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8일 화요일

2023.1.14. 대놓고 나쁘니까, 배신도 기만도 없는 집권 세력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대놓고 나쁘니까, 배신도 기만도 없는 집권 세력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보수 진영의 ‘팬더링 프레임’

  • 수정 2023-01-14 16:00
  • 등록 2023-01-14 16:00
지난 6일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왼쪽)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6일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왼쪽)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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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더링’(Pandering)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상 의미는 뚜쟁이질, 즉 어떤 나쁜 짓을 중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특정 정치인, 정치 세력을 비난할 때 이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영합하다’라는 뜻으로 말이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짐작해서 진정성은 전혀 없이 다만 얄팍한 호응을 위해 텅 빈 표현만 하는 것에 저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예컨대 한 정치인이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관련한 공개적인 발언을 했을 때, 비판자들은 그의 행동을 ‘Pandering to Black’(흑인을 위하는 척한다)이라고 하고, 성소수자(LGBT)의 권리를 말하면 비판자들은 ‘Pandering to LGBT’(LGBT를 위하는 척한다)라고 하며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한다.

 위선 없는 정치는 가능할까

주목해야 할 것은 인종차별, 성소수자 권리, 여성 문제 등 이른바 진보 혹은 ‘리버럴’ 진영에 좀 더 닿아 있는 의제들에 ‘팬더링’이라는 비난이 주로 따른다는 것이다. 진심이 전혀 없이 그저 어떤 지적인 유행에 편승하며 이른바 ‘깨어 있음’을 과시하는 ‘착한 척’, 즉 위선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보적인 메시지 및 가치, 의제에 위선이라는 말이 늘 따라다니는 것은 동서를 불문한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적 의제에서는 진보와는 매우 거리가 먼 정치인이 진보의 상징자본을 취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 및 정치적 올바름 의제의 첨병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례가 미국에 굉장히 많았고, 특히 2020년 대선 전후로 그랬다. 평소 노동자 권리에는 전혀 무관심해 보이는 대기업들이 매년 6월이 되면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라며 로고에 무지개색을 박아 넣는 행태는 이른바 ‘깨어 있는 자본주의’(Woke capitalism)라고 조롱받는다.

한국의 경우,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 의제로써 인기에 영합하려고 ‘팬더링’ 하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저 의제들 자체가 대중적으로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 담론에서 진보적 의제들은 부문을 막론하고 항상 위선과 결부되는 것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된 논리적 경로에 대해서는 2021년 8월14일치 글(‘위선 프레임은 흥미롭다, 그러나 위험하다’)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요컨대 정치권과 언론이 야합하여 견고하게 주조해낸 위선 프레임이 대중 담론에서 가식 및 ‘거짓된 선’과 범법 행위 및 ‘진짜 잘못’의 경중 설정을 혼탁하게 만들어버렸다.

여기에는 이중의 효과가 있다. 진보진영의 한 유명 인사가 과거에 던졌던 사회적 메시지와 그의 실제 행태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정치권과 언론들은 이 간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대중으로 하여금 모든 진보적 메시지에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내게 만들고, 위선이 아닌 ‘진짜 잘못’은 암암리에 세간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드는 것이다. 급기야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는 것이 차라리 위선보다 낫다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 확산하게 된다.

미국에서 진보 정치인들의 발언과 행동에 ‘팬더링’이라는 딱지를 붙이던 좌파 성향 비평가들, 논객들 가운데 일부는 천천히 자연스럽게 트럼프 지지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일부 논자들은 어떤 정치 세력이 국민을 ‘속이는’ 행위가 악 중에서 최악이라고 말하며, 처음부터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는 정치 세력이 있으면 국민은 바로 분노하며 들고일어나서 그 세력을 끌어내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것이 “민주당만 빼고”라는 명제로 표상되는, ‘차악이 최악’이라는 논리였다.

배신과 위선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문제 삼은 결과, 배신하지 않고 위선을 떨지 않는 세력이 집권했다. 하지만 나라면 일체의 가식과 위선 없는 정치인을 지지할 바에 착한 척하는 정치인에게 배신당하는 것을 택하겠다. 단언하자면 위선 없는 정치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동등하고 자격을 갖춘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실제 자신보다 더한 모습으로 가장한다. 장 자크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우월성에 대한 욕구가 발생한다. 따라서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징표를 둘러싼 경쟁이 일어난다. 경쟁의 일환으로, 실제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공동체의 규범을 준수하고, 사회적으로 확립된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고 행동한다. 즉 가식과 위선이다. 가식과 위선으로 형성되는 인정관계는 사회의 근간 그 자체다. 사회관계는 어떤 사람들을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상호 간 어떻게 인정받는가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군림하려는 집권 세력

따라서 통치 행위는 반드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통치자들은 시민들을 유권자로 인정하고 동등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해야 하며 그로써 유권자들로부터 자신이 통치할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자연히 일정 정도의 위선이 없을 수 없다. 자신의 됨됨이가 남들보다 낫다는 것을 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거짓 공약과 기만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위선과 그에 따른 배신만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프레임에 전 사회가 포획되고 그것만을 중심으로 정치 담론이 형성됐을 때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가식과 위선은 일절 없는 세력이 집권했다. 시민들을 유권자로, 동등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시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조금의 노력도 안 하면 적어도 배신과 기만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통치가 아니라 군림이다. 대놓고 나쁜 게 위선보다 낫다는 위험한 발상이 확산한 탓에 정부가 국민을 인정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음에도 국정 지지율은 더 떨어지지 않는다. 국민은 국민대로 정부에 인정받지 못한 채 각자의 인정투쟁에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즉 한국 사회의 인정체계가 완전히 붕괴하고 있고 이것은 곧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놓고 나쁘니까 국민이 바로 봉기할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윤석열 세력의 집권을 묵인한 논자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한다.

2022.12.24. 시위=나쁜 것? 시민은 정부 좇는 ‘불나방’이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시위=나쁜 것? 시민은 정부 좇는 ‘불나방’이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그레고리’라는 이름의 나방에 관하여

실존적 고민 나누던 나방 그레고리
“어떻게 왔냐” 묻자 “불이 켜져서”
‘시위=불법’이란 담론 만드는 정부
맹목적 추종 않기 위해 각성해야

  • 수정 2022-12-24 10:16
  • 등록 2022-12-24 10:16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에서 보행권 보장을 요구하며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에서 보행권 보장을 요구하며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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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들을 웃기는 코미디언’ 놈 맥도널드의 농담을 또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나방이 족부의학과 진료실로 들어간다. 의사는 나방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묻는다. 나방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매일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의 몸뚱이를 끌고 일하러 갑니다만 이제는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에 자다 깨서 옆을 보면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낯선 늙은 여자가 누워 있어요. 딸 알렉산드리아는 독감으로 죽었고, 나의 아들,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이런 말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만 아들놈의 눈을 보면 내가 거울을 볼 때 항상 보이는 그 비겁한 겁쟁이의 얼굴만 보여서 말이죠. 만약 그 겁쟁이가 조금만 용기가 있었더라면, 침대 머리맡에 장전된 채로 보관해두는 권총에 손을 뻗을 용기만 있었더라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저는 나방이지만 가끔은 거미가 된 기분입니다. 지옥불 위에 펼쳐놓은 거미줄을 간신히 붙들며 위태롭게 살아가는 거미 말이죠. 너무 힘듭니다.”

그의 푸념을 들은 의사는 이렇게 묻는다. “정말 힘드시겠습니다만, 정신과를 찾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 왜 여기로 오신 거죠?” 나방은 이렇게 대답한다. “불이 켜져 있어서요.”

‘허무개그’로부터 얻는 통찰

굉장히 슬프고 암울하면서도 마지막 한마디 문장이 앞서의 모든 감상을 무너뜨리며 허탈하게 만드는 말 그대로 ‘허무개그’다. 바보 같은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개그지만 나는 이로부터 하나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의 시민들 모두가 많은 부분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의 나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는 세상 모든 고민을 짊어진 것처럼 고뇌하며 실존적 위기에 맞서 하루하루 투쟁하지만 결국 실질적인 행동은 관성적으로, 의식이나 이성과 무관하게 자기도 모르게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각자 복잡한 사연과 고뇌를 짊어지고 최대한 합리적인 결정과 판단을 내리고자 하며 스스로 나의 길을 개척하며 행동하고자 애쓰지만 관성적으로,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실존주의자 나방과 같다면, 나방을 움직이는 불빛은 무엇일까? 담론이다. 그때그때의 사회 지배적인 담론은 우리가 시민으로서, 유권자로서 내리는 결정과 판단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 자신은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담론이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서로 관계없는 별개의 것들을 관계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렇게 보이게 된 결과물이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 및 판단 체계에 결정력을 행사하냐면, 예컨대 한 사람의 범죄 행위와 그 사람의 피부색은 서로 무관한 요소지만 둘을 유관한 것으로 엮는 담론이 인종차별적 편견과 프로파일링을 유도하는 식이다.

담론의 키 플레이어는 단연 언론이다. 즉 담론이 불빛이라면 언론은 불빛을 밝히는 전구, 그리고 그 전구를 어디에 설치할지를 결정하는 존재다. 지금 언론이 과거에 비해 지배력이 많이 쇠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대형 언론사들의 담론 권력은 막강하다. 오히려 몇몇 대형 언론은 프로보커터 정치유튜브를 모방하면서 여론을 왜곡하며 담론을 오염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른바 가짜뉴스를 생산한다고까지는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로 무관한 것들을 억지로 유관한 것으로 엮는 프레임으로, 혹은 유관한 것들을 무관한 것으로 해체하는 보도로써 특정 진영이나 집단, 사안 등에 대한 거부감, 적대감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사례는 많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대한 보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초반부터 화제가 된 전장연 시위는 윤석열 집권 초기부터 위태롭게 된 지지자 결집력을 회복시킬 ‘선량한 시민의 적’으로서 언론과 정치권에 의해 제시되었다. ‘시민 불편 vs 전장연 시위’라는 대결 혹은 전쟁 구도는 사실상 장애인을 시민이 아닌 존재로 간주하게 만든다. 장애인도 시민이며, 장애인이 대중교통 이용에 불편을 겪는 것이 곧 시민 불편이다. 전장연 시위는 시민 불편을 줄여달라는 요구지만 언론 보도는 시민과 전장연의 관계를 영합게임으로 만들었다.

관성 따라 움직이는 ‘나방’ 되지 않도록

그뿐만 아니라 최근에 있었던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는 언론들이 ‘기습 시위’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장연의 시위에 대해 서울시가 무정차 통과 조치로 대응한다고 밝히자 전장연 쪽에서 시위 장소와 시간을 알리지 않고 시위에 나섰는데 이것을 ‘기습’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전장연과 시민 사이의 전쟁이라는 프레임을 더 강화할 뿐만 아니라 시위자들을 기동력 있는 게릴라 같은 집단으로 상상하게 하는 그릇된 인상을 준다. 언론들은 전장연이 시민을 볼모로 잡는다고 비판하지만 오히려 정부가 시민을 볼모로 잡고 전장연과 기싸움 한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론 보도를 접하는 사람들은 장애인의 권리 보장이 곧 자신에게 장기적인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그저 ‘시위는 나쁜 것’이라는 담론의 타성에 몸을 맡긴다.

김용민 화백의 <경향신문> 2014년 5월16일치 만평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세월호 참사 소식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이게 나라냐’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아픔을 딛고 일어서며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곧 선거철이 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투표소에 들어가면서 ‘그래도 아파트값 올려줄 후보를 뽑아야 부자가 된다’며 타성에 젖은 결정을 내린다. 각자 고뇌를 짊어지고 치열하게 투쟁하며 살아가는 우리 실존주의자 나방들은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관성적으로 불빛을 향해 움직이며 살고 있다.

2022.12.2. “정치적 쟁점화 말라”는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의 궤변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정치적 쟁점화 말라”는 이태원 참사 책임자들의 궤변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이태원 참사와 정치적 프레임

  • 수정 2022-12-02 20:00
  • 등록 2022-12-02 20:00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1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이태원 참사 특별수사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진짜 책임자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1일 서울 마포구 서울경찰청 이태원 참사 특별수사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진짜 책임자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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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에 많이 놀러 가는 계곡이나 해수욕장 같은 데를 상상해보자 . 매해 여름철마다 물놀이 장소에서 수난사고는 수천건씩 일어나고 사망사고는 십수건씩 일어난다 . 이 수많은 불운한 사고들이 건마다 정쟁화되지 않은 이유는 말 그대로 불운한 사고인 탓이기도 하고 , 수영 미숙 , 안전 부주의 , 음주 수영 등 원인 소재가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런데 만약 같은 휴양지에서 열명 이상이 한꺼번에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난다면 , 혹은 유난히 한곳에서 해마다 비슷한 유형의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구명조끼 혹은 튜브 관리가 부실했거나 , 유속이 빠르고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구간에 대한 관리 감독이 부실했다는 정황이 있었다고 할 때 , 안전 관련 규제 및 제도가 미흡하지는 않았는지 , 그렇다면 언제 어떤 이에 의해 규제가 완화되었는지 , 혹은 제도는 완비되었으나 업체에서 그것을 전혀 준수하지 않았던 것이라면 누가 어떤 이유로 그것을 묵인했는지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

“참사, 쟁점화 말라”는 정치인

이러한 조사와 규명 , 그 이전에 문제 제기 ,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 등은 일반 시민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 피해자 , 희생자 유족들로서는 경황이 없어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조차 어려운 일일 수 있고 , 누구를 향해 무엇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지 알기도 어려운 일이다 . 이때 나서는 집단이 시민단체 , 활동가 , 정당이다 . 피해자 , 희생자 유족 대신 쟁점을 제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당국에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로 ‘정치 쟁점화 ’다 . 정치 쟁점화는 당연히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이러한 정치 쟁점화의 소중한 가치는 지금 ‘정쟁화 ’라는 말로 축소되고 부정되고 있다 . 정쟁화란 , 다름 아닌 정치 쟁점화의 줄임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 정쟁화를 하지 말자는 말은 정치를 하지 말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정쟁화라는 말은 다만 ‘정치 전쟁 ’ 혹은 ‘정당 전쟁 ’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모든 쟁점화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 묻기라도 하면 어떤 순수함이 떨어지는 오염물질과 같은 것으로 이용되고 있다 . 집권한 보수세력이 정치 혐오를 조장하기 위해 정치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쓰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 과거 이명박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정치적 논리로 접근하지 말라 ’는 것이었음을 상기하면 더욱이 그렇다 .

정쟁화하지 말라는 말을 다름 아닌 정치인들이 한다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 이 말이 진보 진영 일부에서 나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 10·29 이태원 참사의 경우 , 희생자 명단을 유족들의 사전 동의 없이 공개한 행동에 이견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의 행동을 정쟁화 프레임에 묶어서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명단 공개와 정쟁화는 별개의 문제다 . 명단 공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는지와는 무관하게 , 명단 공개를 ‘정쟁화 ’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체의 정치적 쟁점화의 시도를 다만 희생자들과 유족들을 당파적으로 ‘이용 ’하는 행태로 축소해버리는 프레임을 강화할 위험이 크다 .

명단 공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 일부 진보 성향 논자들은 이태원 참사가 시스템 및 제도의 부재 , 즉 사회적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참사의 책임을 집권 여당 정치세력에게 물으려는 야당 진영의 공세에 의구심을 표하고 이것을 이른바 ‘정쟁화 ’로 축소하고 있다 . ‘사회적 문제 ’는 어느 세력이 집권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며 , 제도적 ·사회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을 정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 혹자는 심지어 지금의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 집권했어도 비슷한 참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

이처럼 모든 것을 제도 , 시스템의 결함 탓으로 돌리고 최종적으로 사회 ·구조의 문제로 환원하는 ‘사회주의 ’는 일체의 정치적 행위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참사에 대한 모든 정치적 접근을 무가치한 것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 이들은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정쟁화 ’를 구별하려 하지만 둘을 확실히 구별하는 방법은 없다 . 구별을 해내기 위해서는 제도권 의회 정치 , 대의제 정치를 넘어선 완전히 새로운 의미의 정치를 상상해내야 한다 . 그러면서 결국 논의가 양당제 비판 그리고 다당제 정립을 주장하는 데로 귀결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 어쨌건 이러한 고난도의 작업은 당연히 가치가 있는 일이겠으나 시급히 참사의 책임 소재부터 가리는 것이 중요한 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공허한 고담준론으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 방해나 안 되면 다행이다 .

사회구조 탓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생각해보자 .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세월호의 침몰 원인으로 많은 사람이 무리한 증설 및 개조 , 과적과 과속 항행 등을 꼽았다 . 또한 2008년에 있었던 규제 완화로 인해 여객선의 선령 제한이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되었고 노후한 선박 시설 및 구명장비들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 이러한 점에서 세월호 침몰 원인은 사회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소설가 박민규가 말했듯, 참사의 본질은 선박이 침몰한 ‘사고 ’가 아니라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 ’이다 . 선박이 천천히 침몰하는 동안 당국이 넋 놓고 있었던 것까지 사회구조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 결국 제도, 시스템을 운용하고 당국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들이고 , 사람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다 .

2020년 한국 사회가 코로나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면서 한동안 실종되었던 공공성 개념이 조금이나마 회복되는 듯 보였다 . 재난 상황에서 공공성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남을 보호하는 것이 곧 나를 보호하는 것’이라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약속을 시민들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 국가를 운용하는 지도자들의 몫이다 . 10월 29일에 이것이 다시 사라졌다 . 그리고 그 책임 소재는 아주 명확하다 . 이것을 정쟁화해야 한다 .

2022.11.12.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공격…청년의 과격화, ‘이대남’만일까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공격…청년의 과격화, ‘이대남’만일까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여성은 진보적, 남성은 보수적?

“여성보다 남성들이 보수적” 논쟁
‘청소노동자 비판’ 남학생 등 거론
최근 덕성여대서 비슷한 일 생겨
청년 과격화는 성별 문제 아니야

  • 수정 2022-11-12 16:39
  • 등록 2022-11-12 16:39
지난달 26일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교정에서 임금 동결에 반대하는 손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지난달 26일 덕성여대 청소노동자들이 교정에서 임금 동결에 반대하는 손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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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논단에서 잠시 ‘여진남보’라는 말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여성은 진보적, 남성은 보수적’이라는 말이다. 페미니즘을 둘러싼 견해 및 태도에서 나타나는 성별 간 차이, 2021년 4월 재보궐선거와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20대 유권자 내 성별 간 차이, 총선과 대선 전후로 있었던 여러가지 여론조사들에서 나타난 성별 간 차이 등, 이러한 일련의 경향들로부터 청년 여성은 대체로 진보적이고 청년 남성은 대체로 보수적이라는 일반화를 도출할 수 있다는 일종의 ‘합의’가 있었다.

청년 남성은 어느 정도 보수적인가

‘청년 남성은 보수적’(과연 ‘보수’의 가치와 유관하냐는 시비는 잠시 제쳐두고)이라는 명제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은 그동안 많이 있었다. 과거의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서 지금의 ‘에펨코리아’까지 몇몇 ‘남초 커뮤니티’ 사이트들에서의 여론, 다수 청년 남성들의 보수세력 지지 경향과 이준석 돌풍, 반사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을 반페미니즘, 혐오, 차별과 배제 경향 등이 그러하다. 지난 8월에는 연세대학교에서 벌어진 청소노동자들의 파업 시위에 대해 시위자들을 고소한 재학생이 남성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소송 건에 대한 일부 재학생들의 의견 역시 성차가 갈리는 듯 보도가 된 바람에 한국 사회 담론에서 ‘요즘 젊은이들’의 문제는 20대 남성, 즉 ‘이대남’이 대부분의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외에 이미 이전부터 문제시됐었던 이른바 강남역 살인사건, 엔(n)번방 사건, 신당역 살인사건 등을 둘러싼 몇몇 남초 커뮤니티발 언어도단의 언표들까지 겹쳐 이른바 ‘이대남’ 문제는 한국 사회가 시급하게 해답을 찾아야 하는 거대한 질문으로 일찌감치 다가왔다.

이른바 ‘이대남’ 문제가 매우 거대한 질문으로 먼저 부상한 탓에, 비슷한 양상의 청년세대발 혐오, 차별과 배제 문제지만 그 주체가 청년 남성이 아닌 사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진보적 가치들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유권자 중 60% 이상이 보수 정치세력에 반대하고, 시대정신의 변화를 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론조사 등 ‘청년 여성은 진보적’이라는 명제를 입증하는 것 같은 통계들에 감개무량해하며 ‘이대녀’가 한국 정치의 한 줄기 빛인 양 견강부회하던 사람들이다. 평소 ‘이대남’ 문제에 관해 매일같이 열정적으로 비판적인 논지를 펼치던 논자들 중 일부는 청년 여성발 혐오 및 차별 문제를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다만 개개인의 특수한 문제로 넘긴다. 다른 일부는 아예 없는 일인 양 침묵한다.

얼마 전 덕성여자대학교에서 학내 청소노동자 파업을 비난하는 대자보와 메모가 캠퍼스 게시판들에 붙었다. 대자보(누가 썼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에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 ‘팩트 없는 감정적 호소는 선동’ ‘총장을 향한 일방적인 인신공격 및 학교에 대한 모욕을 멈춰라’ ‘시위는 의사소통의 한 방법이어야 한다’라고 쓰여 있었고 메모들에는 ‘소음공해 STOP 수업방해 STOP’ ‘요구사항은 용역업체에게, 교육기관을 볼모 삼지 마라’라고 쓰여 있었다. 노조 쪽에서 연대를 호소하며 붙인 대자보에는 ‘NO연대’ ‘노조OUT’ ‘노동자OUT’ ‘억지시위, 선동 그만’, ‘연대 안 해요~’ ‘예? 띠용’이라고 쓰인 스티커가 잔뜩 붙었다. 경비·청소노동자 시위에 대해 일부 연세대 재학생이 보였던 적대적인 태도와 전혀 다르지 않다. 소셜미디어에서 논쟁이 일자 덕성여대 재학생을 옹호하는 사람 중에는 자기는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청소노동자가 최저임금 이상을 받는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노동자들을 고소한 연세대생과 함께, ‘학생들은 한시간에 150만원을 쓰고 수업을 듣는데 시급 400원 올려달라고 공부를 방해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인터뷰한 한 남성 대학생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인 일부 덕성여대 재학생들에 대하여 논자들 다수는 비판적인 논지를 개진하는 대신 혼란스러움만 토로했다. 이것은 ‘이대남 문제’부터 사유하고, 그 뒤에 ‘요즘 청년 문제’를 사유한 데서 비롯한 혼란이다. ‘이대남 문제’를 먼저 주어진 것으로 깔아두면, 내가 첫 문단에서 말한 여러가지 성차들, 그리고 ‘청년 여성은 진보적’이라는 명제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는 통계들을 본질론적으로 사고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본질론적이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저 모든 성별 간 차이가 곧바로 결정된다고 믿는 것이다. 함정을 피하려면 ‘요즘 청년 문제’부터 사유하고 그 뒤에 ‘이대남 문제’ 및 ‘이대녀’와의 차이를 사유해야 한다.

‘청년 보수화’가 또 다른 선 넘어

덕성여대 캠퍼스 게시판에 쓰인 ‘노동자OUT’, ‘선동 그만’, ‘띠용’ 따위의 메모들이 ‘요즘 청년 문제’의 전형적인 표상을 웅변한다. 특정한 키워드에 대해 반사적인 불호의 정서부터 표시하고 자신을 아주 잠시나마 불편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즉각적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근시안적인 경향이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파업 시위=노동자=선동=음해=폭력=소비자에 대한 공격’이라는 담론사슬(한 단어만 들으면 나머지 단어들이 동시에 상기되는 것)이 각인되어 있다. 이 담론사슬을 깨트리려 하는 노조의 대자보에 (으레 웹상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게시물을 봤을 때 쓰는 말인) ‘띠용’이라는 메모를 붙이는 행위는 ‘부정은 하되 반론할 가치는 없는 헛소리’로 노조의 발언을 축소하면서 자신의 적대감은 강하게 드러내되 논의의 부담으로부터는 달아나는 비겁한 짓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을 두고 일부 청년들이 ‘보수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후한 평가다. 나는 ‘청년 보수화’ 대신 ‘청년 과격화’라는 명제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성별을 불문한다.

2022.9.24. “‘오징어 게임 좋다’는 네가 싫어”…‘뇌절’ 공격 끝에 남는 것은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오징어 게임 좋다’는 네가 싫어”…‘뇌절’ 공격 끝에 남는 것은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극호-극불호’ 정서의 확대

특정한 인물·작품들 약점만 노려
문제 부각시킨 뒤 ‘폐기물’ 취급
내가 싫은 것 좋아하는 사람 공격
비판 아닌 소모적 논쟁으로 변질

  • 수정 2022-09-24 09:00
  • 등록 2022-09-24 09:00
지난 12일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lt;오징어 게임&gt;에 등장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배우 이정재와 정호연씨가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12일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배우 이정재와 정호연씨가 수상을 위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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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미국에서 열린 제74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배우 이정재의 남우주연상, 황동혁 감독의 감독상을 비롯해 여섯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지난해 세계적 흥행 기록에 이은, 그 이상의 두번째 쾌거다. 그래미, 오스카, 토니와 함께 미국 대중문화 각 분야를 대표하는, 매우 권위 있는 시상식에서 그것도 비영어권 드라마로서는 최초로 수상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겹경사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가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난맥상을 보이던 가운데 모처럼 찾아온 반가운 소식이며, 약간 과장을 보탠다면 아이엠에프(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박세리 선수가 불러온 흥분에 견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극호 아니면 극불호’ 양극만 남아

<오징어 게임>을 완전무결한 불세출의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에미상 수상 사실이 <오징어 게임>이 이견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니다. <오징어 게임>에 대해 외국에서 호평 일색이었던 것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만큼이나 아쉬운 부분을 지적하는 비판, 혹은 이를 넘어선 혹평도 매우 많았다. 진부한 ‘데스게임’ 장르에 한국형 신파를 더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극중 여성 인물에 관한 비판이 많았다. 여성 캐릭터가 지나치게 대상화되어 있고, 평면적으로 그려지거나 어떤 서사적 수단으로만 배치되었다는 의견이며, 특정 인물은 여성혐오를 부추긴다는 문제 제기다.

여성 인물의 재현과 관련한 비판의 경우는, 방송이나 영상의 사회화 기능에 관심을 두는 사회규범 비평 가운데 젠더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대체로 사회규범 비평은 영상물을 수용자가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모방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둔다. 자연히 논지는 콘텐츠가 대중에게 미칠 파급효과에 대한 제작자의 책임 및 교육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문화연구학자 이엔 앙이 <댈러스 보기의 즐거움>으로 수용자의 능동성을 드러냄으로써 수용자 분석이라는 문화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래 사회규범 비평은 다소 철 지난 것으로 간주되곤 한다. 하지만 사회규범 비평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영상 콘텐츠의 파급효과를 고려하면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문제는 오늘날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언어 습관, 어휘력 및 표현력의 빈곤(6월11일 ‘“공포영화 무섭다”며 별점테러…폭주하는 온라인 증오’ 기사 참고)과 사회규범 비평이 마주칠 때 일어난다. 오직 ‘극호’와 ‘극불호’라는 양극의 강력한 표현만 통하는 오늘날의 언어 경향이 비평을 압도하고 있다. 그럴 때 비판은 비판이기를 그치고 다만 감정적으로 소모적일 뿐인 공격으로 변질한다. 특정 인물이나 집단, 인종 등의 재현에서 몇가지 결점이 있다고 한다면 해당 작품은 별안간 처음부터 만들어져서도 안 됐고 방영되어서도 안 됐던 폐기물로 기각되어버린다. 급기야 그 작품을 시청한 사람들에게도 공격성이 뻗친다. 한 작품에 대한 ‘극불호’의 정서와 공격성은 ‘극불호’ 외의 다른 수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는 것은 그 작품을 좋아한 사람을 바보로, 혹은 상종해선 안 되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한 공격성은 다양한 변주로 나타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불호, ‘내가 싫어하는 작품에 출연한 배우’에 대한 불호, ‘내가 싫어하는 작가와 친분이 있는 작가’에 대한 불호 등.

<오징어 게임>이 ‘중년 남성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찬’ 드라마라며 가혹한 평가를 내린 한 비평가는 <오징어 게임>의 에미상 수상 소식에 대해 에미상의 권위를 다소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냉소했다. 자신이 혹평을 내린 작품이 권위 있는 상을 받았다고 해서 자신의 평가를 번복할 필요는 당연히 없다. ‘여러 가지 결점과 한계가 있는 작품임에도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찾으면 될 일이다. 아니면 그냥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될 터였다. 그 대신 그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수동)공격성으로 자신이 불호를 표시한 것과 관련된 모든 것에 불호를 표시하는 길을 택했다. 좋은 비평가의 자세라고 할 수는 없다.

‘극불호’의 정서를 기어이 극한까지 잇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요즘 들어서 드물지 않게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많은 사람을 소외시키며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시킨다.

민족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지양하고자 하는 일련의 논의, 움직임은 십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얼마나 큰 규모의 퇴행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역사가 무수히 보여줬다. 하지만 이것은 민족주의가 특정한 유형으로 발현된 것이지, 민족주의 자체가 무조건적으로 폐기되어야 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엇나간 심보

민족주의의 일면이라도 연상케 하는 어떤 것이 보이면 바로 극도의 경계 태세부터 취하는 사람은 특히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 행사 때면 많이 보인다. 한일전이라도 치르면 더더욱 그러하다. 국제적인 스포츠 경쟁의 흥분된 분위기에서 잠시나마 피어오를 수 있는 국수주의를 경계하자는 이야기는 당연히 격려될 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민족주의 자체에 대한 태도를 ‘극불호’로 설정한 사람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공격성으로 자신의 논평을 개진한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경기를 즐겨 시청하고, 우리나라 선수들과 팀을 응원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냉소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강력한 라이벌 팀을 응원하는 식으로 대중을 도발하기도 한다. 요즘 말로 1절, 2절에 이은 ‘뇌절’이다. 이런 식으로 민족주의를 지양할 수 있으리라 믿는 순진한 사람은 없다. 우스개 섞인 이야기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디나이얼 민족주의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2.9.6. “잘 모르겠지만 여가부는 나쁜 집단”이라는 반페미니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잘 모르겠지만 여가부는 나쁜 집단”이라는 반페미니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우영우’는 왜 반페미에 소환됐을까

페미니즘 악용해 젠더 분열 획책
‘남성 청년들’ 반진보 첨병 이용
“드라마 우영우, 남혐” 주장까지
선동 증폭, 강도와 속도 빨라져

  • 수정 2022-09-06 16:08
  • 등록 2022-09-06 16:08
“여성가족부는 나쁘다”는 비판에는 별다른 근거 없이 그 ‘이름’만을 공격하는 경우들이 있다. 사진은 반페미니즘 시위 현장 모습. 문화방송(MBC) ‘PD수첩’ 화면 갈무리
“여성가족부는 나쁘다”는 비판에는 별다른 근거 없이 그 ‘이름’만을 공격하는 경우들이 있다. 사진은 반페미니즘 시위 현장 모습. 문화방송(MBC) ‘PD수첩’ 화면 갈무리

대선 직후 <피디(PD)수첩>에서 일반인 20대 남성을 상대로 한 길거리 인터뷰에서 한 남성이 여성가족부를 비난했다. 말도 안 되는 정책을 펼친다는 것이 이유였다. 피디는 “그 말도 안 된다는 정책에 무엇이 있냐”고 물었고, 이 남성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여가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거의 없지만, 여가부가 나쁜 집단이라는 것만큼은 잘 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여가부에 대한 반감은 여가부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여가부라는 이름에 대한 반감이다.

지난번 글(8월13일치)에서 ‘청년’과 ‘586’이라는 이름에 관해 이야기했다. 요컨대 보수세력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담론을 구축하기 위해 언론의 힘을 빌려 586을 한국 사회 모든 병폐가 집약된 존재로 묘사하고, 그에 대한 저항군으로 청년들을 동원한 결과, 지금 한국 사회 담론에서 말해지는 청년과 586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페미니즘 이용해 분열 노린 정치권

‘586’과 ‘청년’이 세대 간 분열을 수놓은 이름이라고 한다면 한국 청년 사이 젠더 분열을 수놓은 이름은 단연 ‘페미니즘’이다. 보수세력은 언론과 야합하여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이용해 젠더 분열까지 획책하여 청년 남성들을 반민주당, 반진보의 첨병으로 징병하고 자기들의 확실한 아군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세대 분열 기획보다 젠더 분열 기획이 훨씬 주효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사회경제적 문제를 세대의 문제로 설득력 있게 축소하는 것은 다소 복잡한 서사의 선전을 요구했던 반면, 페미니즘은 문화적 불만을 자극하는 기폭제로 용이하다는 점에서 수많은 청년 남성의 공감을 인위적으로 유도하기에 알맞았다. 사회경제적 불만은 비교적 많은 읽기와 공부가 필요했다. 페미니즘과 결부된 문화적 불만은 수년 전부터 수많은 네티즌들, 유튜버들, 사이버 레커(렉카)들이 밥상을 다 차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세력은 수저만 얹으면 될 일이었다.

2014년부터 일었던 이른바 페미니즘 제4물결 이래 ‘메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러저러한 ‘남혐’ 사례들에 기분 상하고 피로했던 청년 남성들을 반정부 여론에 동원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문재인 정권이 구조적 차별들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자 실행했던 온건한 정책, 메시지들에 죄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에 완전하게 무지했던 청년 남성들은 일찍이 ‘남혐’과 페미니즘을 동일시하고 있었고, 그 결과 모든 진보적 의제와 가치들을 ‘급진적’ ‘극성’ 페미의 그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당 및 진보진영에서 성폭력 사건이 있을 때마다 보수세력과 언론은 위선 프레임을 강화했다. 성폭력 자체보다 ‘범죄자가 페미니스트였다’라는 말을 부각함으로써 범죄 사실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페미니즘만 남게 만들었다. 그 결과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에도 위선과 ‘내로남불’이 들어가게 됐다. 즉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은 민주당 및 진보세력에 대한 불만과 함께 시대적인 가치관의 변화에 대한 이질감과 어색함을 뒤섞어버린 채 호명함으로써 청년 남성을 보수세력의 편으로 만드는 헤게모니적 기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페미니즘=위선=내로남불=586=진보=무능=문재인 정권=민주당=기득권’이라는 담론사슬이다. 이에 따라 청년 남성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채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에 반사적으로 극불호의 정서부터 갖도록 추동된다. 몇 가지 연구 문헌을 보건대 청년 남성들의 젠더 의식이 특별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부장제에 대한 반감은 윗세대에 비해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반페미니즘 정서가 깊은 것은 이들에게 반페미니즘이 성차별주의와 동의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반페미니즘은 성차별 구조를 없애기 위한 각종 정책 및 의제에 대한 반대와 구별되어야 한다. 요컨대 청년 남성들은 성차별적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싫어서 그와 관련된 성평등 움직임에 반발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에 대한 반감이 먼저 있고, 그에 결부된 가치들에 대한 반감이 후행한다.

지난 3월15일 방영된 문화방송 &lt;피디수첩&gt; ‘젠더 갈등과 여성가족부’ 편의 한 장면. 문화방송 제공
지난 3월15일 방영된 문화방송 <피디수첩> ‘젠더 갈등과 여성가족부’ 편의 한 장면. 문화방송 제공
반페미니즘이 확산하는 경로

한 방송에서 조병영 한양대 교수(국어교육과)는 오늘날 점점 하락하는 문해력과 관련해서, 화자의 맥락 파악 없이 특정 단어에만 반응하고 집착하는 경향에 관해 이야기했다. 반페미니즘은 이러한 경향과 만나서 아주 빠르고 강하게 증폭된다. 최근의 예로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특정 에피소드와 관련한 짧은 해프닝이 있었다. 해당 회차는 여성 노동 인권, 구조조정 때 성차별을 다루며, 실화를 각색한 것이다. 이전까지의 회차와 비교해 특별할 것이 없는 에피소드였지만 몇몇 헌신적인 반페미니스트는 해당 에피소드에서 몇 차례 거론된 여성 노동 인권이라는 단어에 꽂혔던가 보다. 이들은 드라마 작가의 이력을 찾아보고 그가 과거 ‘페미니즘 영화’를 연출한 바 있다는 사실을 들며(서울국제여성영화제 신인상 수상 이력으로부터 페미니즘 영화를 유추한 듯하다) 작가가 사실은 페미니스트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작가가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 흥행에 어떤 악영향이라도 줄 거라고 믿는 양, 더 나아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남혐’ 드라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하지만 몇몇 언론사에서 이것을 ‘논란’이라고 보도한 탓에, 짧은 해프닝으로 그칠 일이 시끄러운 논쟁으로 번질 뻔했다.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 중 하나가 유치원생 웃기는 것이다. 똥, 방귀 이야기만 하면 깔깔거리니까. 그 못지않게 쉬운 일이 중학생 웃기는 것일 텐데, 섹스라고 한번 외치기만 하면 열에 아홉은 킬킬거릴 것이다. 그다음으로 쉬운 일은 일부 청년 남성을 발끈하게 만들기인 듯하다. 페미니즘의 편린이라도 연상케 하는 단어 몇개만 귀에 들어가면 반사적으로 화부터 내는 사람이 점점 더 많이 보인다.

2022.8.13. 586=기득권=민주당=불공정=진보=위선이란 ‘담론사슬’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586=기득권=민주당=불공정=진보=위선이란 ‘담론사슬’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586과 청년정치

청년정치, 내용 없는 이름에 불과
정치권·언론 담론공세 산물일 뿐
‘586’을 진보 향한 욕설로 쓰며
진보·민주 vs 청년 구도 만들어

  • 수정 2022-08-13 18:37
  • 등록 2022-08-13 18:37
지난달 8일 국민의힘 당 윤리위원회에 출석했던 이준석 대표. 공동취재사진
지난달 8일 국민의힘 당 윤리위원회에 출석했던 이준석 대표. 공동취재사진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가 징계 처분을 받고, 박지현 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은 당권 도전 관련하여 얼마간 잡음을 일으키고 자당 지지자들의 싸늘한 시선만 남겼다. 평단에서는 이들을 두고 ‘청년정치의 위축을 우려한다’거나 ‘청년정치가 후퇴, 실패, 폐기됐다’느니 이야기를 한다. 동의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다. 위축된 것은 저 두 사람이지, 청년정치가 위축된 게 아니다.

무엇보다 ‘청년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제대로 논의된 바가 없다. 적어도 현재 한국의 지배적인 정치담론에서는 말이다. 단지 만 40살 미만의 정치인이 하는 정치를 청년정치라고 하는 거라면, 이것이 모종의 이유로 망했다느니 후퇴했다느니 논하는 것은 다소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매스컴의 가시권에서 ‘활약’하는 몇몇 젊은 정치 셀럽들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데서부터 천천히 훈련받고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을 묵묵히 수행하는 젊은 정치인들도 있다. 대체로 언론이나 평단, 정치권에서 청년정치를 거론할 때 젊은 셀럽의 정치만을 염두에 두는 듯하다. 요컨대 현재 한국의 지배적인 정치담론에서 ‘청년’ 및 ‘청년정치’라고 말하는 것과 실제 청년 및 청년정치 사이에는 작지 않은 차이가 있다.

보수언론과 정치세력의 담론공세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한국 정치담론에서 말해지는 청년정치라는 것은 내용 없는 이름에 불과하다. 이 이름은 지난 2~3년 동안 정치권과 언론으로부터 끈질기게 진행되어왔던 담론공세의 부산물이다.

정치권과 언론의 담론공세는 현재 삼척동자에게도 일종의 멸칭, 욕설과 다름없이 쓰이고 있는 ‘586’이라는 말과 결부된다. 신진욱 교수가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인용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34살 미만의 청년 중 44%가 ‘586’이라는 말 자체를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586세대는 한국사회의 기득권세력이다’라는 문항에 응답자 80%가 동의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제대로 아는 것은 없으면서 ‘586’이라는 이름에 대한 반감만 잔뜩 가진 것이다.

주지하듯 1980년대 대학생 신분으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운동가 및 이론가 상당수가 90년대 말부터 제도정치권과 학계에 진출함에 따라 이들을 가정용 피시(PC)의 중앙처리장치(CPU) 모델명에 빗대어 촉망받는 차세대 리더로 집단 호명한 것이 ‘386’이라는 용어다. 일종의 정치 유망주였던 저 사람들을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무리하게 머리숫자를 바꿔가면서 집단으로 묶어 호명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정치권과 언론은 끈질기게 486, 586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를 고집하는데, 그러한 호명이 갖는 효과가 자신들에게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 효과란, 586이라는 이름에 함축된 운동권의 역사와 함께 60년대생이라는 사실과 기득권이라는 관념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로써 오늘날의 사회적 악조건들, 사회경제적 문제에 관련한 불만을 세대론적인 불만으로 축소시키고, 그 불만을 운동권 출신이 다수 포진한 것으로 알려진 문재인 전 정권과 민주당 세력을 향하게끔 유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586이라는 이름이 보수세력과 언론의 담론공세에 의해 민주당 세력을 공격하는 용어로 ‘무기화’되었기 때문에, 보수세력에도 운동권 출신에 60년대생이 다수 있지만, 이들을 가리킬 때 586이라는 말은 사실상 쓰이지 않는다.

지난달 18일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거 후보자 등록에 나섰던 박지현 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 공동취재사진
지난달 18일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거 후보자 등록에 나섰던 박지현 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 공동취재사진

담론공세의 결정적 계기는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에 대한 청년세대의 유다른 반발이었고, 보수세력은 이 반발을 기회로 십분 활용하고자 ‘불공정에 분노하는 청년들’을 호명하고 586을 청년의 적으로 제시했다. 그로써 획책한 효과는 30대 이하 청년들을 반정부, 반진보의 첨병으로 징병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소위 ‘분노하는 청년’의 몇몇 목소리가 과잉대표되기 시작했고 언론과 정치권이 앞다퉈 청년의 입을 빌려 복화술 잔치를 벌였다. 역량 미달의 ‘청년정치인’의 별것도 없는 발언에 언론이 주목하며 억지로 셀럽의 그것으로 만들어낸 것도 이 맥락에 있다.

보수세력과 언론의 담론공세는 ‘586=기득권=문재인 정권=민주당=진보세력=불공정=위선=무능’이라는 담론사슬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 저 단어들 중 하나만 거론되면 나머지 단어들이 동시에 상기되는 의미의 연결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586에 맞선 반대 진영에는 ‘청년=2030=엠제트(MZ)세대=공정성에 민감한 세대=불공정과 위선에 분노하는 세대’를 만들었다. 이렇게 청년세대는 반진보 반민주당의 첨병, 핵심 병기로 동원됐다. 요컨대 지금 한국의 정치담론에서 ‘청년’이라는 이름은 보수세력과 언론의 담론공세의 산물이다. ‘청년정치’는 부산물이다.

따라서 청년정치라는 이름이 어떻게 형성됐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관한 고찰 없이 청년정치를 표방하고 나서면 역효과를 피할 수 없다. 지금 담론에서 청년정치는 보수세력에 유리한 기표다. 그러므로 진보정치의 장 안에서 청년정치를 표방한 메시지를 내면 종국에는 진보진영에 대한 공격으로 되돌아온다. 아무리 진보적인 가치를 지닌 메시지일지라도 그것이 청년정치의 표피를 쓰고 발화되면 보수정치의 알리바이가 된다는 것이다. 청년정치가 공정을 말하면 언론보도를 경유하여 ‘불공정한 진보’를 공격하는 레토릭이 되고, 청년정치가 위선을 규탄하면 ‘진보의 위선’을 공격하는 것이 된다. 처음부터 보수세력을 겨냥한 메시지일지라도 청년정치의 발화는 아주 정교한 워딩이 뒷받침하지 않는 한 세대론적인 메시지로 희석되기 마련이다. 결국 586에 대한 공격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정치권과 언론, 논단에 의해 청년정치의 세례를 받고 발언권을 얻은 청년정치인이 셀럽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자당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청년=반진보’ 만들어진 굴레 벗어야

진보진영에서 청년정치가 제 기능을 하려면 먼저 청년정치라는 기표의 굴레를 벗어야 한다. ‘586=진보=불공정’의 안티테제로서 ‘청년=반진보’라는 인위적으로 꿰어진 담론사슬이 굴레다. 굴레를 벗지 않고서는 청년정치라는 이름의 주먹을 날려봤자 자기 얼굴을 때리게 된다. 현재 ‘청년정치가 실패’했다는 것은, 586이 청년에게서 기회를 빼앗았고, 그 기회를 청년이라는 이유로 본인이 마땅히 가져야 한다는 사이비 세대론을 자기 정치의 당위와 알리바이로 삼는 행태에 동의하는 유권자가 더 이상 없음을 말한다.

2022.7.23. “운좋아 뜬 BTS, 집 사다니 미치도록 화나”…엇나간 능력주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운좋아 뜬 BTS, 집 사다니 미치도록 화나”…엇나간 능력주의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그런 능력주의는 없다

“고교 성적으로 날로 먹기” 글 논란
능력주의가 ‘학벌만능주의’ 넘어
‘무능=잘못’이란 억지 논리 번져
노력 인정 않는 엇나간 보상심리

  • 수정 2022-07-23 10:00
  • 등록 2022-07-23 10:00
한국 사회에는 ‘학벌이 곧 능력’이라는, 견고하지만 엇나간 ‘신화’가 있다. 사진은 출신학교 차별금지 법제화를 요구하는 시위 모습. 연합뉴스
한국 사회에는 ‘학벌이 곧 능력’이라는, 견고하지만 엇나간 ‘신화’가 있다. 사진은 출신학교 차별금지 법제화를 요구하는 시위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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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 전 트위터에서 “이 세상이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던 사람들의 날로 먹기 대작전같이 느껴진다”는 글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이틀 만에 8천회 이상 공유되었고 수만명이 이 글에 대해 한마디씩 보태고 논쟁을 벌였다. 글 게시자는 결국 ‘노력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다’며 사과하는 글을 올렸다. 그 뒤로는 사과할 필요가 있었냐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문제의 글을 하나의 언표라고 한다면 저 하나의 언표에는 다수의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공부 잘했던 사람들’에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사람,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 수능 점수가 높은 사람, 명문대에 입학한 사람 등이 한꺼번에 호명되고 있다. 저 글을 읽은 사람들은 각자 어느 쪽에 자신을 이입하느냐에 따라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반응을 보인다. 또한 ‘날로 먹는다’에도 여러 명제가 중첩되어 있다. 사회의 부를 독점한다, 능력만큼의 보상을 받는다, 기여도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다, 기여한 것보다 더하게 돌려받는다 혹은 그래야 한다고 우긴다, 능력도 기여한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너무 많이 가져간다, 공부(시험성적)=능력이 아닌데도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이 많아야 한다고 우긴다, 능력=기여가 아닌데 많이 가져갈 자격이 자동적으로 주어진다고 우긴다 등의 명제가 구분 없이 뒤엉켜 있다. 마찬가지로 각자 어느 명제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반응이 따른다.

능력주의 절대기준은 학벌?

한국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견고한 신화가 있다. 학벌이 곧 능력이라는 신화다. 어쩌면 이 신화에 관련한 논쟁이 한국의 능력주의 논쟁에서 최소 8할 이상을 차지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는 메시지일지라도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학벌주의를 배제한 ‘올바른 능력주의’를 요구하는 메시지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위의 트위터 글도 그 안에 중첩된 명제들을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 ‘올바른 능력주의’를 요구하는 글이 될 수도 있고, 능력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글이 될 수도 있다. ‘날로 먹는다’를 ‘시험성적=능력이 아닌데 마땅히 가져갈 것이 많아야 한다고 우긴다’라고 해석하면 한국에서 능력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다시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는 말이 되므로 ‘제대로 된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메시지가 된다. 그게 아니라 ‘날로 먹는다’를 ‘능력과 기여만큼 보상받는다’로 해석하고 ‘능력과 기여’라는 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하는 글로 읽는다면 해당 글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재고찰을 유도하는 메시지가 된다. 요컨대 트위터 글을 쓴 사람을 포함해서, 그에 발끈하고 논쟁에 나선 사람들 모두 각자 다른 입장에서 다른 이해와 해석을 가지고 다른 이야기를 한 것이다.

5년 전쯤 페이스북 익명 페이지에 하나의 글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가 잠시 잊힌 뒤, 공교롭게도 대선 직후 다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학벌주의가 더 심해져서 스카이(SKY,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 더 대접받았으면 좋겠어요. 아예 진출할 수 있는 직업군이 분류되면 더 좋고요.” 이 몽니를 능력주의라고 말하면 심하게 선해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학벌주의가 학벌로 능력을 입증할 수 있으므로 학벌이 좋은 사람이 쉽게 취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믿음이었다면, 이제는 학벌로 능력을 입증할 수 없는 사람이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글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능력주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문제의 트위터 글이 논란이 된 지 하루 뒤, 다른 한 사람이 다음의 글을 남겨서 더한 ‘어그로’를 끌었다.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하고 특정 시험 잘 준비한 친구들은 자기들이 잘사는 게 아니라, 시험공부 대신 다른 인생을 선택한 삶이 조져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위에서 인용한 학벌주의 강화를 주장한 글쓴이의 멘탈리티를 관통한다. 바로 ‘능력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한 사람은 사회로부터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믿음’이다.

한 사람이 사회에 순응한다는 것은 지금 삶에 만족하며 산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족감 전에 안도감이 있다. ‘내가 저렇게까지 찌질하게 살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다. 지금 사회에 순응하며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찌질하게 사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거나 어떻게든 만들어내기라도 한다. 이러한 순응 기제는 한국의 고질적인 학벌주의와 결합하여 위의 페이스북 익명 글과 같은 언어도단을 낳기도 한다.

‘나랑 다른 쟤들 망가졌으면…’

여태껏 학벌주의의 명령을 들으며 성장한 사람들은 그렇게 사회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었던 것들 다 포기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는데 그에 상응하는 뚜렷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악조건에 대응하는 두가지 방법은 변화를 요구하며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상당수 청년들은 기이한 방식으로 저항과 순응을 결합한다. 자기들보다 못사는 사람을 보면서 위안 삼고, 위안 삼을 사람이 안 보일 때는 억지로라도 자기들보다 못사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못사는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사회가 명령하는 대로 충실히 따랐지만 돌아오는 보상이 모자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고. 사회가 명령하는 대로 충실히 따르지 않고, 수능공부를 하는 대신 예체능으로 대학을 가거나, 대학 진학을 하지 않고 취직을 하거나, 어쨌건 ‘정상적인 코스’를 밟지 않고 나름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이 실패하기를 바란다. 위에서 트위터 이용자가 말한 대로 ‘시험공부 대신 다른 인생을 선택한 삶이 조져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가 여태껏 했던 노력에 준하는 노력을 (자신의 편협한 기준에서) 하지 않은 사람들의 인생이 조져지는 것이라도 봐야 자신이 쏟았던 노력이 부정당하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례가 있다. 직장인들이 자신의 회사 이름만 걸고 익명으로 글을 올리는 ‘블라인드’라는 소셜미디어 사이트가 있다. 여기에 대기업에 다닌다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썼다. “방탄소년단 집 산 거 보고 진짜 미칠 거 같다. 솔직히 얘네들은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운 좋아서 빵 뜬 건데 노력은 내가 더 하지 않았냐? 얘네가 수능이라도 봤을까? (…) 난 하기 싫은 일 꾸역꾸역 하고 노력해도 집 하나 사기 힘든데 얘네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다가 운 좋아서 떴는데 진짜 화나고 미칠 거 같다.” 여기에 능력주의는 없다. 

2022.7.2. 좌표찍기와 집단괴롭힘은 ‘정치팬덤’이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좌표찍기와 집단괴롭힘은 ‘정치팬덤’이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정치팬덤과 좌표찍기

적극 지지층 가리키던 용어 ‘팬덤’
일부서 ‘좌표찍기’ 동의어 쓰거나
집단 사이버괴롭힘도 팬덤 취급
위험한 행태와 뒤섞임 경계해야

  • 수정 2022-07-02 12:57
  • 등록 2022-07-02 12:57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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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어디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중차대한 선거를 목전에 둔 시기에 이른바 ‘정치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본인이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비판 및 공격을 들었을 때 완벽히 논박하는 데 실패하면 엄청난 상실감과 스트레스를 겪는다는 것이다. 지지하는 후보가 공격받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와는 무관하게 특정 정치인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늘 있었고 반대 세력의 정치인이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에 대한 집단 공격도 인터넷과 정치가 얽힌 이래 전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따라 새삼스럽게 현실 정치의 핵심 단어로 팬덤이라는 말이 급하게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정치팬덤? 팬덤정치?

위에 옮긴 글은 5년 전 학부 수업 과제의 첫머리다. 그때가 2017년 5월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19대 대선 직후였다. 당시에는 민주당의 경선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의 타 후보들을 향한 이른바 문자폭탄, 악성댓글, 집단 사이버공격이 문제적인 현상으로 거론되곤 했다. 이것은 간단히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정치팬덤의 만행’이라는 식으로 요약되었다. 당시 친문재인(친문) 유권자의 기세가 가장 강하고 규모가 크다 보니 친문 팬덤의 ‘만행’이 주로 보도되었고 이후 자연히 팬덤은 친문 유권자의 동의어와 같은 말로 한동안 지속되었다. 정치팬덤이라는 것이 여야와 인물을 불문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대표에 선출된 2015년부터 비문 성향 의원, 정치평론가, 기자들이 하루가 멀게 외쳤던 ‘친문 패권’ 담론이라는 전사가 있었다.

5년 뒤 정권이 교체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연인이 되었는데 여전히 팬덤이라는 것이 한국 정치의 시급하게 지양되어야 할 변칙적인 것으로 새삼스럽게 다시 거론되고 있다. 지금 정치팬덤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것은 아주 많은 것을 포함한다. 정치를 의인화하여 특정 정치인 개인을 아이돌그룹 멤버 소비하듯 하는 것 혹은 정치인을 우상화하는 것, 지지자들끼리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호전적인 극성 지지자들이 상대 진영에 집단 공격을 퍼붓는 것, 극성 지지자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유리하도록 정당을 압박하는 것, 정치인이 극성 지지자들에게 동원 명령을 내려 여론 왜곡을 시도하는 것, 정치인이 무매개적으로 지지자들과 소통하는 것, 정당 정치가 여론 왜곡에 휘둘리거나 영합하는 것 등이다. 여기에는 행위 주체가 팬들인 것과 정치인인 것이 뒤섞여 있다. 팬덤을 논할 때는 저 둘을 정교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논자들은 전자를 ‘정치팬덤’, 후자를 ‘팬덤정치’로 간략하나마 구별해서 쓰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치팬덤과 팬덤정치가 관념적으로는 구별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적인 논의에서 둘을 칼로 자르듯 서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탓에 정치팬덤 혹은 팬덤정치를 비판하는 논평 중 상당수는 다소 김빠지는 결론을 낸다. 우상화된 정치인이 직접 나서서 극성 지지자들을 엄준히 꾸짖어달라는 것이다. 정치팬덤으로 인한 문제를, 정치인이 팬덤의 권위를 이용해서 해소해달라는 이야기가 된다.

팬덤을 비판하는 논의에서 저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란 매우 어렵다.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정치팬덤이라는 말이 포함하는 위의 다양한 양태들을 개별적으로 따져야 한다. 그런데 저것들을 개별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문제들은 더 이상 팬덤이라는 특수한 화두가 아니라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발전의 조건하 대중 정치 형식이라는 문제 설정으로 자연히 논의가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첫 문단에서 말한 것처럼 극성 지지자들의 과몰입 및 호전성, 그리고 이들을 이용한 좌표찍기와 문자폭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데 팬덤을 거론하는 것은 새삼스럽다는 말이다. 좌표찍기를 팬덤으로 설정하고 비판하면서 위에서 말한 김빠지는 결론을 내지 않고 일관된 논의를 전개하려면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처럼 정당정치를 매개로 하지 않은 정치인과 지지자 간의 직접 소통을 근본적인 문제로 지적해야 한다.

‘팬덤’이란 이름에 가려진 위험

상향식 참여민주주의를 폄하하고 싶지 않은 논자들은 정치팬덤 혹은 팬덤정치를 좌표찍기의 동의어와 다름없는 것으로 쓴다. 하지만 좌표찍기는 팬덤과 전혀 무관한 부문에서 가장 심각하게 이뤄지고 있다. 바로 언론이다. 언론이 행하는 좌표찍기는 ‘개 호각’(dog whistle)의 형태를 띤다. 말인즉 언론의 좌표찍기는 정치인의 그것과 다르게 노골적인 동원명령으로 나타나지 않고 무해한 정보 전달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종종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을 타깃으로 잡을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손녀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보도가 있다. 기사에는 그가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 어느 전형으로 합격하였는지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대다수의 독자에게는 그저 ‘그렇구나’하고 넘기는 정보 전달에 불과하지만, 특정 집단에게 해당 정보는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타깃을 제시하는 것이다. 해당 기사는 포털사이트의 인공지능(AI)에 의해 타 언론사의 ‘서울대 커뮤니티가 뿔났다’라는 기사와 병렬되면서 좌표찍기의 효능이 증폭된다.

좌표찍기, 집단 사이버괴롭힘 등에 팬덤이라는 말을 붙이면 오히려 그 위험성과 폐해가 축소된다. 팬덤의 비이성적이고 무조건적인 지지에 대해 우상화된 정치인이 거리두기의 태도를 보이면 저 해로운 행태들이 해소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또한 팬덤이 친문 유권자의 동의어로 쓰이던 전사가 있었듯이 지금도 팬덤을 이야기할 때 친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의 몇몇 돌출적인 행태에 관한 이야기로 한정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세력의 더 위험한 좌표찍기 행태를 은폐한다. 그리고 현재 정치팬덤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는 매우 많고 다양하면서 어느 것도 정확히 지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유동적인 단어는 어떤 유의미한 논쟁의 화두가 아니라 다만 상대 정치 세력을 소수 비이성적인 집단에게만 소구하는 세력으로 폄하하는 반증 불가능한 낙인으로만 기능한다.

창작과비평 196호 <그런 세대는 없다> 촌평. 누가 왜 자꾸 그런 세대가 있다고 우기는가

  나는 386 세대 (‘586’, ‘n86’ 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 을 선호한다 ) 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 특히 386 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