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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4. 시위=나쁜 것? 시민은 정부 좇는 ‘불나방’이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시위=나쁜 것? 시민은 정부 좇는 ‘불나방’이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그레고리’라는 이름의 나방에 관하여

실존적 고민 나누던 나방 그레고리
“어떻게 왔냐” 묻자 “불이 켜져서”
‘시위=불법’이란 담론 만드는 정부
맹목적 추종 않기 위해 각성해야

  • 수정 2022-12-24 10:16
  • 등록 2022-12-24 10:16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에서 보행권 보장을 요구하며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에서 보행권 보장을 요구하며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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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들을 웃기는 코미디언’ 놈 맥도널드의 농담을 또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나방이 족부의학과 진료실로 들어간다. 의사는 나방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묻는다. 나방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매일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의 몸뚱이를 끌고 일하러 갑니다만 이제는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에 자다 깨서 옆을 보면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낯선 늙은 여자가 누워 있어요. 딸 알렉산드리아는 독감으로 죽었고, 나의 아들,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이런 말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만 아들놈의 눈을 보면 내가 거울을 볼 때 항상 보이는 그 비겁한 겁쟁이의 얼굴만 보여서 말이죠. 만약 그 겁쟁이가 조금만 용기가 있었더라면, 침대 머리맡에 장전된 채로 보관해두는 권총에 손을 뻗을 용기만 있었더라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저는 나방이지만 가끔은 거미가 된 기분입니다. 지옥불 위에 펼쳐놓은 거미줄을 간신히 붙들며 위태롭게 살아가는 거미 말이죠. 너무 힘듭니다.”

그의 푸념을 들은 의사는 이렇게 묻는다. “정말 힘드시겠습니다만, 정신과를 찾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 왜 여기로 오신 거죠?” 나방은 이렇게 대답한다. “불이 켜져 있어서요.”

‘허무개그’로부터 얻는 통찰

굉장히 슬프고 암울하면서도 마지막 한마디 문장이 앞서의 모든 감상을 무너뜨리며 허탈하게 만드는 말 그대로 ‘허무개그’다. 바보 같은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개그지만 나는 이로부터 하나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의 시민들 모두가 많은 부분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의 나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는 세상 모든 고민을 짊어진 것처럼 고뇌하며 실존적 위기에 맞서 하루하루 투쟁하지만 결국 실질적인 행동은 관성적으로, 의식이나 이성과 무관하게 자기도 모르게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각자 복잡한 사연과 고뇌를 짊어지고 최대한 합리적인 결정과 판단을 내리고자 하며 스스로 나의 길을 개척하며 행동하고자 애쓰지만 관성적으로,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실존주의자 나방과 같다면, 나방을 움직이는 불빛은 무엇일까? 담론이다. 그때그때의 사회 지배적인 담론은 우리가 시민으로서, 유권자로서 내리는 결정과 판단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 자신은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담론이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서로 관계없는 별개의 것들을 관계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렇게 보이게 된 결과물이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 및 판단 체계에 결정력을 행사하냐면, 예컨대 한 사람의 범죄 행위와 그 사람의 피부색은 서로 무관한 요소지만 둘을 유관한 것으로 엮는 담론이 인종차별적 편견과 프로파일링을 유도하는 식이다.

담론의 키 플레이어는 단연 언론이다. 즉 담론이 불빛이라면 언론은 불빛을 밝히는 전구, 그리고 그 전구를 어디에 설치할지를 결정하는 존재다. 지금 언론이 과거에 비해 지배력이 많이 쇠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대형 언론사들의 담론 권력은 막강하다. 오히려 몇몇 대형 언론은 프로보커터 정치유튜브를 모방하면서 여론을 왜곡하며 담론을 오염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른바 가짜뉴스를 생산한다고까지는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로 무관한 것들을 억지로 유관한 것으로 엮는 프레임으로, 혹은 유관한 것들을 무관한 것으로 해체하는 보도로써 특정 진영이나 집단, 사안 등에 대한 거부감, 적대감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사례는 많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대한 보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초반부터 화제가 된 전장연 시위는 윤석열 집권 초기부터 위태롭게 된 지지자 결집력을 회복시킬 ‘선량한 시민의 적’으로서 언론과 정치권에 의해 제시되었다. ‘시민 불편 vs 전장연 시위’라는 대결 혹은 전쟁 구도는 사실상 장애인을 시민이 아닌 존재로 간주하게 만든다. 장애인도 시민이며, 장애인이 대중교통 이용에 불편을 겪는 것이 곧 시민 불편이다. 전장연 시위는 시민 불편을 줄여달라는 요구지만 언론 보도는 시민과 전장연의 관계를 영합게임으로 만들었다.

관성 따라 움직이는 ‘나방’ 되지 않도록

그뿐만 아니라 최근에 있었던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는 언론들이 ‘기습 시위’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장연의 시위에 대해 서울시가 무정차 통과 조치로 대응한다고 밝히자 전장연 쪽에서 시위 장소와 시간을 알리지 않고 시위에 나섰는데 이것을 ‘기습’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전장연과 시민 사이의 전쟁이라는 프레임을 더 강화할 뿐만 아니라 시위자들을 기동력 있는 게릴라 같은 집단으로 상상하게 하는 그릇된 인상을 준다. 언론들은 전장연이 시민을 볼모로 잡는다고 비판하지만 오히려 정부가 시민을 볼모로 잡고 전장연과 기싸움 한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론 보도를 접하는 사람들은 장애인의 권리 보장이 곧 자신에게 장기적인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그저 ‘시위는 나쁜 것’이라는 담론의 타성에 몸을 맡긴다.

김용민 화백의 <경향신문> 2014년 5월16일치 만평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세월호 참사 소식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이게 나라냐’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아픔을 딛고 일어서며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곧 선거철이 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투표소에 들어가면서 ‘그래도 아파트값 올려줄 후보를 뽑아야 부자가 된다’며 타성에 젖은 결정을 내린다. 각자 고뇌를 짊어지고 치열하게 투쟁하며 살아가는 우리 실존주의자 나방들은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관성적으로 불빛을 향해 움직이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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