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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0의 게시물 표시

'나중에'와 정치

미국의 기술 문화연구 저술가 클레이 셔키의 책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원제 Here comes everybody)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여러 개 소개된다. 이바나라는 사람이 택시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는데 집 가서 확인해보니 사샤라는 사람이 그것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바나는 사샤에게 연락해 집으로 보내주기를 공손히 부탁했는데 10대 여성이었던 사샤는 이바나에게 인종주의적 조롱과 협박이 담긴 메일을 보냈다. 이바나의 오빠 에반은 '도난당한 휴대폰'이라는 인터넷 페이지를 만들어 사연을 알렸다. 사연은 널리 공유되었고 며칠도 안 되어 사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이스페이스를 발견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계속해서 일의 진행 상황을 묻는 사람, 격려해주고 도와주겠다는 사람들로부터 메일이 수없이 날아왔다. 사샤의 집주소를 알아내 직접 찾아가서 집을 촬영해 페이지에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에반은 그가 만든 페이지에 자유게시판을 만들었는데 곧바로 접속자들이 폭주해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도난이 아니라 분실로 취급하며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민원이 엄청나게 빗발쳤고 경찰은 결국 입장을 바꿔 에반이 페이지를 만든 지 일주일 만에 사샤를 체포하고 휴대폰을 이바나에게 돌려줬다.  "사샤 엄마는 딸이 체포되던 날 한 기자에게 "전화기 한 대 때문에 이렇게 골치를 썩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기억에 남을 말을 남겼다. 하지만 골치 썩게 한 것은 전화기가 아니라, 전화기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 즉 에반의 사이트에서 하나로 뭉친 사람들, 마이스페이스 신상정보와 가족의 주소를 찾아내고 경찰서에 압력을 넣게 도와준 사람들이었다."(클레이 셔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갤리온, 15쪽) 이 에피소드가 갖는 의의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경찰 행정까지 좌우하는 다수 인민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더 실용적인 측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따로 있다. 바로 '그

음악을 왜 들을까 Seefeel - Filter Dub

Seefeel - Filter Dub 신체 기관 중 이동 범위가 가장 좁고 정적인 부분은 얼굴일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얼굴은 대신 가장 풍부한 표현력을 지녔다. 표정이다. 표정은 사회적인 기능을 한다. 표정을 타인에게 보임으로써 머리는 비로소 얼굴이 된다. 동물이 진화한다는 것은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 사이의 경로를 말한다. 뇌과학자 로돌포 이나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내부화된 운동이다. 운동이 밖으로 표현되는 대신 안쪽으로 접혀들어가면서 복잡다단한 경로가 생긴다. 경로가 단순한 도마뱀은 건드리는 즉시 튀어오르지만 인간은 그러지 않고 고개를 돌려 먼저 왜 건드리냐고 묻는다. 경로가 복잡하고 긴 사람은 계속 툭툭 건드려도 몸은 가만히 있고 대신 붉어지고 일그러지는 얼굴로 화를 표현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의 수용과 그에 대한 반응 양태를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깥으로 표현되어 식별 가능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 전달되고 공감되는 것이 느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감정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앞서 말한 몸 안쪽으로 접힌 경로가 얕고 단순한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다. 쉽게 울거나 화내거나 하는 등 감정기복이 크고 표현이 격한 사람을 가리켜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빈약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그런데 감정 변화를 잘 숨기는 편은 아니다. 감정을 억누를 이유도 전혀 없다. 감정 표현의 프로세스가 상당히 긴 탓이라고 강변해본다. 내가 운동을 잘 안 하는 것은 운동의 내부화의 정도가 심한 탓이라고 강변해본다. 나는 잇몸이 붓거나 혓바늘이 돋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신체적인 증상이 있은 뒤에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굉장히 둔하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음악을 듣는 것

문빠는 실체가 없다

  오쟁이를 진(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남편에게는 반드시 바람난 아내가 필요하다.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이라는 글을 쓴 지젝에 따르면 아내가 정말로 바람이 났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남편의 망상은 병리적이다. 자신의 찌질하고 무능력한 비참한 삶에 대하여,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외간남자와 놀아나는 헤픈 여자에게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초라하나마 삶을 지탱할 수 있다. 논평마다 대깨문, 문빠 운운하는 리버럴/좌파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빠는 새로운 홍위병인가? 문빠는 실체가 없다.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들이 공격하는 허수아비인 '포스트모던 네오맑시스트'나 트럼프가 국가전복세력이라 주장하는 안티파Antifa와 같은 존재다. 문빠가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물론 아니다. 다만 문빠를 문빠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일괴암적인 세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빠가 있으면 낙빠, 명빠, 경빠, 추빠, 박빠도 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를 의인화하여 특정 정치인을 아이돌 소비하듯 정치를 대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슨 일만 있으면 '문빠다!' 외치며 '문빠들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오쟁이 진 사람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런 비평가연하는 사람들이 일신상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의 곤궁함의 막후에 어떤 세력의 농간이 있다고 믿는 것은 병리적이다. 이른바 '정치 팬덤' 담론은 다소 김빠진다. 그리고 대체로 악의적이다. 많은 사람이 정치 팬덤의 기원을 노사모에서 찾는다. 16대 대선 민주당 경선 때 노무현은 아웃사이더였고 정치적 기반은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 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경선 승리는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노사모라는 노빠 세력은 확실히 하나의 실체가 있는 정치적 집단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인터넷과 정치의 접목

미래는 취소되었다

Vaporwave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하위장르라고 하기에는 좀 협애한 정의인 것 같고 하위문화라고 하기에는 좀 오바하는 것 같다. 다만 이렇게 레이블 붙여진 음악과 영상은 내 취향과 잘 맞는다. 집에서 책읽을 때 화면보호기처럼 켜놓고 있기 좋다. 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후반까지의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음을 카세트테이프 필터로 돌려서 리버브와 콤프레서 이빠이 걸고 과거 TV나 라디오 광고 음성을 샘플링해서 피치를 낮추고 늘어지는 드럼비트를 넣는다. 그런 음악에 맞춰 세기말에 촬영된 8mm필름이나 광고, 애니메이션 등을 컴파일한다. 나는 이것을 농반진반 VHS미학이라고 부른다. 주요 테마는 사이버펑크, 쇼핑몰 아케이드, 됴쿄의 밤거리,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댓글을 보면 많이 오그라들고 황당하고 재미있다. 베이퍼웨이브를 보고 듣는 소비자들은 대부분 30대 이하 세대다. 기억하기는 커녕 경험해보지도 못한 세기말 문화의 분위기에 심취해 있고 향수마저 느낀다고 한다. " This reminds me of the memories that never happened"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은 꼭 있다. 사이버펑크, 도쿄, 일본 애니메이션은 모두 거품경제와 강한 관련이 있다. 특히 7-80년대부터 미국의 포드주의 체제가 이윤율 하락을 맞이하는 동안 일본이 도요타주의 체제로 급성장하면서 서구 선진국들의 경외의 대상이 된다. 이때 나오는 할리우드 SF영화들의 미래 이미지는 일본이 독점한다. 8-90년대 TV광고 영상과 함께 베이퍼웨이브 제작자들이 즐겨 전용하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노동 집약적으로 CG가 전혀 없는 고밀도의 디테일한 수작업 그림이 프레임마다 정교하게 그려졌다. 지금은 인건비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당시 일본의 거품경제에서는 가능했으며 따라서 이때의 그림들은 모종의 상실감을 자아내는 듯하다. 지금은 느끼기 힘든 재질감에 대하여 묘한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것을 향수로

유튜버들의 선넘기

" 한국의 문화는 비천함을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평가의 기준이 도덕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평론가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의 위치에서 ‘나쁜 것’을 굽어보며 ‘나쁜 것’을 철저히 거부하도록 장려한다. 나는 시대를 역행해 비천함을 꿈의 질료로 활용하는 문화비평을 복권시키자고 권유하고 싶다.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의 입장에서 문화를 새로 서술하자. 사회적 실재, 세계, 시간성, 자본주의, 한국힙합, 실시간 스트리밍, 밈과 농담, 우리 문화 내부의 비천함을 사고하자. "   t毬x(malware)라는 사람이 마테리알에 쓴 이 글 https://ma-te-ri-al.online/3c16 은   나로서는 아주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다. 다만 위에 인용한 부분은 이해 여부는 차치하고 상당한 울림이 있다. 내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일 테다. 비평이든 연구든 하려면 비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이든 도덕적이든 어떤 이유가 되었건 속으로부터 역한 기분이 들더라도 어떤 것을 다만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대선 직후 트럼프에 투표한 노동계층을 비천한 존재라 불렀다. 정확히는 "You could put them in the basket of deplorables"라 했는데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들이라 의역 가능하다. 유력 정치인이 대다수 유권자들을 일거에 기각해버렸는데 리버럴 성향 지지자들은 이에 환호했다.  미국에서 기각문화Cancel culture라는 것이 흥하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들이나 노예제를 낭만화한다는 이유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영화의 영화사적 의의를 폄하하려는 움직임들이다. 혹은 떠오르는 유명인, 정치인, 뮤지션, 배우 등의 과거를 캐내어 도덕적 낙인을 찍는 식이다. 혹은 최근의 잘못을 과거의 행보들에까지 소급적용해 생애를 깡그리 부정하는 식이다. 대학에서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