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정보윤리 이슈리포트 김내훈
관종의 세계
미국에서 ‘우유 상자 챌린지’(milk crate challenge)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우유 상자를 계단식 탑처럼 쌓아놓고 중앙 가장 높은 곳까지 걸어 올랐다가 내려가는 모습을 촬영하는 짧은 영상이다. 우유 상자가 튼튼하지 않은 탓에 굉장히 위태롭다. 열에 아홉은 중앙까지는 어떻게든 오르더라도 내려가다가 머리부터 고꾸라진다. 전신마비에서 사망까지 우려되는 일이라 끝까지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라는 말만 속으로 되새기게 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우유 상자 챌린지 영상을 혼자가 아니라 친구들과 여럿이서 촬영한다는 점이다. 위험천만하게 상자를 오르는 사람을 응원하는데, 오르다가 넘어지면 누구 하나 걱정하는 사람 없이 그를 둘러싸고 깔깔 웃는다. 챌린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비웃음당해 마땅하다는 듯이 말이다. 심지어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우유 상자를 차버려서 상자에 오르던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단지 웃음 때문에다. 성공하면 영상이 아무래도 심심해질 터이다. 아마 곧 본사로부터 삭제 조치 되겠지만, 유튜브에 ‘milk crate challenge’를 검색해보면 우스꽝스럽게 고꾸라지는 것을 넘어 크게 다쳐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나 아예 즉석에서 사망한 장면만 모아서 편집한 ‘사망 모음집’(death edition)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댓글난에는 ‘별로 충격적이지도 않다. 멍청이들이 멍청한 짓 하다 죽은 것뿐이다.’라며 조롱하는 반응으로 가득하다.
이외에도 경악스럽고 위험천만한 챌린지가 유행한 바 있다. 수직으로 뛰어오른 사람의 종아리를 양옆에 선 두 사람이 걷어차서 공중제비를 돌게 만드는 ‘대가리 깨기 챌린지’(skullbreaker challenge), 콘센트에 플러그를 느슨하게 꽂은 뒤 동전을 갖다 대서 스파크를 일으키는 ‘콘센트 챌린지’(outlet challenge), 캡슐형 세탁 세제를 입안에 넣고 터뜨리는 ‘타이드팟 챌린지’(tide pod challenge), 공중화장실 좌변기 시트를 혀로 핥는 ‘코로나 챌린지’(corona challenge), 알러지 약을 과복용하는 ‘베나드릴 챌린지’(benadryl challenge) 등, 틱톡TikTok 및 유튜브 조회수의 꼭대기와 인간 지능의 바닥을 동시에 경신하는 영상들이 젊은 네티즌들의 인터넷 공간을 잠식하고 있다.
주목경제
‘가장 멍청한 죽음’ 사례에 수여한다는 다윈상 후보에 오를 법한 챌린지에 참여하고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소위 ‘인싸’ 문화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망, 또래 집단 내 압력(peer pressure)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로 조회수 자체가 돈이 된다는 것, 즉 주목경제(attention economy, 관심경제)를 들 수 있다. 주목경제라는 개념은 다음의 명제에서 출발한다. 정보시대의 디지털 재화인 정보에는 희소성이 없다. 무한히 생산되고 복제될 수 있는 것에는 값이 매겨질 이유가 없다. 값이 없는 정보에 값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주목이다. 무한한 정보와 달리 인간의 주목은 유한하다.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경제학의 문제라면, 오늘날 주목과 관심의 주고받음은 엄연한 경제행위다.
주목경제 개념을 널리 퍼뜨린 미국의 저술가 마이클 골드하버M.H. Goldhaber는 쉬운 설명을 위해 자동차 생산을 예로 든다. 자본주의 선진국에 한해서 보자면, 자동차는 모든 가정에 한 대 이상 보급될 수 있을 만큼 많이 생산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적당한 성능의 차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또 다른 차를 향한 욕망을 놓지 못하고, 기왕이면 더 비싼 수입차를 원한다. 하지만 같은 교통 법규를 지키며 달려야 하는 조건에서 비싼 차량의 성능 차이를 십분 만끽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가격 차이가 10배 나는 두 대의 차량이 실제 성능 차이도 10배씩 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도 매우 드물 것이다. 사람들은 자동차에서 성능과 기능 이상의 무언가를 원한다. 바로 기호다.
생산력 향상으로 인해 상품의 쓸모, 내구성, 사용가치가 아니라 그것이 품고 있는 기호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자동차의 값을 높이는 것은 브랜드다. 수입차를 몰고 다니는 상류층의 기호, 고가의 수입차로 표상되는 경제적 지위의 기호, 나와 범부들을 구별 짓는 기호에 값이 매겨진다. 기호를 팔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주목이 필수적이다. 사용가치 면에서 대동소이한 상품들끼리의 경쟁은 주목도가 관건이다. 품질보다 마케팅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다.
정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주목이다. 인터넷 및 커뮤니케이션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정보의 공급은 수요를 한참 웃돈다. 무한한 정보의 물결로부터 유의미하고 유익하고 이로운 것을 추려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그나마도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채 표류하다가 망각된다. 아무리 유익한 정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것이 된다. 한 사람이 동시에 보낼 수 있는 주목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정보들은 주목을 위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충분한 감식안을 갖춘 사람들에게도 필요하고 유익한 정보를 추려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자연히 당장 눈에 띄는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정보에 주목할 때 금세 또 다른 정보가 밀려와서 짧은 시간 안에 주목의 밀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따라서 정보 공급자들의 주목 경쟁이 더 격해지고 콘텐츠는 으레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관심을 위한 인정투쟁
골드하버가 설명을 위해 자동차를 예로 든 데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주목경제는 정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존재하는 모든 재화에 해당되는 이야기며 인간의 노동력도 예외는 아니다. 제대로 가치를 부여받기 위해서는 주목이 필요하다. 학력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전반적인 역량과 교양이 상향 평준화됨에 따라 구직자들은 스펙을 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과시해야 하게 되었다. 신규 채용의 자리도 점점 더 줄어들면서 구직자들은 치열한 스펙 경쟁뿐만 아니라 주목 경쟁도 벌여야 한다. 일을 얼마나 잘하고 얼마나 많이 배웠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기본으로 깔아두고 얼마나 잘, 적당한 수준으로 적절한 때 뽐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완벽히 무시하면서 살기로 하지 않는 이상 자신을 어떻게든 좋게 보이게끔 포장할 필요가 있다. “충분히 큰 공동체 안에서 동료 인간들과 살게 되면서 우리는 그들의 눈에 가능한 한 유능한 존재로 보이고 싶어 하고, 그래서 행위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속성을 그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통용되는 ‘관종’(관심종자)이라는 말에서 ‘종자’라는 표현은 어떤 사람의 씨앗, 즉 근본부터가 다름을 의미한다. 『관종의 시대』(2020)라는 책을 쓴 김곡이 말한 대로 “오늘날 관심은 돈과 삶의 개념 자체를 그 ‘종자’부터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일정 정도 ‘관종끼’를 갖고 살 수밖에 없다. 주목과 관심이 가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종은 더 이상 조롱과 비난이 담긴 멸칭이 아니라 과거와 구별되는 현대인의 특징으로까지 거론된다. 같은 관종이라도 ‘좋은 관종’과 ‘나쁜 관종’을 구별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임홍택 작가의 『관종의 조건』이 그렇다. 그는 21세기를 리드하는 좋은 인재가 되기 위해 ‘좋은 관종’이 되기를 요구한다. 지금은 과묵히 할 일을 하는 겸손함이 미덕인 시대가 더 이상 아니며, 본인의 역량을 다만 과하지 않게, 과시할 수 있는 상황이 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여줘 유능한 인재로 눈에 띄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항시적이고 더 치열한 주목 경쟁과 인정투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조회수 장사의 조건
문제는 좋은 의미로 눈에 띄는 것을 나쁜 의미로 눈에 띄는 것이 압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정보는 그것의 유⦁무익함과 상관없이 주목도로 가치가 정해지는데 눈에 띄는 무익한 정보가 눈에 띄지 않는 유익한 정보를 밀어내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특히 주목경제 시대와 ‘데이터 시대’가 맞물리면서 ‘조회수 장사꾼’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데이터는 정보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자료며, 데이터에 의미가 부여된 것이 정보라고 할 수 있다. 데이터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주요한 연료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이용자들의 활동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뽑아낸다. 플랫폼에 입력되는 이용자의 언어, 생활 동선, 검색 기록, 소비 경향, 이용자 간 상호작용, 게시물 선호 경향, 긴 글, 짧은 글 등 닥치는 대로 수집한 데이터는 기업의 자산이 되고 다른 기업에 판매되기도 한다. 쌓인 데이터의 양이 임계치를 넘기면 일정한 패턴이 형성되는데 이것을 정보로 가공하여 상품의 수요를 분석해 맞춤형 광고를 송출하고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다. 기업의 운명 역시 남들보다 빠르게,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는 데 달려 있기 때문에 데이터 확보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더 많은 데이터 수집을 위해 더 많은 이용자 유입이 필요하다. 따라서 오늘날 플랫폼 기업은 이용료를 무료에 가깝게 낮춰 당장의 이윤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용자 확보를 더 중시한다. 그렇다고 이윤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용자들이 플랫폼을 경유해 행하는 활동들(글과 이미지 게시, 좋아요 누르기, 추천과 비추천, 댓글, 시청 행위 등)은 그 자체로 이윤을 발생시킬 수 있는 데이터가 된다. 이용자들은 상품을 구입하지 않고도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준다. 자발적으로 데이터를 생산하는 자유⦁무료노동을 하기 때문이다. 유명 유튜버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들이 끌어들이는 신규 이용자들과, 이들이 생산해내는 데이터로 창출한 천문학적인 이윤의 극히 일부를 떼어 준 격려금에 지나지 않는다.
코로나 챌린지, 우유 상자 챌린지 등 무익하고 무의미함을 넘어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스턴트 행위는 소셜미디어 플랫폼 기업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아무런 정보값도 없고 해롭기만 하지만 빅데이터의 일부가 되어 인공지능 딥러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용될 수 있다. 위험천만한 챌린지로 뭇사람의 이목을 끌어 이용자 유입을 유도한다면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든 기업 입장에서는 더없이 이롭다.
조회수를 높이는 쉬운 방법
눈에 띄어야만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 주목경제 시대에서, 그리고 눈에 띄면 띌수록 그 주목도에 비례하여 화폐로 보상을 받는 데이터 시대에서 눈에 잘 띄는 것은 그야말로 지고의 선이 되었다. 뭇사람의 이목을 끌고 주목을 유발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양질의 콘텐츠로 승부하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콘텐츠에는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나 형식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거나, 낯설고 어려운 이슈를 더 넓은 범위의 대중이 접할 수 있게끔 연성화하는 것 등 다양하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건 목불인견 수준의 혐오스러운 연출과 언동, 폭력적이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표현 공해’로 누구든지 한 번쯤은 그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이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방법이 훨씬 쉬울 터이다. 눈 딱 한 번 감고 위험한 챌린지를 성공시키고 유행시키면 단번에 이른바 ‘인플루언서’로 지위 상승을 할 수 있고 보너스로 돈도 벌 수 있으니 이제는 삼척동자도 이 행렬에 가세하고 있으며, 혐오감을 자아내는 콘텐츠가 주목 경쟁에서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미국에서처럼 저 해괴한 챌린지들이 유행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겠지만, 비슷한 사례를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유행 초기에 감염자 행세를 하며 공공장소에서 콜록거리고 쓰러지는 난동을 부리고, 도망가는 확진자와 그를 쫓아가는 당국자의 추격전을 연출해 공포감을 조성하다가 입건된 유튜버가 있었고, 투렛 증후군을 연기하며 조회수를 올리다가 발각된 유튜버도 있었으며, 움직이는 자동차 바퀴에 신체 일부를 깔리고, 전구를 씹어먹는 모습을 보여준 사람도 있었다.
물론 관심을 갈구하는 행위가 반드시 위의 경우들처럼 분노와 혐오감을 유발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목과 관심을 받기 위해 더러운 길거리를 청소하고, 노숙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적극적인 모습을 연출하여 과시하고 다니는 사람도 매우 쉽게 접할 수 있다. ‘단지 관심받기 위해 착한 척한다’라는 비아냥을 받기는 하겠지만 어찌 됐건 결과적으로는 긍정적인 효과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눈에 띄는 것만이 관건이기 때문에, 선행을 과시하는 데만 집착하며 진정성과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그 상징자본, 매력자본의 알맹이만 취하려 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미국에서 특히 그러한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대규모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BLM) 시위 도중 다수의 약탈과 기물 파손 행위 등 폭동 사례가 있었는데 이러한 안타까운 사건들은 소셜미디어 ‘관종’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된다. 일찍이 열심히 가꾼 몸매를 과시함으로써 많은 구독자와 추종자를 확보한 다수의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은 사회적 이슈들에 관련해서도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폭동으로 인해 파손된 공공 기물들을 수리하고, 건설노동자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런데 이들 중 다수는 건설현장이나 청소현장에 난입하여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장비, 도구를 들고 일을 거드는 척만 하며 촬영을 한 뒤 자리를 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와 같은 ‘관종질’의 사례는 앞서 열거한 혐오감과 공포를 유발하는 망동과는 달리, 보는 사람에 따라서 더 가증스러워 보일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엄청난 해악을 사회에 몰고 오지는 않는다. 다만 실소를 자아낼 뿐이다. 하지만 관종들을 향한 일반 대중의 원한과 경멸감은 이들로 인해 훨씬 크게 증폭된다. 이 와중에 이러한 관종에 대한 원한과 경멸을 자신만의 콘텐츠로 삼는 유튜버들이 나타나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다. 관종들의 과격한 행동들, 가식과 위선, 나르시시즘을 조롱하는 것은 유튜버들의 조회수 장사의 새로운 장르, 대중에게는 새로운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관종의 생태계
인터넷의 한쪽에서는 관종들의 콘텐츠가, 다른 한쪽에서는 관종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콘텐츠가 유행함에 따라 이제 인터넷 인구는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관종들의 콘텐츠에 열광하고 모방하는 사람들, 관종들 및 관종들의 콘텐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이 위험한 짓을 하다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으면 ‘바보가 죽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비아냥대면서 자기 효능감을 얻고 상대적 우월의식을 높이는 사람들, 둘 모두에 무관심하고 시큰둥한 사람들이 그것이다. 관종 콘텐츠들끼리의 주목 경쟁이 치열해져 더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될수록 두 번째 집단의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첫 번째 집단과 두 번째 집단은 공생관계를 맺는다. 관종들을 조롱하고 욕하기 위해서는 일단 관종의 콘텐츠를 공유해야 한다. 그것만으로 관종에게는 새로운 조회수 유입이 되어 더없이 도움이 되는 고마운 일이다. 관종을 조롱하는 것을 콘텐츠로 삼는 사람들로서는 소재의 원천이 마를 일 없어 편하고, 더 신랄하고 시원하게 조롱할 방법을 연마하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조회수를 끌어올릴 수 있다. 이제는 이들 사이에서도 주목 경쟁이 벌어져 날이 갈수록 조롱과 비난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보다시피 관종을 조롱하는 콘텐츠가 유행해도 관종들의 활동이 위축되지는 않는다. 조롱 콘텐츠가 유행하는 데서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거짓 효능감이다. 관심 좀 받자고 저렇게 정신 나간 짓을 벌이는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는 생각에서 오는 만족감이다. 이러한 상대적 우월감은 인터넷에서 생산되는 콘텐츠들에 대한 전반적인 기대치를 낮추고 그에 요구되는 전체적인 완성도를 낮춘다. 그 결과, 관종들의 위험한 챌린지에 버금가는 혐오스럽고 과격하고 반사회적인 메시지를 던지더라도 겉으로는 해괴망측한 짓만 하지 않으면 점잖고 유익한 정보를 담은 콘텐츠로 비춰지게 된다.
또한, 거짓 선행을 과시하는 관종들을 조롱하는 것이 일종의 유희 거리로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는 선행을 베풀고 적극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일반 네티즌들의 시선에서 가식적인 관종질에 다름없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게 된다. 선행을 하고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 중 단지 주목과 관심을 얻기 위해 가식으로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세계의 좁은 일부가 전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모든 사회적 활동과 메시지, 어젠다들 자체가 일부 젊은 네티즌들에게 가식과 위선으로 기각된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 ‘BLM’운동을 위시한 반인종주의 메시지의 가치가 통째로 가식과 위선으로 축소되는 위험한 현상이 목격된다.
항시적인 인정투쟁과 주목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관종들에 대한 분노로 쏟아낸다. 이들 중 일부는 이러한 분노의 표출이 지속되면, 자신들의 인정투쟁 자체에 대한 환멸로 이어져 사회생활에 필요한 일말의 가식과 위선을 전부 벗어버리고자 하는 강한 충동을 갖게 된다. 이들은 위선에 반한답시고 위악으로 나아가 과격하고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언행을 보이는 ‘트롤’로 전락하기 쉽다. 일부는 인터넷 바깥에서도 트롤이 된다. 관종을 누구보다도 혐오하고 비난하던 사람이 더 악질 관종이 되어버리는 것이 바로 관종의 세계다. ‘관심을 주지 말자’, ‘병신에게 먹이를 주지 말자’라는 단순한 진단 이상의 정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소음에 불과한 것들이 유익한 정보를 밀어내고 인터넷 이용자들을 양극으로 분열시키는 관종의 생태계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나로서는 아직 과문한 탓에 불가능하다. 나도 마찬가지로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여가시간을 보내는 범부에 불과하다. 일개 네티즌으로서 건전한 정보 이용, 인터넷 이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인터넷 공간을 정화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방법은 분명히 있다. 일단 알고리즘을 차단하는 방법이 있다. 유튜브 메인화면 우측 상단에 있는 계정 관리 버튼을 누르면 “YouTube의 내 데이터” 메뉴가 있다. 여기서 영상 시청 기록과 검색 내역 기록을 중지시킬 수 있다. 혹은 인터넷 브라우저에 제공되는 ‘시크릿 모드’ 기능을 이용하면 된다. 이 조처를 하면 어쩌다 클릭하게 된 관종 콘텐츠로 인해 유튜브 알고리즘이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관종 콘텐츠들의 선정적인 낚시성 썸네일에 낭비하는 시간을 줄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분야가 되었건 관련 정보를 찾아보려 할 때 유튜브부터 검색해보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관종 콘텐츠나 음모론, 혐오 콘텐츠를 공개적으로 조롱하거나 비판한다는 이유로 그것을 공유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조치들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안 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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