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6일 수요일

김내훈의 행재요화 1490호 밈과 MBTI 시대…T는 정말 감수성 메말랐을까?

 10년 전, 한국 공포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푸근한 인상의 가수 겸 중견 배우가 사이코패스 의사 역할을 맡아 화제가 됐지만 평은 매우 안 좋았고 흥행도 참패했다. 단지 잔인한 연출과 기괴한 스토리로 어설픈 공포를 유발한다는 평이 지배적이었고, 주인공 배우 본인도 출연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나는 보지도 않았을뿐더러 흥행은 참패해 기억하는 사람 거의 없이 완전히 잊혔지만, 나로서는 10년째 이따금 이 영화를 떠올리는 이유가 따로 있다.

이 영화가 개봉한 2013년 어느 날, 한 고등학교 동창이 소셜미디어에 영화 감상평을 올렸다.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략 이런 식이었다. “이 영화 절대 보지 마라. 최악이다. 너무 무섭다.”

<엘리멘탈> 웨이드처럼 눈물이 많으면

나는 감상평을 보고 너무 궁금해서 동창에게 댓글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무서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이 영화 무섭다고 홍보한 것을 보고 무섭겠다는 기대를 하며 공포영화를 보러 갔을 텐데 너무 무서워서 최악이라고? 이해가 안 된다.” 여기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너무 무서워서 기분이 나쁘더라.”

잘 만든 공포영화의 무서움과 기분만 나쁜 공포영화의 무서움은 당연히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말로 잘 표현할 방법을 모르면 내 동창의 댓글 같은 이상한 혹평이 나온다. 기분이 나쁘면 왜 기분이 나쁜지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니까, 다만 마음속에 새겨진 ‘무서움 → 기분 나쁨 → 나쁜 영화’라는 공식을 일차원적으로 표현하면서 ‘무서워서 비추(비추천)하는 공포영화’라는 황당한 명제가 탄생했다.

사실 나에게도 약간은 반성하게 한 일화였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도 할 수 있는 말이 지극히 한정적이다. 이거 재밌다, 혹은 재미없다. 대박이다. 지루하다. 영화가 됐건 음악이 됐건 다양한 문학적 수사를 다듬어가며 텍스트가 유발하는 감응, 그리고 그것을 접했을 때 내 감정 변화가 어떠한지 등을 자세히 기술할 줄 아는 사람이 매우 부럽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느낌을 어떻게든 말로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에 나는 매우 서툴고 어색하다. 요즘 들어 흔히 보이는, MBTI(성격유형검사)를 세속적으로 수용하며 과몰입하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을 두고 ‘전형적인 T형 인간’이라고 할 듯하다.

유행어처럼 일컫는 ‘T형 인간’은 ‘감수성이 메말랐다’라는 말의 ‘요즘 식’ 대체어다. 감수성에 대한 대중의 세속적인 이해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의 물 캐릭터 웨이드처럼 약간의 자극만 있어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전형적으로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다. 혹은 환경·기온·습도의 변화나 개인이 처한 상황, 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기분이 큰 낙차로 바뀌며 잘 웃다가도 쉽게 화내는 사람에게는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비해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사람, 감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 표정 변화가 작은 사람에게는 감수성이나 감성적이란 말이 잘 붙지 않는다. 나는 이 감수성에 대한 세속적인 이해를 반대로 해석해보고 싶다.


얼굴로 타인들과 감정 교류하는 인간

신체 기관 중 이동 범위가 가장 좁고 정적인 부분은 얼굴이다. 눈·코·입은 팔다리만큼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다. 얼굴은 못 움직이는 대신 가장 풍부한 표현력을 발달시켰다. 바로 표정이다. 표정은 사회적 기능을 한다. 현재 내 기분과 감정을 표정 변화로 남에게 드러내고 이해시킬 때 의미가 있다. 표정을 타인에게 보임으로써 머리가 비로소 얼굴이 되는 것이다.

생물체가 진화하는 것은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간극이란 외부로부터 신체가 받아들이는 자극에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지기까지 경로와 시간을 말한다. 신경과학자 로돌포 이나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내부화된 운동이다. 진화를 거치면서 생물체의 운동은 바깥으로만 표현되지 않고 일부가 안쪽으로 접혀 들어간다. 모든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대신 일부는 무시하고 일부는 약간의 지체를 두고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 지체에서 나름의 판단과 생각이 발생하며 이것이 곧 마음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이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면서 발생하는 자극과 반응 사이의 간극은 진화를 거듭하면서 복잡다단한 경로가 된다. 다만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생존에 유리하고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위험한 환경에 있거나 신체 조건이 그러한 생물체는 이 경로를 더 길게 형성하지 않는다. 곤충이나 파충류, 야생동물이 그렇다. 경로가 단순한 벼룩이라면 거의 모든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즉시 튀어오른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건드리면 도망가거나 사지를 휘두르지 않고,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판단하기 위해 뒤를 돌아서 누가 자신을 건드렸는지 확인부터 한다. 건드린 사람이 지인임을 알면 경계할 필요가 없음을 알고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지인이 아니라면 왜 건드리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가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말없이 계속 툭툭 친다면 어떻게 될까? 성질이 급한 사람은, 혹은 자극에서 반응으로의 경로가 비교적 단순하고 짧은 사람은 바로 공격성을 드러내며 손과 팔을 이용해 그를 밀칠 것이다. 경로가 길고 복잡한 사람이라면 그 순간에도 공격성을 드러내기를 참을 것이다. 몸과 사지는 가만히 있는 대신 얼굴은 붉어지고 일그러지며 미간에는 주름이 생기고 콧구멍은 커진다. 이렇게 표정으로써 분노의 표시를 대신한다.

외부 자극의 수용과 그에 대한 반응까지의 프로세스에서 일어나는 신체 변화의 해석을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깥으로 표현돼 식별 가능한 형태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공감되는 것이 느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얼굴로 타인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소통한다.

밈으로 자기 감상을 표현하는 사람들

인간의 소통에서 표정 같은 비언어적인 것이 중요한 만큼 당연히 언어의 중요성은 더 강조돼야 할 것이다. 유년기 이후 표정이나 기타 등등의 몸짓으로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이 때와 장소와 상황에 적절하지 않을 수 있기에, 언어로써 점잖게 설명하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이, 특히 젊고 어린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점잖고 고상하게 설명하고 표현하며 타인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충분히 훈련했는지 의심스럽다.

이들은 대부분 성장 과정에서 그런 능력을 훈련할 기회조차 충분히 제공받지 못했다. 이른바 감수성 교육은 예체능 실기 교육이나 (‘젠더 감수성’ 같은 용례의 맥락에서) 인권교육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영화든 음악이든 소설이든 어떤 대중문화 텍스트를 함께 접하고 감상을 공유하는 것이 감수성 훈련의 출발이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좋으면 왜 좋은지, 안 좋으면 왜 안 좋은지 친구에게 부족한 어휘력으로라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신이 텍스트에 대해 갖고 있는 감상을 남과 공유하려면 먼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텍스트를 접한 뒤 감성의 자극으로 말미암은 감정 변화를 의식적으로 성찰해야 타인과 말로써 공유할 수 있는 느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찰의 산물로서 느낌을 남들에게 설명하고 듣는 과정을 장기적으로 반복하다보면 자기 감정을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됨은 물론, 나의 그것과는 다른 타인의 감상에 대한 수용력과 이해력도 높아질 수 있다.

한국 학생들에게 이런 훈련을 받을 시간이 충분히 허락되는지 의문이다. 공교육의 의의가 수능 점수 높이기, 상위권 대학 진학으로 수렴되는 이상 감수성 교육은 시간 낭비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예체능 시간은 관련 전공 지망생을 제외하면 대부분 자율학습 시간으로 쓰인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감정 상태, 어떤 감상을 어설프나마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이른바 ‘중2병’으로 희화화되고 조롱 대상이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점점 더 많은 영유아가, 손에 스마트폰이 쥐여지면서 느낌을 주고받고 동일시할 매개체로서 타인의 얼굴을 볼 시간이 심하게 줄어든 채 성장한다는 점이다. 비언어적으로 느낌을 공유하고 소통할 창구인 얼굴이 차단된 채 성장하는 만큼 사회화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는 셈이다.

청년, 성년이 돼서도 문제가 심각한 것은 마찬가지다. 수많은 유튜브와 스트리밍 방송에서는 무언가가 좋아도 욕설, 싫어도 욕설이 나온다. 좋음과 나쁨은 극호와 극불호 혹은 극혐으로 극화하고 양극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콘텐츠만 보고 지내면서 사람들은 자극에서 반응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갈수록 단순해지며 감수성이 빈곤해진다. 또한 인터넷과 방송 등에서 유행하는 ‘밈’으로 어떤 감상의 표현을 대신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자극에서 반응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대신 남이 만들어낸 것으로 대체한 것과 다르지 않고 사실상 스스로 성찰하고 판단하기를 포기한 셈이다.

한국 사회 담론의 주파수가 흔들린다

쉽게 울거나 화내는 사람은 감수성이 풍부하거나 예민한 게 아니라 빈곤한 것이다. 자신의 감정 변화를 성찰하는 약간의 시간도 갖지 않고 곧장 그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감정 표현은 반사적인 반응이다. 건드리는 즉시 튀어오르는 벼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수성이 빈곤한 자들 각자의 울부짖음이 공명하면서 한국 사회 담론의 주파수에 엄청난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자신의 감상과 다른 감상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괴롭힌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것이 자기 비위에 어긋나는 약간의 결점이 있으면 자기 눈에 보여선 안 될 것으로, 더 나아가 존재해선 안 될 것으로 기각해버린다. 이런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내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지향점도 없다. 단지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무언가를 망가뜨리고 없애달라는 요구뿐이다. 감수성 교육을 괄시하고 방기해온 부작용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김내훈의 행재요화 1986호 이대남, MBTI…타인이 규정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다소 어색한 자리에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깰 수 있는 대화 소재 가운데 요즘 가장 유행인 것은 단연 엠비티아이(MBTI·성격유형 검사)일 듯하다. 굳이 “MBTI가 뭔가요?”라고 직접 물어볼 것도 없이 “제가 ‘I’라서 말수가 적은 편이에요”라고 한마디만 던져도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혈액형 4가지에서 16가지 유형으로

MBTI 열풍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궁금하다. 10년 전쯤 처음 들어본 성격유형지표는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식기는커녕 전 국민을 열여섯 부족으로 가르는 표준 같은 게 되고 있다. 직전까지 한국인을 지배했던 혈액형별 성격 진단에 비하면 4개 유형에서 16개 유형으로 늘었다는 사실에 고무돼야 할까?

이제는 지상파방송에서도, 한 출연자가 “나는 ‘T’야”라는 말을 던져도 제작진이 굳이 MBTI를 설명하는 자막을 달아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문제라는 인식이 은은하게 깔린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정도로 대세가 됐다.

나는 이런 열풍에 괜히 심술이 나서 누군가가 내게 MBTI가 뭐냐고 물으면, 내 실제 성향과 정반대에 있는 유형으로(예컨대 타인의 감정에 무심하며 냉철하고 신랄하다고 알려진 INTJ라고) 대답하는 악취미가 생겼다. MBTI를 맹신하는 사람은 내 대답을 듣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며 몹시 혼란스러워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즐거워한다.

뭐든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이 전 국민의 성격을 과거에 4개 유형에서 지금은 훨씬 많은 16개 유형으로 나누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고무적이라고는 했지만, MBTI가 유행하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요즘 들어 다시 분류법이 4개로 축소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E, I, F, T로 말이다.

E(Extrovert)와 I(Introvert)는 각각 외향형과 내향형을 의미한다. 마음의 에너지가 신체의 외부로 향하냐 내부로 향하냐에 따라 나뉜다. 마음의 에너지라는 것이 어느 쪽을 향하는지는 겉으로 보이지 않을진대, 일반적으로 대중은 이를 세속적으로 해석해 사교적 성격이면 으레 E, 내성적 성격이면 I로 분류한다. 다시 말해 말이 많고 적극적이고 활발하면 자동으로 E가 되고, 말수가 적고 소극적이고 차분하면 I가 되는 게 자연스럽다.

F(Feeling)와 T(Thinking)는 각각 감정형과 사고형을 의미한다. 감정형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며 그때그때 상황에서 ‘좋다’와 ‘나쁘다’의 판단을 선호하는 성향을 말한다. 사고형은 사실과 진실에 관심을 두고 상황보다는 자신이 세운 규범에 맞춘 ‘옳다’와 ‘틀리다’의 판단을 선호하는 성향이다. 이 성격유형 분류 역시 대중에게 폭넓게 소비됨에 따라 세속적으로 수용되면서 ‘감정적이냐 이성적이냐’라는 임의의 기준으로 ‘F형 인간’과 ‘T형 인간’으로 분류됐다. 이 분류법은 갈수록 더 단순해지면서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F, 시큰둥한 사람은 T, 눈물이 많은 사람은 F, 감정 동요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은 T라는 식으로 소비된다.

우스꽝스럽게 정형화되는 성격유형

E(외향형), I(내향형), F(감정형), T(사고형) 성격유형은 인터넷 게시물과 유튜브, 텔레비전 방송 등에 의해 다소 우스꽝스럽게 정형화된다. 내향형 인간은 소극적이고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능동적으로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다만 외향형 인간에게 간택받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외향형 인간은 밖에선 초면인 사람과도 몇 분 안에 막역한 사이가 될 수 있는 엄청난 친화력이 있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감정형 인간은 옆 사람의 감정 상태에 그대로 동기화하고, 자기 의견이 반박되면 자신이 부정된 것처럼 받아들이는 정서적 과잉의 존재로 그려진다. 사고형 인간은 눈치 없이 분위기 깨는 말만 던지고 자신은 틀린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욕먹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어리둥절해하는 사회성이 전무한 존재로 그려진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에서는 이런 상상의 인물들로 만들어낸 가상 시나리오로 이른바 ‘vs 놀이’를 하는 것이 유행이다. 이를테면 한 쌍의 연인이 소통 과정에서 경험할 법한 갈등 상황을 두고 ‘서운하냐, 안 서운하냐’ 혹은 ‘A와 B 둘 중 누가 잘못했냐’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인다. 으레 ‘F와 T가 극명히 갈리는 상황’ 따위의 제목이 달려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성격유형에 맞춰 감정이입하면서 “서운하네” “누가 잘못했네”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유난을 떠네” 따지고 들다가, “내가 이래서 F/T와는 상종을 안 한다”는 댓글까지 달리며 감정적 소모전으로 치닫는다. 공감해주지 않고 사실을 건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면박을 주며 “××, 너 T야?”라고 하는 것도 지구력 있는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MBTI에 전혀 무관심한 사람들마저 적어도 자신의 MBTI가 E 혹은 I로 시작하는지, F인지 T인지 정도는 자력으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성격유형에 대한 풍자적이고 만화적이기까지 한 인물 묘사를 대중매체로 끊임없이 지겹도록 접함에 따라 머릿속에서 알아서 정리되는 수준까지 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인 가운데 한 명쯤은 반드시 MBTI에 과몰입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대화 중 농담으로나마 “너는 전형적인 INTP야” “자주 지각하는 걸 보니 너는 P가 틀림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최근 몇 년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제는 MBTI 검사를 단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조차 인터넷과 텔레비전 방송, 일상의 대화에서 누적된 데이터를 정리해 자신의 MBTI 유형이 무엇인지 유추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MBTI처럼 ‘이대남’도 만들어진 이미지에 의해 실체가 정해졌던 것은 아닐까. 2022년 2월 정형화한 ‘이대남’ 이미지에 저항하며 피켓 시위를 벌인 또 다른 ‘이대남’들. 김진수 선임기자

MBTI처럼 ‘이대남’도 만들어진 이미지에 의해 실체가 정해졌던 것은 아닐까. 2022년 2월 정형화한 ‘이대남’ 이미지에 저항하며 피켓 시위를 벌인 또 다른 ‘이대남’들. 김진수 선임기자

검사하기 전에 알게 된 성향

여태껏 유행에 둔감해서, 혹은 일부러 유행을 거부하며 MBTI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이제야 비로소 재미 삼아 간소화된 무료 MBTI 검사를 받은 사람을 상상해보자. ‘영화, 소설 등에 공감하며 눈물을 잘 흘린다’ ‘인정에 끌리지 않고 냉정한 편이다’ ‘낯을 가리지 않고 금방 친해진다’ ‘나는 설득적이고 사람들을 잘 이해시킨다’ ‘한곳에 얽매이기 싫어한다’ ‘변화하는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따위의 문항을 보면서 그는 평소 지인에게 많이 들은 이야기, 대중매체에서 접한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예를 들어 ‘눈물이 많지 않은 사람은 대체로 T 성향이다’라는 명제를 여기저기서 꾸준히 접했고 친구들로부터도 “너 T야?”라는 말을 여러 차례 들은 사람이라면 ‘나는 감성적인 편이다’ ‘공감을 잘한다’ 유의 문항에 ‘전혀 그렇지 않다’를 자동으로 택할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 예를 들자면 친구 여럿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수가 적고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I 같다’ ‘넌 I잖아’ 등의 말을 수없이 들었을 테다.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내향형 인간이 수동적으로 남이 말을 걸어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것을 지겹도록 접하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MBTI가 I로 시작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상태에서 MBTI 검사에 임하면 I의 특성으로 알려진 것을 암시하는 모든 문항에 ‘매우 그렇다’라고 체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기 어렵다. 자신의 성향과 성격을 스스로 성찰하기보다는 바깥에서 타인이 만든 명제에 맞춰 자기를 진단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격유형 검사에 임하다보면 요즘 흔히 말하는 ‘과몰입’에 빠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애초 자신의 성격유형이 이러저러하리라 짐작한 것에 맞춰 문항들에 체크한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생각한 성격유형대로 결과가 안 나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피검사자는 다만 스스로 성찰했다고 착각한 자기 성격이 그대로 설명된 검사 결과를 보고 아주 정확하게 나왔다며 감탄할 따름이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더 간소화되고 희화화된 MBTI 검사를 접하며 반복해서 본인의 성격유형이라 진단된 네 알파벳은 머릿속에 단단히 각인되며 자신의 정체성 일부로도 자리잡게 된다.

도출된 결과가 모여 실체가 구성되다

방송에서 들리는 MBTI에 관련한 말들,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에서 무수히 생산되는 관련 게시물 등의 언표가 모여 형성된 담론의 영향력은 한 개인의 정체성 일부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우리가 실체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정체성도 일부나마 MBTI와 흡사한 방식으로 당대 담론에 의해 구성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다.

예컨대 ‘이대남’이라는 정체성 역시 담론의 산물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십 대 남성 유권자가 국민의힘 후보에게 몰표를 주다시피 했던 2021년 재보궐선거 이래 언론은 끊임없이 귀에 박히도록 ‘청년의 분노’ ‘이대남의 분노’ ‘진보에 등 돌린 이대남’ ‘분노의 스윙보터’ ‘보수화된 이대남’ ‘분노한 이대남을 되찾기 위해 해야 할 것’ 등의 보도를 쏟아냈다.

이렇듯 쏟아지는 이대남 담론 세례에 이십 대 남자들은 가랑비에 옷 젖듯 물들면서 정치를 바라보는 시선,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을 주체적으로 정하는 대신, 타인(언론과 정치인들)이 임의로 만들어낸 명제(‘너희는 보수화됐다’)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세대 간, 성별 간 차이를 조사하는 이러저러한 설문조사에 응하면서 도출된 결과들이 모여 ‘이대남’이라는 정체성을 하나의 실체로서 구성해냈다.

김내훈의 행재요화 1482호 참을성 없는 사회에서 '맑눈광'이 되다

 한 토론 플랫폼 사이트에서 ‘엠제트(MZ)세대, 정말 유별난 걸까요?’라는 설문조사를 봤다. 응답 항목은 세 개가 있었다. (1) MZ세대만의 유별남이 분명히 있다. (2) 기원전부터 시대마다 유별난 세대는 항상 있었다. (3) MZ세대는 사회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나는 1번 문항에 체크했다. 나와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은 18명이었고 2번과 3번 문항에 체크한 사람은 각각 73명과 55명이었다.

답변 항목은 세 개지만, 사실상 ‘예/아니요’를 묻는 말이며 2번과 3번 항목이 ‘아니오’에 해당한다. 조사에 응한 146명 중 128명이 ‘아니오’라고 답한 셈이다. 또 어떻게 보면 질문부터가 이미 ‘아니오’를 유도하고 있다. 이렇게 답이 정해진 질문에 나는 괜히 열 받아서 ‘예’를 고른 것일 수도 있다. 내가 MZ세대라서 그런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MZ’라는 세대 호명에 관한 비판은 이미 많이 나왔다. 마케팅 차원의 호명에 불과하다느니, 게으른 범주화라느니, 세대 내 개성과 차이가 너무 뚜렷하고 크기 때문에 한 집단으로 묶일 수 없다느니, 부정적 낙인의 기표라느니,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에 대한 타자화와 차별의 시선이 깃든 말이라느니 하는 반론은 어디서든 쉽게 읽을 수 있거니와 너무나 당연하게 다 맞는 이야기라 이제 와서 여기에 한마디 더 얹어봤자 큰 의미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지금은 ‘MZ세대론’에 대한 비판론이 워낙 많다보니 나는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내가 MZ세대라서 그럴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대체어 MZ세대

MZ세대가 1980년생에서 2000년대생까지를 망라하는 용어며, 한국에서만 쓰이는 용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범위가 20년을 훌쩍 넘는 세대 호명의 유효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MZ세대라는 말이 정말로 1980년생부터 2000년생까지 모두를 가리킬 때 쓰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다 알고 있다. 사실상 MZ세대는 ‘요즘 젊은이들’ ‘요즘 사람들’의 대체어와 다름없다.

내가 ‘MZ세대, 정말 유별난 걸까요?’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것은 이른바 ‘유별나다’라는 것이 세대적인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MZ세대의 지시 대상인 ‘요즘 사람들’을 ‘요즘을 사는 사람들’로 풀어서, 지금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유별나다는 것이다. 다만 MZ세대, 젊은 사람들이 윗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유난스러운 모습을 노출할 따름이다. 그 ‘유난스러운 유별남’을 하나의 명제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시공간의 좌표가 하나의 점으로 쪼그라들었다.’

현재에는 거의 논박됐지만 뇌의 진화 과정이 세 단계로 나뉜다고 말하는 유명한 뇌과학 학설이 있다. 먼저 파충류의 뇌(뇌간)에서 포유류의 뇌(변연계)로, 그 뒤에 영장류의 뇌(신피질)로 발달한다는 것이다. 도마뱀을 떠올려보자. 가만히 서 있는 도마뱀을 손가락으로 아주 살짝 건드리면 그 즉시 잽싸게 달려간다. 반면 길거리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건드렸을 때 위협적인 모습을 취하지 않는 한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영장류의 뇌로 갈수록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신체의 반응과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의 경로와 시간이 길어진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특수한 경우가 있다면 운동선수나 특수요원처럼, 돌발상황에 지체 없이 반응하고 대처하기 위해 외부 자극에서 신체의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훈련으로 다시 단축하기도 한다. 어찌 됐건 신피질을 발달시킨 인간이라면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생각한다. 길거리를 걷다가 돌연 어떤 사람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았을 때, 일단은 돌아서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때렸는지 파악부터 하고 화를 내든 뭘 하든 행동은 그 뒤에 한다.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면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시선이 지금 당장의 나에게로 쏠린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연대란 언감생심이다.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 뒤 유가족은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는 비아냥에 맞닥뜨렸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모든 시선이 지금 당장의 나에게로 쏠린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연대란 언감생심이다.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 뒤 유가족은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는 비아냥에 맞닥뜨렸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정보 입력에 대한 반응이 혐오와 폭력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경우처럼 상당한 정도의 불쾌감을 일으키는 외부 자극은 여러 형태로 불시에 찾아온다. 이것들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느냐가 문명화와 사회화의 척도일 수 있겠다. 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 상식 밖의 것,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을 접할 때 정보(자극)의 입력에서 그에 대한 반응과 행동으로까지 출력되는 경로가 얼마나 복잡한지 단순한지에 따라 포용과 관용이 될 수 있고 혐오와 폭력이 될 수 있다. MZ세대를 필두로 한국 사회는 전반적으로 후자로 기울고 있다.

‘참교육’이라는 말이 폭력적인 용례를 거치면서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요즘 사람들’의 불관용을 방증한다. 1년 전 40대 남성이 제주행 비행기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면서 그 자신이 아기 울음소리보다 더 시끄럽게 굴며 난동과 행패를 부린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갓 돌이 지난 아기가 불편하고 낯선 장소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당연하다. 아기의 보호자인 부모도 당혹스러웠을 것이 당연하며 40대 남성 역시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끄러운 울음소리라는 불쾌한 자극에서 그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그러한 고려는 없었다. 그는 곧장 참지 못하고 부모를 향해 폭언을 퍼붓고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건드린 즉시 높이 튀어 오르는 벼룩처럼,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무언가를 접한 즉시 반사적으로 그것에 대한 응징과 공격성으로 급발진했다.

현재 M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참교육’이라는 말은 내 기분을 언짢게 한 것에 대한 가혹한 응징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또 다른 말로 ‘사이다’가 있다. 본래 사이다는 권력의 위계에서 나보다 상층에 위치한 사람의 갑질에 기민하고 재치 있게 대처하는 상황을 두고 ‘시원하다’며 쓰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당장 내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에 대한, 폭력이나 폭언을 동반한 즉각적인 응징의 대명사로 변질했다. 사이다를 끼얹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없다. 어린이가 될 수도 있고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

반사적 거부가 당연한 권리로

이런 식으로 맥락 파악이나 관용과 이해, 고려와 배려는 일절 없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한 상대를 기어코 응징하고야 말겠다며 달려드는 사람들, 다시 말해 반성(성찰)은 없고 반사만 남은 사람들에게 시간이란 없다. 남은 것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기분뿐이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가 당시 청년들을 두고 이들의 경험에서 시간이 극소한 조각으로 잘려져 있고, 시간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종합하지 못한다고 진단했던 것이 현재 한국에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으로 축소됐음을 드러내는 또 다른 것으로 ‘욜로’(YOLO·You Only Live Once), ‘탕진’ ‘묻고 더블로 가’ ‘노빠꾸’ ‘좋빠가’(좋아 빠르게 가)로 이어지는 유행어의 흐름이 있다. 하나같이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앞뒤 재지 않는다’ ‘미래를 신경 쓰지 않는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잃을 것이 없다’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로 함축된 말이다. 내가 지금 행하는 어떤 일이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나중에 어떤 후폭풍으로 돌아올지 고려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공간의 좌표 역시 ‘나’라는 점으로 축소됐음을 드러내는 징후를 읽을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고려와 배려, 위신이나 체면에 대한 일체의 고려가 단지 ‘나’에게 집중됐다는 말이다. 조금이나마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상대에 대한 공격성으로 급발진하는 것은 주변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신경 쓴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위선이 지고의 악으로 설정돼버린 오늘날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서 점잖은 척하며 예의를 갖추는 것은 위선으로 기각된다.

더욱이 한국 사회의 ‘롤모델’ 형상이 붕괴하면서 기성세대와 꼰대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전통과 문화로부터 단절을 시도하는 등 ‘탈꼰대’를 위한 전방위적 반성이 진행됐다. 물론 이것은 겉으로만 보이는 제스처의 차원에 머물렀지만, 젊은이 사이에서 갑작스러운 단절과 전환이 속도조절 없이 이뤄지면서 적잖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과거로부터 전해져온 가치와 규범을 반사적으로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이 당연히 주어진 권리인 양 경거망동하는 ‘맑은 눈의 광인’(맑눈광)이 양산됨에 따라, 일체의 사회생활에 그 어떤 상황이나 행동 등에 대한 평가와 판단의 근거가 최종심급으로서 법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틀린 얘기 한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욕먹어야 하냐’며 구시렁대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공동체의 사회적 의례와 관습은 사라지고 당장의 기분만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면서 갈수록 참을성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거대한 퇴행 선도하는 ‘연대 없는 공감’

모든 시선이 지금 당장의 나에게로 쏠려 있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에서 연대란 언감생심이다.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며 비아냥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이들의 강력한 응징의 정서가 누적되고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연대 없는 공감’은 거대한 사회적 퇴행을 선도하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가 어떤 장애물에 의해 가로막히면, 그에 대해 단지 악쓰며 분노를 표하기만 하면 보호자가 나타나서 장애물을 치워줄 거라 기대하는 유아기로의 퇴행 말이다. 그 보호자를 자처하는 정치인이 나타나면 퇴행 자체가 곧 정치가 될 것이다.

김내훈의 행재요화 1478호 보수에 유리한 화두…‘정쟁’이 아니라 ‘정치적 쟁점화’다

 김내훈의 행재요화 1478호

보수에 유리한 화두…‘정쟁’이 아니라 ‘정치적 쟁점화’다청년’과 ‘공정’처럼 보수에 유리한 화두로 논쟁… 진보 일부도 ‘정쟁’ 부정적으로 써 정치혐오 확산에 일조

등록 2023-08-24 18:30 수정 2023-08-27 08:38
난을 규명하려는 시도에 ‘정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보수의 노력으로 ‘정치’와 ‘정쟁’은 거의 이음동의어가 됐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난을 규명하려는 시도에 ‘정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는 보수의 노력으로 ‘정치’와 ‘정쟁’은 거의 이음동의어가 됐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어떤 이와 언쟁할 때, 형식적 토론이든 감정 섞인 말싸움이든 내가 완벽한 승리를 거뒀음을 알리는 신호는 따로 있다. 상대가 횡설수설하며 다른 주제로 바꾸려 할 때? 갑자기 욕할 때? 이보다 더 확실한 신호가 있는데 바로 상대방이 무슨 말을 더하건 자신도 모르게 내 논거를 강화하는 모양새가 될 때다. 이 경우 비로소 내가 이겼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상대방은 나름대로 자신의 논거를 더하려 말을 더 얹지만 그때마다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깐?”이라고 받아치면 상대방은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고 꼼짝없이 패를 인정하거나 자리를 엎고 떠날 수밖에 없다.

철의 여인으로 불린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AP연합뉴스

철의 여인으로 불린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AP연합뉴스

대처의 헤게모니적 승리는 블레어

쉽게 경험하거나 목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언쟁의 핵심이 되는 특정 어휘의 정의를 내가 의도한 대로 정해두고 언쟁을 진행하면 계속해서 유리한 논점을 선점할 수 있다. 여기에 고도의 논박 기술을 더한다면 상대방이 알아서 내 주장을 대신 해주게 할 수 있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상황을 유도하는 것이다. 언쟁 상대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려 이러저러한 말을 덧붙이지만 핵심 단어가 한쪽에 유리하게 정의된 이상 언쟁이 길어질수록 한쪽 주장만 반복되는 형편이 된다. 이런 형편이 되면 언쟁을 중단하거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문제의 어휘 정의부터 다시 합의해야 한다.

앞의 상황을 좀더 거창하게 표현해보면 ‘헤게모니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폭력을 동원한 협박이나 강제 없이,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가 알아서 자발적으로 하게 했을 때 헤게모니적으로 승리했다고 말한다. 상대는 스스로 그것을 원했을 수도 있고, 혹은 원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든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머리를 굴리며 행동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이때 상대를 완벽히 굴복시켰다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언젠가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직에서 퇴임하고 한참 뒤에 자신이 남긴 가장 훌륭한 유산이 무엇이라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이라고 대답하면서 ‘우리의 적이 마음을 바꾸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도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납세자’와 ‘소비자’를 위한 정치를 표방하며 ‘중도 합의’로 가는 ‘제3의 길’ 모델을 성숙한 민주주의 정치를 위한 유일한 모델로 내세웠다. 합의를 제외한 일체의 투쟁과 적대는 스스로 ‘구태정치’로 기각했다. 블레어와 신노동당은 대처의 정치에 대항하던 최대 세력으로서,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바로잡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더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수당으로서는 실각 이후로도 계속 자신들의 의제를 관철할 수 있었다. 상대 정당이 그 일을 대신 해주게 만듦으로써 말이다.

정치에서 헤게모니를 어느 세력이 쥐고 있느냐는 어느 진영 혹은 정당이 더 높은 지지율과 더 많은 의석을 보유하느냐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문제다. 현재 국민의힘을 위시한 보수세력은 의석수가 더불어민주당에 많이 밀리는 형편이고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수준이지만, 헤게모니적으로는 보수세력이 완벽히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가 됐던 몇몇 핵심 단어의 정의가 보수세력이 정한 채로 논쟁이 이어지고 담론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 핵심 단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청년’과 ‘공정’이 있다. 두 단어는 어마어마한 중력을 갖고 있기에, 어떤 논의에서건 청년과 공정이 거론되면 두 단어를 둘러싼 언쟁으로 흘러가버린다. 흡사 블랙홀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출발점부터 보수세력에 매우 유리하게, 그러니까 주제가 되는 단어의 정의부터가 보수세력이 정한 상태에서 논쟁이 진행되기 때문에 논쟁이 길어질수록 결국 보수주의의 의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정치질’ ‘정치적 논리’, 정치혐오의 확산

당대의 중요한 어휘를 둘러싼 헤게모니 전쟁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다름 아닌 ‘정치’라는 단어가 철저히 보수세력에 유리하게 정의됐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에서 유구한 역사의 정치혐오와 맞닿아 있다. 이해하기 쉽게 우리가 일상에서 ‘정치’라는 말을 어떻게 쓰는지 생각해보자. ‘정치질’이란 말을 흔히 쓴다. 어떤 조직에 속한 사람이, 자신의 극히 사적인 영달을 위해 권력자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아첨을 떤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음해 공작으로써 조직에서 퇴출되게끔 유도하는 따위의 행태를 두고 으레 ‘정치질한다’고 표현한다. 이렇듯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에게 ‘정치’라는 말이 연결될 때는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한 사람의 인성이나 경향을 묘사할 때 ‘정치적’이란 말이 붙으면 그의 인성이 아주 훌륭하리라는 기대는 일단 접고 본다.

정치혐오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강조해야 하는 까닭은 다름 아닌 직업정치인 사이에서도 정치라는 말이 부정적 맥락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의 정치인이 정치를 부정적 의미로 쓰는 것은 사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과거 이명박이 어느 논란이 되는 사안이건 항상 입버릇처럼 ‘정치적 논리로 접근하지 말라’고 했던 이래, 보수 진영은 꾸준히 정치에 부정적 인상을 덧씌우며 정치혐오와 무관심을 자양분 삼아 쪼그라들다가도 다시 세력을 불리기를 반복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진보 진영마저 정치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진보 진영에서 ‘정치’에 관해 어떤 말을 하든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진보 진영은 자기 손으로 보수 진영의 코를 대신 풀어주고 있다.

진보 진영은 정치혐오 확산을 경계하면서도, ‘정쟁’과 ‘정쟁화’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씀으로써 의도치 않게 정치혐오 확산에 일조하고 있다. ‘정치’와 ‘정쟁’을 구별해서 후자만을 규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2022년 태풍 ‘힌남노’ 피해와 이태원 참사부터 2023년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잼버리 파행까지, 예방될 수 있었던 인재와 파행에 대해 책임소재를 규명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보수 진영과 언론이 집요하게 정쟁 프레임을 씌운 끝에 사실상 ‘정치’와 ‘정쟁’은 이음동의어가 됐다. 현재 정쟁이란 말은, 묻히면 ‘순수성’을 떨어뜨리는 오염물질 비슷한 것으로 이용된다. 그렇다면 ‘정쟁’과 구별되는 올바른 ‘정치’는 무엇일까? 토니 블레어가 대처리즘에 굴복하며 내걸었던 ‘중도 합의’뿐일 테다.

2023년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파행으로 끝난 새만금의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 한겨레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2023년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와 파행으로 끝난 새만금의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 한겨레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우리와 적을 가르는 정치적 쟁점화

일반적으로 정쟁 혹은 정쟁화는 ‘정치 전쟁’ ‘정당 전쟁’으로 이해되고, 정쟁을 부정적으로 거론하는 사람들은 이런 이해를 유도한다. 정쟁이란 말의 정의를 ‘정치적 쟁점화’로 바꿔야 한다. 정치적 쟁점화는 특히 오늘날과 같이 분노, 슬픔, 열패감, 원한이 곳곳에서 동시다발로 터져나오는 시기에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 비슷한 참극이 연이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지, 어떤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지,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면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따져보고 조사해야 한다. 이러한 논의와 작업을 일반인 개인들이 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에 시민단체, 활동가, 정당이 개입한다. 이렇게 피해자 대신 목소리를 내어 쟁점을 제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당국에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정치적 쟁점화’다.

정치적 쟁점화는 당연히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책무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이토록 중요한 정치적 쟁점화는 ‘정쟁’이라는 말로 축소되고 부정된다. 정치인더러 정쟁화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정치를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이런 이야기가 일부 진보 진영에서 나온다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다. 본인들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떤 사안에 관해 ‘정쟁’이란 말을 꺼내는 순간 그 사안에 결부된 일체의 진상규명, 문책의 시도가 정쟁이란 말에 빨려 들어가고 소거돼버린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할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이다. 이 규칙은 그 누구도 피하기 어렵다. 담론이 그렇게 구성됐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 쟁점화는 경계를 설정한다. ‘우리’와 ‘우리의 적’을 가르는 경계 말이다.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시스템을 허술하게 만든 사람들, 멀쩡한 시스템을 제대로 운용하지 않은 사람들 등이 우리의 적이다. ‘우리’는 우리 적의 무능함으로 인한 분노와 슬픔을 공유하고 그들을 문책하고 단죄하고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요구하는 목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결집한 결사체다. 자연히 정치적 쟁점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당파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쟁’의 인상을 순수함을 해치는 불순물로 간주하고 당파성을 배제한 ‘탈정치’를 표방하면 도처에서 터져나오는 분노·슬픔·애도·원한은 결집하고 주체화하지 못한 채 산만하고 얄팍하고 분산된 상태로 부유하기만 한다. 분노 등의 감정이 누적되면서 많은 사람이 공감은 하되 정치적으로 집결하지 않으면 당장 눈앞의 이웃에게 모든 감정이 향하게 된다. 지금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존재, ‘갑질’ 손님과 학부모, 공중도덕을 학습하지 못한 어린이와 어린이를 훈육하지 않은 ‘맘충’ 등 일반인 개개인들에 대한 가학적인 응징과 단죄로써 카타르시스에 흠뻑 젖고 만족하고 끝나는 것이다.

양비론은 공허한 우월감될 뿐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는 주변화되고 목소리 없는 존재의 고통 증언을 정치화하려 했다. 일부 진보 진영에서 ‘정쟁’을 규탄하는 것은, 이 명제에 맞춰 ‘정치’라는 것을 대의제 및 제도권 의회 정치를 넘어선 새롭고 더 넓은 개념의 무언가로 상상하려는 시도라고 선해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공적 담론이 사적인 기분과 개인들의 민원으로 용해돼버린 포스트정치, 탈정치 시대에 정쟁을 규탄하고 양비론으로 양당을 비판해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공허한 우월감뿐이다.

김내훈의 행재요화 윤석열 대통령은 ‘카르텔’ 단어 왜 남발할까 2023-07-13

 김내훈의 행재요화 윤석열 대통령은 ‘카르텔’ 단어 왜 남발할까

세계를 파악·설명하는 단어 풀이 협소한 사람은 세계관도 좁다
등록 2023-07-13 22:28 수정 2023-07-18 20:00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7월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관련 회의에서 “공정하고 정당한 보상체계에서 얻어지는 이익과 권리가 아닌,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구축해 이권을 나눠 먹는 구조는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7월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 관련 회의에서 “공정하고 정당한 보상체계에서 얻어지는 이익과 권리가 아닌, 자기들만의 카르텔을 구축해 이권을 나눠 먹는 구조는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재밌는 것을 봤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신앙심 깊은 한 친구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증거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물이 정확히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는다. 달이 지구를 한 달에 한 바퀴 돈다.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정확히 1년 걸린다. 해당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어이없어 반박하려다가 피곤하기만 할 것 같아서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우연성 부정하는 지적설계론

당장 듣기에도 굉장히 어리석은 주장이다. 어느 재치 있는 누리꾼은 ‘32도에 물이 얼고 212도에 물이 끓는 악마의 땅이 있다’는 댓글을 달기도 했다. 화씨 단위를 쓰는 미국 이야기다. 과연 실제 있었던 대화일까 의심될 정도로 황당하지만 어쨌건 교회 다니는 친구가 했다는 이야기를 최대한 좋게 해석한다면 이른바 ‘지적설계론’의 핵심 논거를 보여준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지적설계론의 핵심은 우연성의 부정이다. 말인즉 ‘왜 하필 그렇게 돼서’ 지금 우리가 아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었냐는 의문에서 출발해 최종 배후에 어떤 개입이 있었으리라는 결론을 내는 것이다. 예컨대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유전자 배열이 조금만 달랐어도 생명체가 제 기능을 전혀 못했으리라는 것이다. 특히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차원에서 사소한 부품이 하나라도 바뀌면 완전히 달라지는 이런 구조가 우연적인 진화 과정으로 생성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는 논리다.

지적설계론은 앞에서 말한 독실한 교인 친구가 했다던 주장을 세련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지적설계론을 극도로 세속화하면 ‘어떻게 그리 딱 맞아떨어지느냐’라는 경탄만 남는다. 지적설계론을 논파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앞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물이 신기하게도 0도에 얼고 100도에 끓는다는 데 경탄해 마지않는 논리에서 담론이 기능하는 바의 알레고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년이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을 세는 단위라는 사실은 초등학교만 나오면 다 알 수 있다. 섭씨 0도와 100도는 얼음이 녹는점과 물이 끓는점에 기준을 두고 그 사이를 100등분한 것이라는 사실 역시 여기에 쓰기조차 민망한 일일 따름이다. 앞의 독실한 친구가 이 상식을 배우지 않았으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다만 저 상식을 완전히 반대로 해석한 탓에 혼란에 빠진 것이다.

자연현상이 먼저 있고 그 뒤에 그것을 분절하는 과학적 단위가 있다. 시간을 나누는 단위든 공간을 나누는 단위든 에너지를 나누는 단위든 오랜 세월의 과학사를 거치면서 합의된 것들이다. 사람들이 세계를 함께 인식하고 그로써 소통할 수 있으려면 세계를 분절하는 단위를 합의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은 마디가 없는 연속체로 돼 있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무엇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무엇인지 원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예컨대 지구가 한 바퀴 자전하는 시간을 차이 속의 동일성으로 묶어 1일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을 사고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시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개 색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디나 경계가 없이 이어진 연속체의 스펙트럼을 인위적으로 분절한 결과다. 그리하여 우리는 누군가가 빨간색이라고 하면 가시광선의 어느 파장의 범위를 가리키는지 대체로 소통이 가능하다.

앞의 독실한 교인 친구는 어릴 적부터 학습한 자연과학의 단위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체화한 나머지 원래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착각하는 데 이르렀다. 그래서 먼저 있는 단위에다 온갖 자연현상을 끼워맞춰 보니까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완벽하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그리 신비롭고 성스러웠던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려면 언어를 통해야

내가 사는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를 분절한다는 것이다. 외국어를 새롭게 공부할 때를 상기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전혀 모르는 외국어를 처음 들을 때는 어디까지가 한 문장이고 어디부터가 다음 문장인지도 알 수 없이 외국어 육성이 한 뭉텅이로 나에게 다가와서 충돌한다. 하지만 학습을 거듭하다보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어디서 문장이 끝나고 다음 문장이 시작하는지 알게 되고, 그 뒤로는 한 문장에서 어디가 주어고 어디가 술어인지, 어디까지가 한 단어고 어디부터 그다음 단어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언어를 이해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세계를 분절하는 단위는 소통의 근간이 아닐 수 없다. 개인 간의 소통을 넘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담론이 있어야 하고, 담론이 사회의 단위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담론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둘이 함께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땅에 인간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돌이라고 일컫는 그 대상들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돌’이 아닐 것이다. …다른 대상들과 구별할 수 있는 언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인즉 ‘돌’이라는 언어가 없다면 그것을 땅바닥이나 모래, 공기 같은 것들로부터 구별하기가 불가능하기에, 돌같이 생긴 그 어떤 것은 있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돌인지 알 수 없으므로 ‘돌’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돌과 같이 단순한 대상조차 담론 언어의 망을 경유해서만 파악되고 설명될 수 있다.

사물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의미로 다가오지 못한다. 대상을 본다는 건 언어의 망을 통해 그것을 분절해서 사고한다는 것이다. 이 언어의 망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생물학적 특질로 주어진 것에 더해 성장 과정에서 가정교육을 통해, 공교육을 통해, 대중매체와 언론의 메시지 수신을 통해 형성된다. 즉, 내 언어의 망은 사회의 지배담론에 종속된 채 형성된다. 그러나 더 많은 독서와 공부로써 비판의식을 함양하고 다양한 예술문화를 접함으로써 독특한 감수성을 기른다면 범인의 일률적 언어 망에서 약간은 이탈한 자기 고유의 그것을 육성할 수도 있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수능 킬러 문항 배제’ 발언이 논란이 되자, 교육 당국과 사교육 업계의 카르텔을 문제 삼았다. ‘사교육 카르텔·부조리 신고센터’를 여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교육부 관계자들이 2023년 6월30일 서울의 한 대형학원을 합동 점검하고 있다. 교육부 제공

윤 대통령은 자신의 ‘수능 킬러 문항 배제’ 발언이 논란이 되자, 교육 당국과 사교육 업계의 카르텔을 문제 삼았다. ‘사교육 카르텔·부조리 신고센터’를 여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교육부 관계자들이 2023년 6월30일 서울의 한 대형학원을 합동 점검하고 있다. 교육부 제공

다독으로 ‘해상도를 높인다’는 말

독서와 공부를 다양하게 많이 할수록 시야를 넓힌다는 말이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표현은 ‘해상도를 높인다’라는 말이다. 동일한 사물을 보여주는 이미지일지라도, 해상도 높은 이미지가 해상도 낮은 이미지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담고 있듯이, 똑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높은 해상도를 가진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언어의 망’이라는 것은 더없이 적절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그물망이 듬성듬성하게 만들어지면 그물코가 너무 크기 때문에 거대한 덩어리가 아닌 작은 것은 그물에 잡히지 않고 흘러가버린다. 그에 반해 그물망이 촘촘하면 작고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끌어올릴 수 있다.

그물망을 더 촘촘하게 하는 것이 강한 어휘력이다. 어휘력이 빈곤하다면, 무언가를 설명하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는 만큼 그 무엇에 대한 이해도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감정을 예로 들 수 있다. 좋음과 나쁨의 감정 사이에 아주 넓은 스펙트럼의 감정이 있고, 좋음과 나쁨의 양극과는 아예 무관한 미묘한 감정이 있다. 이 미묘한 것을 표현하는 어휘를 많이 알수록 자신의 감정 상태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어휘력이 빈곤하다면, 감정을 단지 좋다·싫다·이상하다로만 표현한다면 자신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예컨대 내가 살면서 전혀 접해보지 못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을 처음 봤을 때, 그 낯섦에는 미지의 것을 향한 약간의 불쾌함이 깃들 수 있다. 어휘력이 빈곤한 사람은 이것을 곧바로 나쁨이나 싫음으로 파악하고 혐오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세계를 파악하고 설명하는 단어의 풀이 협소하다면, 그의 세계관은 몇 개의 단어로 축소돼버린다. 그리고 그 몇 개 단어로 삼라만상이 일거에 설명될 수 있다는 이상한 확신이 따르게 된다. 앞서 이야기한 저 신앙심 깊은 친구와 비슷한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함에 빠져버린다.

어째서 ‘카르텔’ 단어에 꽂혔을까

최근 며칠 ‘카르텔’이라는 단어를 부쩍 많이 들었다. 사교육 카르텔, 시민단체 카르텔, 노조 카르텔, 정보기술(IT) 카르텔, 통신 카르텔까지, 유승민 전 의원의 말마따나 “대통령께서 카르텔이라는 말에 꽂혀서 아무 때나 막 오용 남용하시는 것 같다”. 아무 데나 다 갖다붙이니 카르텔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갈수록 알기 어려워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전히 카르텔의 정확한 정의와 범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은 한 단어에 유난히 꽂힌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어휘력의 기근 상태에서 윤 대통령은 낯선 대통령직과 정치를 수행하면서 여러 난관과 반발을 겪고 있다. 본인의 상식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다. 분명히 내가 옳은데 왜 반대할까. 그러다 최근에 카르텔이란 말을 배웠다. 옳거니, 내가 하려는 일에 반대와 반발이 따르는 건 모두 카르텔 때문이다. 이익을 독점하려는 특정 집단이 배후에서 여론을 왜곡하기 때문에 내가 하려는 일마다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윤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낮은 국정 지지율과 반대 여론이 카르텔이라는 단어 하나로 완벽히 설명됐다.

2025년 7월 8일 화요일

2023.1.14. 대놓고 나쁘니까, 배신도 기만도 없는 집권 세력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대놓고 나쁘니까, 배신도 기만도 없는 집권 세력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보수 진영의 ‘팬더링 프레임’

  • 수정 2023-01-14 16:00
  • 등록 2023-01-14 16:00
지난 6일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왼쪽)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 6일 국회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2차 청문회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왼쪽)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답변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팬더링’(Pandering)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상 의미는 뚜쟁이질, 즉 어떤 나쁜 짓을 중개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특정 정치인, 정치 세력을 비난할 때 이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영합하다’라는 뜻으로 말이다.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나 행동을 짐작해서 진정성은 전혀 없이 다만 얄팍한 호응을 위해 텅 빈 표현만 하는 것에 저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예컨대 한 정치인이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관련한 공개적인 발언을 했을 때, 비판자들은 그의 행동을 ‘Pandering to Black’(흑인을 위하는 척한다)이라고 하고, 성소수자(LGBT)의 권리를 말하면 비판자들은 ‘Pandering to LGBT’(LGBT를 위하는 척한다)라고 하며 진정성에 대해 의구심을 표한다.

 위선 없는 정치는 가능할까

주목해야 할 것은 인종차별, 성소수자 권리, 여성 문제 등 이른바 진보 혹은 ‘리버럴’ 진영에 좀 더 닿아 있는 의제들에 ‘팬더링’이라는 비난이 주로 따른다는 것이다. 진심이 전혀 없이 그저 어떤 지적인 유행에 편승하며 이른바 ‘깨어 있음’을 과시하는 ‘착한 척’, 즉 위선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보적인 메시지 및 가치, 의제에 위선이라는 말이 늘 따라다니는 것은 동서를 불문한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적 의제에서는 진보와는 매우 거리가 먼 정치인이 진보의 상징자본을 취하기 위해 정체성 정치 및 정치적 올바름 의제의 첨병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례가 미국에 굉장히 많았고, 특히 2020년 대선 전후로 그랬다. 평소 노동자 권리에는 전혀 무관심해 보이는 대기업들이 매년 6월이 되면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라며 로고에 무지개색을 박아 넣는 행태는 이른바 ‘깨어 있는 자본주의’(Woke capitalism)라고 조롱받는다.

한국의 경우, 정체성 정치나 정치적 올바름 의제로써 인기에 영합하려고 ‘팬더링’ 하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저 의제들 자체가 대중적으로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한국 정치 담론에서 진보적 의제들은 부문을 막론하고 항상 위선과 결부되는 것으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된 논리적 경로에 대해서는 2021년 8월14일치 글(‘위선 프레임은 흥미롭다, 그러나 위험하다’)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요컨대 정치권과 언론이 야합하여 견고하게 주조해낸 위선 프레임이 대중 담론에서 가식 및 ‘거짓된 선’과 범법 행위 및 ‘진짜 잘못’의 경중 설정을 혼탁하게 만들어버렸다.

여기에는 이중의 효과가 있다. 진보진영의 한 유명 인사가 과거에 던졌던 사회적 메시지와 그의 실제 행태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정치권과 언론들은 이 간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대중으로 하여금 모든 진보적 메시지에 의심의 눈초리부터 보내게 만들고, 위선이 아닌 ‘진짜 잘못’은 암암리에 세간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드는 것이다. 급기야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는 것이 차라리 위선보다 낫다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 확산하게 된다.

미국에서 진보 정치인들의 발언과 행동에 ‘팬더링’이라는 딱지를 붙이던 좌파 성향 비평가들, 논객들 가운데 일부는 천천히 자연스럽게 트럼프 지지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일부 논자들은 어떤 정치 세력이 국민을 ‘속이는’ 행위가 악 중에서 최악이라고 말하며, 처음부터 대놓고 나쁜 짓을 벌이는 정치 세력이 있으면 국민은 바로 분노하며 들고일어나서 그 세력을 끌어내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것이 “민주당만 빼고”라는 명제로 표상되는, ‘차악이 최악’이라는 논리였다.

배신과 위선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문제 삼은 결과, 배신하지 않고 위선을 떨지 않는 세력이 집권했다. 하지만 나라면 일체의 가식과 위선 없는 정치인을 지지할 바에 착한 척하는 정치인에게 배신당하는 것을 택하겠다. 단언하자면 위선 없는 정치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동등하고 자격을 갖춘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실제 자신보다 더한 모습으로 가장한다. 장 자크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우월성에 대한 욕구가 발생한다. 따라서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는 징표를 둘러싼 경쟁이 일어난다. 경쟁의 일환으로, 실제로는 내키지 않더라도 공동체의 규범을 준수하고, 사회적으로 확립된 기준에 맞추어 판단하고 행동한다. 즉 가식과 위선이다. 가식과 위선으로 형성되는 인정관계는 사회의 근간 그 자체다. 사회관계는 어떤 사람들을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고, 상호 간 어떻게 인정받는가에 따라 규정되기 때문이다.

 군림하려는 집권 세력

따라서 통치 행위는 반드시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통치자들은 시민들을 유권자로 인정하고 동등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해야 하며 그로써 유권자들로부터 자신이 통치할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자연히 일정 정도의 위선이 없을 수 없다. 자신의 됨됨이가 남들보다 낫다는 것을 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거짓 공약과 기만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위선과 그에 따른 배신만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프레임에 전 사회가 포획되고 그것만을 중심으로 정치 담론이 형성됐을 때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말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가식과 위선은 일절 없는 세력이 집권했다. 시민들을 유권자로, 동등한 의사소통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시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조금의 노력도 안 하면 적어도 배신과 기만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통치가 아니라 군림이다. 대놓고 나쁜 게 위선보다 낫다는 위험한 발상이 확산한 탓에 정부가 국민을 인정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음에도 국정 지지율은 더 떨어지지 않는다. 국민은 국민대로 정부에 인정받지 못한 채 각자의 인정투쟁에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즉 한국 사회의 인정체계가 완전히 붕괴하고 있고 이것은 곧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놓고 나쁘니까 국민이 바로 봉기할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윤석열 세력의 집권을 묵인한 논자들에게 깊은 유감을 표한다.

2022.12.24. 시위=나쁜 것? 시민은 정부 좇는 ‘불나방’이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시위=나쁜 것? 시민은 정부 좇는 ‘불나방’이 아니다

[한겨레S] 김내훈의 속도조절
‘그레고리’라는 이름의 나방에 관하여

실존적 고민 나누던 나방 그레고리
“어떻게 왔냐” 묻자 “불이 켜져서”
‘시위=불법’이란 담론 만드는 정부
맹목적 추종 않기 위해 각성해야

  • 수정 2022-12-24 10:16
  • 등록 2022-12-24 10:16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에서 보행권 보장을 요구하며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에서 보행권 보장을 요구하며 선전전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한겨레S 뉴스레터 무료 구독.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

‘코미디언들을 웃기는 코미디언’ 놈 맥도널드의 농담을 또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나방이 족부의학과 진료실로 들어간다. 의사는 나방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묻는다. 나방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매일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의 몸뚱이를 끌고 일하러 갑니다만 이제는 제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에 자다 깨서 옆을 보면 한때 사랑했지만 이제는 낯선 늙은 여자가 누워 있어요. 딸 알렉산드리아는 독감으로 죽었고, 나의 아들,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아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이런 말 하는 것만으로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만 아들놈의 눈을 보면 내가 거울을 볼 때 항상 보이는 그 비겁한 겁쟁이의 얼굴만 보여서 말이죠. 만약 그 겁쟁이가 조금만 용기가 있었더라면, 침대 머리맡에 장전된 채로 보관해두는 권총에 손을 뻗을 용기만 있었더라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저는 나방이지만 가끔은 거미가 된 기분입니다. 지옥불 위에 펼쳐놓은 거미줄을 간신히 붙들며 위태롭게 살아가는 거미 말이죠. 너무 힘듭니다.”

그의 푸념을 들은 의사는 이렇게 묻는다. “정말 힘드시겠습니다만, 정신과를 찾아가셔야 할 것 같은데 왜 여기로 오신 거죠?” 나방은 이렇게 대답한다. “불이 켜져 있어서요.”

‘허무개그’로부터 얻는 통찰

굉장히 슬프고 암울하면서도 마지막 한마디 문장이 앞서의 모든 감상을 무너뜨리며 허탈하게 만드는 말 그대로 ‘허무개그’다. 바보 같은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개그지만 나는 이로부터 하나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의 시민들 모두가 많은 부분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라는 이름의 나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일리노비치는 세상 모든 고민을 짊어진 것처럼 고뇌하며 실존적 위기에 맞서 하루하루 투쟁하지만 결국 실질적인 행동은 관성적으로, 의식이나 이성과 무관하게 자기도 모르게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각자 복잡한 사연과 고뇌를 짊어지고 최대한 합리적인 결정과 판단을 내리고자 하며 스스로 나의 길을 개척하며 행동하고자 애쓰지만 관성적으로,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시간이 훨씬 길다.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실존주의자 나방과 같다면, 나방을 움직이는 불빛은 무엇일까? 담론이다. 그때그때의 사회 지배적인 담론은 우리가 시민으로서, 유권자로서 내리는 결정과 판단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 자신은 그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말이다. 담론이란 아주 간단히 말하면, 서로 관계없는 별개의 것들을 관계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렇게 보이게 된 결과물이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의 행동 및 판단 체계에 결정력을 행사하냐면, 예컨대 한 사람의 범죄 행위와 그 사람의 피부색은 서로 무관한 요소지만 둘을 유관한 것으로 엮는 담론이 인종차별적 편견과 프로파일링을 유도하는 식이다.

담론의 키 플레이어는 단연 언론이다. 즉 담론이 불빛이라면 언론은 불빛을 밝히는 전구, 그리고 그 전구를 어디에 설치할지를 결정하는 존재다. 지금 언론이 과거에 비해 지배력이 많이 쇠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대형 언론사들의 담론 권력은 막강하다. 오히려 몇몇 대형 언론은 프로보커터 정치유튜브를 모방하면서 여론을 왜곡하며 담론을 오염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른바 가짜뉴스를 생산한다고까지는 말하기는 어렵지만, 서로 무관한 것들을 억지로 유관한 것으로 엮는 프레임으로, 혹은 유관한 것들을 무관한 것으로 해체하는 보도로써 특정 진영이나 집단, 사안 등에 대한 거부감, 적대감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사례는 많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 대한 보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초반부터 화제가 된 전장연 시위는 윤석열 집권 초기부터 위태롭게 된 지지자 결집력을 회복시킬 ‘선량한 시민의 적’으로서 언론과 정치권에 의해 제시되었다. ‘시민 불편 vs 전장연 시위’라는 대결 혹은 전쟁 구도는 사실상 장애인을 시민이 아닌 존재로 간주하게 만든다. 장애인도 시민이며, 장애인이 대중교통 이용에 불편을 겪는 것이 곧 시민 불편이다. 전장연 시위는 시민 불편을 줄여달라는 요구지만 언론 보도는 시민과 전장연의 관계를 영합게임으로 만들었다.

관성 따라 움직이는 ‘나방’ 되지 않도록

그뿐만 아니라 최근에 있었던 출근길 지하철 시위에는 언론들이 ‘기습 시위’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장연의 시위에 대해 서울시가 무정차 통과 조치로 대응한다고 밝히자 전장연 쪽에서 시위 장소와 시간을 알리지 않고 시위에 나섰는데 이것을 ‘기습’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전장연과 시민 사이의 전쟁이라는 프레임을 더 강화할 뿐만 아니라 시위자들을 기동력 있는 게릴라 같은 집단으로 상상하게 하는 그릇된 인상을 준다. 언론들은 전장연이 시민을 볼모로 잡는다고 비판하지만 오히려 정부가 시민을 볼모로 잡고 전장연과 기싸움 한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언론 보도를 접하는 사람들은 장애인의 권리 보장이 곧 자신에게 장기적인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그저 ‘시위는 나쁜 것’이라는 담론의 타성에 몸을 맡긴다.

김용민 화백의 <경향신문> 2014년 5월16일치 만평이 떠올랐다. 한 사람이 세월호 참사 소식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이게 나라냐’며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아픔을 딛고 일어서며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곧 선거철이 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투표소에 들어가면서 ‘그래도 아파트값 올려줄 후보를 뽑아야 부자가 된다’며 타성에 젖은 결정을 내린다. 각자 고뇌를 짊어지고 치열하게 투쟁하며 살아가는 우리 실존주의자 나방들은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관성적으로 불빛을 향해 움직이며 살고 있다.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나라가 망하기를 더 원하는 사람들 26.1.6.

  2026 년 첫 거래일부터 코스피가 4,300 을 넘겼다 . 불과 2025 년 5 월까지만 해도 2,500 선이었다 . 2025 년 6 월 정권 교체 이후의 가파른 상승세는 망가져만 가는 줄 알았던 한국의 경제 상황에 희망이 보이는 것을 넘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