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86 세대 (‘586’, ‘n86’ 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 을 선호한다 ) 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 특히 386 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의 어깨에 서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386 세대가 과거 기득권에 저항하다가 기성세대로 성장하고 기득권이 되어 청년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명제가 일부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 386 세대 전체를 한국사회의 모든 병폐가 의인화된 집단으로 폄훼해버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 저 명제에서 386 이라는 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무엇인지 전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 그런 세대는 없다 > 에서 이른바 ‘386 세대의 독식 ’ 과 그 때문에 ‘ 미래를 박탈당하는 청년세대 ’ 라는 구도를 생산하는 담론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 그에 따르면 세대 간의 체계적인 불평등이 있어 386 세대가 ‘ 양보 ’ 를 해야만 많은 사회적 병폐가 해소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 세대 선정주의 ’ 에 불과하다 . 그 선정적인 허구성은 저자가 인용하는 다음의 조사결과만으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 한국의 34 세 이하 청년들 사이에서 386 이나 586 이라는 용어 자체를 잘 모른다고 대답한 사람이 44% 가 된다는 것이다 . 그러면서 386 세대가 ‘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다 ’ 라는 문항에 80% 가 동의했다고 한다 . 386 세대에게 ‘ 갑질 ’ 을 당하고 그들에 대해 강한 원한을 갖고 있다고 말해지는 청년들 상당수가 386 이라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 그 유래도 알지 못하면서 마치 오래전부터 그 의미와 용례를 잘 알고 써왔던 것처럼 잔뜩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확실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 386 이라는 말의 용례에는 정치사적인 맥락이 있다 . 1980 년대 대학생 신분으로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에 앞장섰던 운동가 , 이론가들 상당수가 1990 년대 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