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펀치라는 웹진에 수록된 글이다. 처음 본 웹진인데 재밌는 글이 꽤 있어보인다. 앞으로도 여기서 몇개 더 번역해볼 것 같다.
여기서 지젝을 꽤 강하게 비판하는데 그로서는 좀 당혹스러울 것 같다. 그가 그동안 해왔던 얘기와 크게 다를 것은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결국 저자들이 하고자 한 얘기는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몇몇 변화의 지표들에 감개무량하여 설레발치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좌파들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우직하게 국제적인 계급투쟁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모든 게 바뀌거나 아예 안 바뀌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Will the Coronavirus Change the World? On Gramsci’s ‘Interregnum’ and Zizek’s Ethnocentric Philosophy by RAMZY BAROUD, ROMANA RUBEO 번역
예언들이 많이 나왔고 거의 기정사실처럼 되었다: 포스트-코로나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껏 봤거나 경험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생겼을 것이다. 적어도 2차대전 이후의 세계와는 다르게 말이다.
높은 사망률(엄청난 경제적 타격은 말할 것도 없이)을 경험한 많은 나라에서 곡선이 어느 정도 ‘평평해지기’도 전에,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은 편안하게 격리 생활을 하면서 미래의 여러 시나리오를 예측하기 시작했다.
Foreign Policy의 ‘코로나바이러스 판데믹 이후 세상’이라는 제목의 널리 읽힌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초래한 대대적인 손상의 중대성은 “베를린장벽의 붕괴나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 초래한 결과에 비견될 수 있다.
주요 신문 및 뉴스 매체들이 포스트-코로나의 가능한 세계들의 밑그림을 제시하는 유행에 편승하는 동안, Foreign Policy는 열두 명의 사상가들에게 그들이 그리고 있는 미래의 상을 제시하기를 요청했다.
Stephen M. Walt는 “코로나19가 세계를 덜 개방적이고 덜 번영하며 덜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Robert Niblett는 쓰기를, “21세기 초반을 특징지었던, 상호 이익으로서의 지구화라는 관념이 회복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상호 이익’이라는 말은 다른 작은 나라들이나 가난한 나라들의 경우를 보면 쉽게 논박되는 말로, 이 문제만으로도 다른 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열두 명의 사상가 중 많은 이들에게 지구화는 중요한 논점이다. 다만 논쟁의 핵심은 지구화가 현 상태의 그것으로 지속될 것인가 혹은 재정의되거나 완전히 버려질 것인가 여부이다.
Kishore Mahbubani는 말하기를, “코로나19는 세계 경제의 진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일찍이 시작된 변화를 가속화하기만 할 것이다: 미국 중심의 지구화에서 중국 중심의 지구화로의 이동."
등등...
정치경제학자들이 코로나19가 주요 경제 동향, 지구화 및 그에 따른 정치 권력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환경운동가들은 인류 대다수에 영향을 미치는 격리가 어찌 되었건 지구에 아직은 희망이 있음을 일깨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수많은 기사는 과학 연구를 인용하고 델리의 푸른 하늘과 베네치아의 깨끗한 물을 보여주는 사진을 걸면서, 다가오는 ‘변화’가 환경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을 강조한다.
온갖 예언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신빙성이 떨어진 철학자들조차도 그들만의 ‘이데올로기적 바이러스’, 즉 “대안 사회, 국민-국가를 넘어선 사회, 지구적 연대와 협업의 형태로 스스로를 실현하는 사회에 대한 사변이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예측을 제시하며 논의의 장에 컴백하려 하고 있다.
독일 언론 Die Welt에 기고한 글에서 지젝은 그가 하나의 ‘역설’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제시한다: 코로나19가 ‘자본주의에 타격’을 입히면서 동시에 “인민과 과학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를 재-발명하도록 우리를 자극할 것”이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종종 ‘셀럽 철학자’로 불려왔던 지젝은 난민, 이민자, 무슬림을 대상으로 자문화중심적 담론을 주창한 바 있다.
“그들(유럽으로 몰려온 난민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결국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느니 하는 인도주의적 발상은 늘 아니꼬웠다.” 지젝은 그의 책 ‘난민, 테러, 그리고 이웃 간의 말썽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우리는 똑같지 않다. 우리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Quartz에서 펴낸 이 책을 논의하는 한 글에서 Annalisa Merelli는 쓰기를, “2015년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한 후 지젝은,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유럽에 받아들이면서 발생하는 문제들과 특히 난민들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공공 안전 위험 요소들에 대한 열린 토론을 금기시하는 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자유주의자들에게 경고를 했다.”
이 자칭 ‘맑스주의 철학자’는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학을 거론하며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일부 좌파 집단 안에서의 이른바 “이슬람에 대한 어느 비판”이라도 금기시하는 것을 비판한다.
“대부분의 난민들이 서구의 인권 개념과 공존할 수 없는 문화에서 왔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팩트다”라고 지젝은 주장하며, 편리하게도 서구의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와 경제적 지배를 위한 전쟁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중동의 위기를 야기한 핵심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아마 지젝의 비정통적인 ‘공산주의 재발명’은 ‘지구적 경제’의 불행(그가 편리하게 주장하듯이)이 아니라 전쟁으로 추동되는 서구 헤게모니와 신식민주의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수백만의 난민들을 배제한다고 추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지젝의 불편한 논의를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비판하는 이유는, 지금과 같은 맥락에서 그러한 ‘셀럽의 철학’이 전혀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전쟁, 인종주의, 제노포비아, 포퓰리즘적 극우 이데올로기 등에 의하여 진행이 더뎌지는 공평한 사회를 위한 변화를 논하는 데 있어서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사실, 기술 발전, 수출, 외화평가, 대기질과 같은 것들의 직접적이고 단순한 지표가 있다면 분석가들에게 있어 대기오염이나 지구화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훨씬 쉬워지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가 일상 사회의 여러 골칫거리와 거의 완전히 유리된 채, 별다른 근거 없이 사회의 재발명을 논한다는 것은 지적 사고실험 이상이 될 수 없다.
미래를 예측하는 대부분의 분석이 갖는 문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오래전부터 우리를 괴롭혔던 문제들, 그리고 그 문제들이 현재 우리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는지에 관한 정직한 검토에 입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구적 위기의 암울한 상황으로 우리를 내몬 문제들을 진실하게 직면하고 분석하지 않고서 어떻게 미래의 적절한 대응과 도전을 더 낫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동의한다.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현 상태는 도저히 지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멘, 리비아, 시리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의 비인간화와 경제적 종속 등등. 예사가 되게 놔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더 낫고 더 공평한 미래의 도래를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역사적으로 타당해야 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방어 가능해야 하며, 곤경에 빠진 세계, 우리 자신, 타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시선으로 무장해야 한다.
지젝과 같은 사람이 유럽과 기독교에 대해 자문화중심적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공산주의자’로 불린다는 게 신기하다. 지구적 계급 투쟁의 역사와 중요성을 인지하지 않는 공산주의는 어떤 공산주의일까?
맑스주의의 계급 투쟁을 좀 더 넓고 지구적인 의미로 파악하여 역사적으로 서구 열강이 ‘지배 계급’을 표상하며 남반구의 식민지배를 받고 억압받은 국가들이 ‘하층 계급’을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고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억압, 수탈, 종속의 역학이 ‘역사의 동력’이 된 것이다. 맑스주의에 따르면 역사는 물질적 생산 체계의 내부적 모순에 의해 움직인다.
판데믹 창궐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가차 없이 변화를 생성하고 추동할 것이며 그러한 낭만화된 ‘변화’가 지구적 층위에서든 지역사회 구조의 차원에서든 ‘하층 계급’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가정은 순진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의 위기가(의료 체계 문제든 경제적 문제든) 그 주요 원인들이 자본주의 체계 내부의 근본적 문제들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질 수 있는 구조적 위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계는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지식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인터레그넘’이라 일컬은 것을 맞이하고 있다.
‘옥중수고’에서 그람시가 쓰기를, “정확히 위기를 가리키는 것은 낡은 것이 소멸하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인터레그넘에서 아주 다양한 병리적 징후들이 나타난다.”
‘다양한 병리적 징후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어떤 점진적인 붕괴로 표현이 되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들만의 이윤을 위해서만 움직였던 서구 자본주의 열강이 그토록 열심히 건설해낸 지구적 체계의 붕괴 말이다.
1980년대 후반의 소련 붕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도전받지 않는, 군국주의적이며 타협의 여지 없이 자본주의적인)의 확립을 도래케 할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 중 실현된 것은 별로 없다. 미국이 주도한 첫 이라크전(1990-1991), 평행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와 그에 따른 ‘새로운 중동’ 등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과 서구 동맹은 군사적, 기술적 우위를 지속 가능한 지배력으로 전환하는 데 한계에 봉착하면서 예상되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피봇 투 아시아’(중동으로부터의 군사 철수에 뒤따른) 정책은 필연적인 쇠퇴의 시작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며 그 어떤 행정부도 얼마나 호전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대응하든 간에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 질서에 대해 무자비한 위기 앞에서 무능력한 모습만을 보이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유럽연합(EU)과 같은 서구의 지배 기구들은 쓸모가 없으며 역기능만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EU의 핵심 이념을 더욱 약화시킬 것으로 예상하는 데 특별한 예언이 더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하지만 놀라울 것도 없이, 2차대전 이후 유럽이 맞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기 상황에 ‘유럽 공동체’라는 것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도움의 손길을 뻗은 곳은 독일, 프랑스나 네덜란드가 아니라 중국과 쿠바였다.
경제 지구화를 주도하고, 지구화에의 참여를 거부했던 나라들을 조롱했던 바로 그 나라들이 지금 주권주의, 고립주의, 국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것이 그람시가 말한 ‘인터레그넘’이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공백이 희망찬 기대만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는 미래 갈등의 본질과 그 갈등에 대응하는 데 있어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도덕적 입장들에 대한 부단한 유념의 산물일 따름이다.
셀럽 철학자들은 지역적인 것이든 지구적인 것이든, ‘하층 계급’을 대변하지 않으며 그럴 자격도 없다. 그 대신 필요한 것은 억압된 집단(상호 연대로 연합한 소수자 집단, 종속 국가들 등)의 진정한 대변인들이 지지하는 문화적 카운터 헤게모니다. 이 대변인들은 미래에 놓여 있는 역사적 기회와 도전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인터레그넘’의 뚜렷한 징후는 전통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중의 가시적인 분리로 드러난다. 이것은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훨씬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람시가 쓰기를, “지배계급이 동의를 잃었을 때, 즉 더 이상 지도적이지 못하고 지배적으로 되어 강제력만 행사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거대한 대중이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그들이 전에 믿었던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군사독재의 부상(이집트의 경우)과 극우 포퓰리즘(미국과 서구의 여러 국가, 인도 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적 대표성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모두 염두에 둔다면, 지젝이 황당하게도 처방한 것처럼 단순히 ‘인민과 과학에의 신뢰’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공산주의 재발명’이나 민주주의의 회복 혹은 부의 공평한 재분배 모두 불가능하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점령과 지구적 난민 위기를 끝내지도 못할 것이다.
사실, 정반대가 참이다. 몇몇 정부들은 헝가리와 이스라엘에서처럼, 코로나바이러스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권위주의적 조치를 단행하는데 이것은 권력 장악의 강화를 목적으로 할 뿐이다.
헝가리와 이스라엘이 코로나 국면 이전까지는 엄격한 민주적 기준에 맞춰 통치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치사율 높은 질병으로 인한 집단적 패닉은 권위주의 체제가 기회를 잡고 민주주의의 외관을 더 오염시키기 위해 필요로 했던 집단적인 ‘쇼크’(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의 계기를 마련했다.
지구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분석가들, 전략가들, 철학자들은 어떤 플랫폼을 경유해서든 어떤 거대한 변화와 패러다임 전환을 예언하려 한다. 어떤 이는 더 나아가 ‘역사의 종언’, ‘문명의 충돌’을 선언하거나 지젝처럼 새로운 유형의 공산주의를 말한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 Jean-Baptiste Alphonse Karr(1808-1890)가 쓰기를, “바뀌는 것이 더 많아질수록, 이전과 같은 상태로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
정말로, 인민이 주도하는 변화 없이는, 현 상태는 끊임없이 스스로 재창조하며 지배력과 문화적 헤게모니, 비민주적 권력 장악력을 회복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지구적 위기는 근본적인 변화(더 높은 수준의 평등이나 권위주의로)의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일말의 변화도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인민들, 혹은 진정으로 우리를 대변하는 목소리(셀럽 철학자가 아닌 ‘유기적 지식인’)만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찾고 글로벌한(자문화중심적이지 않은) 정의의 새로운 담론을 재정립하기 위해 봉기할 권리와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선택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인터레그넘’은 또 다른 잃어버린 기회로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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