으로 제시될 수도 있고 슬로건이 될 수도 있고 정책이 될 수도 있고 유행어 혹은 밈이 될 수도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기표들 간에 위계를 발생시킨다. 즉 사람들이 들고 오는 요구들 안에서 우선순위가 매겨진다. 당장 급해보이지 않는 것들, 추상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들, 이득을 받는 사람이 소수에 머무를 것 같은 요구들, 그 수혜자가 가까운 이웃에 누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요구들은 자연히 후순위로 나중으로 밀려난다.
리버럴이 보는 문재인에게는 늘 연관키워드 '나중에'가 따라붙는다. 문재인이 강당에서 경선후보 연설할 때 인권단체 활동가가 갑자기 일어서서 항의성 질의를 내뱉었는데 문재인은 '나중에 발언할 기회를 드리겠다'라고 답했다. 식순을 지키고 발언권을 얻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응답이었다. 이에 지지자들은 '나중에'를 연신 외쳤다. 이런 일을 가지고 문재인이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나중에 처리할 문제' 취급했다고 와전시키는 것은 악의적이다. '나중에'를 구호처럼 외친 지지자들의 속내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어보인다. 다만 그게 이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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