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9일 화요일

'나중에'와 정치



미국의 기술 문화연구 저술가 클레이 셔키의 책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원제 Here comes everybody)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여러 개 소개된다. 이바나라는 사람이 택시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는데 집 가서 확인해보니 사샤라는 사람이 그것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바나는 사샤에게 연락해 집으로 보내주기를 공손히 부탁했는데 10대 여성이었던 사샤는 이바나에게 인종주의적 조롱과 협박이 담긴 메일을 보냈다. 이바나의 오빠 에반은 '도난당한 휴대폰'이라는 인터넷 페이지를 만들어 사연을 알렸다. 사연은 널리 공유되었고 며칠도 안 되어 사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이스페이스를 발견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계속해서 일의 진행 상황을 묻는 사람, 격려해주고 도와주겠다는 사람들로부터 메일이 수없이 날아왔다. 사샤의 집주소를 알아내 직접 찾아가서 집을 촬영해 페이지에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에반은 그가 만든 페이지에 자유게시판을 만들었는데 곧바로 접속자들이 폭주해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도난이 아니라 분실로 취급하며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민원이 엄청나게 빗발쳤고 경찰은 결국 입장을 바꿔 에반이 페이지를 만든 지 일주일 만에 사샤를 체포하고 휴대폰을 이바나에게 돌려줬다. 

"사샤 엄마는 딸이 체포되던 날 한 기자에게 "전화기 한 대 때문에 이렇게 골치를 썩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기억에 남을 말을 남겼다. 하지만 골치 썩게 한 것은 전화기가 아니라, 전화기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 즉 에반의 사이트에서 하나로 뭉친 사람들, 마이스페이스 신상정보와 가족의 주소를 찾아내고 경찰서에 압력을 넣게 도와준 사람들이었다."(클레이 셔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갤리온, 15쪽)

이 에피소드가 갖는 의의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경찰 행정까지 좌우하는 다수 인민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더 실용적인 측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따로 있다. 바로 '그럴듯한 약속'이다. 단순히 '휴대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내세웠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없었다. '도둑을 단죄합시다'라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추상적이다. 에반은 많은 사람의 흥미와 정의감을 자극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메시지를 제시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그럴듯한 약속'이다. 2016년 촛불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럴싸한 약속이 촛불의 간판으로 내세워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퇴진'이 그것이다. 그게 아니라 '사회구조 변혁', '제왕적 대통령제 철폐' 따위였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모일 수가 없다. 월스트리트점령운동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이유는 이들이 제시한 "1% 대 99%"가 너무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세력화와 결집은 미리 주어져 있는 정체성(이를테면 노동자, 이주민, 소수민족, 성소수자 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 세력이나 정체성 모두 공통된 요구를 가진 사람들의 일시적인 집합체다. 일시적인 집합과 그것의 지속성 있는 응고는 특정 기표를 구심점으로 이루어진다. 이질적인 사람들이 갖는 여러 가지 요구들 중에 당장 급한 것 예컨대 굶어죽지 않을 권리가 있으면 좀더 장기적인 목표 이를테면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있을 테다. 이러한 양극의 기표들 가운데서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당히 거창하면서 결과가 그림이 그려지는 메시지가 관철되어야 한다. 이 기표에 특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사람들의 상호충돌이 제어될 수 없어 결집이 지구력을 갖기 어렵다. 이것이 헤게모니적 기표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메시지들이 의인화된 한명의 개인으로 제시될 수도 있고 슬로건이 될 수도 있고 정책이 될 수도 있고 유행어 혹은 밈이 될 수도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기표들 간에 위계를 발생시킨다. 즉 사람들이 들고 오는 요구들 안에서 우선순위가 매겨진다. 당장 급해보이지 않는 것들, 추상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들, 이득을 받는 사람이 소수에 머무를 것 같은 요구들, 그 수혜자가 가까운 이웃에 누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요구들은 자연히 후순위로 나중으로 밀려난다.

리버럴이 보는 문재인에게는 늘 연관키워드 '나중에'가 따라붙는다. 문재인이 강당에서 경선후보 연설할 때 인권단체 활동가가 갑자기 일어서서 항의성 질의를 내뱉었는데 문재인은 '나중에 발언할 기회를 드리겠다'라고 답했다. 식순을 지키고 발언권을 얻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응답이었다. 이에 지지자들은 '나중에'를 연신 외쳤다. 이런 일을 가지고 문재인이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나중에 처리할 문제' 취급했다고 와전시키는 것은 악의적이다. '나중에'를 구호처럼 외친 지지자들의 속내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어보인다. 다만 그게 이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20년 9월 26일 토요일

음악을 왜 들을까 Seefeel - Filter Dub


Seefeel - Filter Dub


신체 기관 중 이동 범위가 가장 좁고 정적인 부분은 얼굴일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얼굴은 대신 가장 풍부한 표현력을 지녔다. 표정이다. 표정은 사회적인 기능을 한다. 표정을 타인에게 보임으로써 머리는 비로소 얼굴이 된다.

동물이 진화한다는 것은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 사이의 경로를 말한다. 뇌과학자 로돌포 이나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내부화된 운동이다. 운동이 밖으로 표현되는 대신 안쪽으로 접혀들어가면서 복잡다단한 경로가 생긴다. 경로가 단순한 도마뱀은 건드리는 즉시 튀어오르지만 인간은 그러지 않고 고개를 돌려 먼저 왜 건드리냐고 묻는다. 경로가 복잡하고 긴 사람은 계속 툭툭 건드려도 몸은 가만히 있고 대신 붉어지고 일그러지는 얼굴로 화를 표현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의 수용과 그에 대한 반응 양태를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깥으로 표현되어 식별 가능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 전달되고 공감되는 것이 느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감정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앞서 말한 몸 안쪽으로 접힌 경로가 얕고 단순한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다. 쉽게 울거나 화내거나 하는 등 감정기복이 크고 표현이 격한 사람을 가리켜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빈약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그런데 감정 변화를 잘 숨기는 편은 아니다. 감정을 억누를 이유도 전혀 없다. 감정 표현의 프로세스가 상당히 긴 탓이라고 강변해본다. 내가 운동을 잘 안 하는 것은 운동의 내부화의 정도가 심한 탓이라고 강변해본다. 나는 잇몸이 붓거나 혓바늘이 돋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신체적인 증상이 있은 뒤에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굉장히 둔하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음악을 듣는 것일 테다. 어느날 갑자기 그날따라 특정 곡의 멜로디가 하루종일 머리속을 맴돌 때가 있다. 그날따라 찾아 듣게 되는 곡, 특정 장르가 있다. 우연이라고만 보고 싶지는 않다. 그때 몸상태가 음악을 경유해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분위기가 명쾌히 묘사되지 않는 음악을 즐겨 듣는다. 즐겁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음악을 선호한다. 가사가 노골적인 노래는 전혀 안 좋아한다. 작곡가가 곡을 쓸 때 의도한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음악은 광고음악으로서나 제 기능을 한다.

Seefeel은 말도 안 되게 저평가되고 잊혀진 영국의 슈게이징 밴드다. 짧게 활동하고 해체했다가 재결성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데 가장 최근 음반을 낸 게 9년 전이다. 중학생 때 Aphex Twin의 리믹스 때문에 알게 됐는데 그때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왜 좋은지 모르겠다. 늘어지는 음이 8분 넘게 반복만 하는데 넋놓고 듣게 된다. 곰팡이 같은 음악이다.

2020년 9월 19일 토요일

문빠는 실체가 없다

 

오쟁이를 진(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남편에게는 반드시 바람난 아내가 필요하다.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이라는 글을 쓴 지젝에 따르면 아내가 정말로 바람이 났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남편의 망상은 병리적이다. 자신의 찌질하고 무능력한 비참한 삶에 대하여,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외간남자와 놀아나는 헤픈 여자에게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초라하나마 삶을 지탱할 수 있다.

논평마다 대깨문, 문빠 운운하는 리버럴/좌파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빠는 새로운 홍위병인가? 문빠는 실체가 없다.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들이 공격하는 허수아비인 '포스트모던 네오맑시스트'나 트럼프가 국가전복세력이라 주장하는 안티파Antifa와 같은 존재다. 문빠가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물론 아니다. 다만 문빠를 문빠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일괴암적인 세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빠가 있으면 낙빠, 명빠, 경빠, 추빠, 박빠도 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를 의인화하여 특정 정치인을 아이돌 소비하듯 정치를 대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슨 일만 있으면 '문빠다!' 외치며 '문빠들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오쟁이 진 사람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런 비평가연하는 사람들이 일신상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의 곤궁함의 막후에 어떤 세력의 농간이 있다고 믿는 것은 병리적이다.

이른바 '정치 팬덤' 담론은 다소 김빠진다. 그리고 대체로 악의적이다. 많은 사람이 정치 팬덤의 기원을 노사모에서 찾는다. 16대 대선 민주당 경선 때 노무현은 아웃사이더였고 정치적 기반은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 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경선 승리는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노사모라는 노빠 세력은 확실히 하나의 실체가 있는 정치적 집단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인터넷과 정치의 접목이 아직 낯설었을 때 3-40대 젊은 유권자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유연하고 느슨한 조직력을 유지하며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역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은 좌우와 세대를 막론하고 인터넷 정치의 게릴라전은 상수다. 정치 팬덤을 보는 시선이 20년 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정치 팬덤은 여야와 인물을 불문하지만 유난히 평단에서는 친문 성향의 동의어와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본다. 18대선 직후부터 몇 년 동안의 종합편성채널의 각종 시사프로그램을 반추하면 생각외로 여권 성향과 야권 성향의 패널들이 어느 정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지금은 안 나오지만 당시 수도꼭지마냥 '틀면 나오는' 정치평론가를 참칭하던 사람들로 황태순, 민영삼, 황장수 등이 있었다. 각각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언론특보, 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 및 문재인 대선 후보 선대위 전략단장, 16대 새천년민주당 낙선의원이다. 또한 TV조선에서 이름을 내걸고 프로그램을 진행한 장성민 역시 16대 새천년민주당 의원직을 지냈다. 모두 공통적으로 반노 인사들로서 친노 진영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혹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데올로그로 나서 친노/친문 패권을 외쳤고 이것이 정치권 바깥의 지지자들에게도 뻗쳐 친문 정치 팬덤 담론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러나 18대 대선 직후부터 19대 대선 직전까지 친문은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다. 문재인이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일 때도 당 안팎에서 두들겨 맞았다. '친문 패권주의'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온 시기는 문재인이 당대표로서 계파중심 보스정당을 청산하고 시스템정당을 관철시키려 했을 때다. 이때 얘기된 '친문 패권'이란 시스템 앞에서 풍전등화 신세가 된 당시 반문 중진의원들과 끈떨어진 정치인 출신 종편 패널들의 되도 않는 원한감정의 기표일 뿐이다. 당에는 없는 그 실체를 당 밖에서 찾다가 친문 팬덤으로 '친문 패권'의 빈 속을 채운 것이 지금의 문빠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희준 동아대 교수가 프레시안에 거의 똑같은 얘기를 했더라.

"친문 패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들이 주장하는 패권주의란 문재인이 나눠먹기를 거부하자 탈당해 떨어져 나간 호남 의원들, 그리고 자신의 지분을 보장해주지 않자 화가 난 당내 다선 의원들이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해 집어든 프레임일 뿐이다. 그들이 문제 삼는 패권주의적 행태라는 것도 고작 지지자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벌이는 집단행동뿐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49064?no=149064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정치 세력은 처음부터 주어진 정체성을 근간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치 세력은 가변하고 다질적인 정체성의 여러 집단이 우연한 계기를 맞아 특정한 기표를 구심점으로 결집한 일시적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문빠'는 빈 기표이며 그 내용물은 계속해서 바뀐다. 문빠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그 특정한 기표는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변혁이다.

2016년 촛불을 결집시킨 것은 '박근혜 퇴진'이다. 반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사람, 이석기 석방을 외치는 사람, 비박 성향 여당 지지자들까지 이질적인 요구들을 갖고 거리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결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두 가지의 공통된 요구가 촛불집회의 간판이 되어 이질적인 요구들 간의 상호충돌이 최소화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 촛불은 지도자만 갈아치웠을 뿐 유의미한 사회변혁은 이루지 못했다고 논평하는 사람이 많다. 촛불의 소명을 문재인 정부가 배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촛불의 목적은 사회변혁이 아니었다. 촛불의 명분이 사회변혁이었으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회변혁은 추상적이다. 진보 세력은 정치적 상상력이 부족한 대중을 상대로, 그들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박근혜 퇴진을 넘어 진보적 의제로 전환시킬 헤게모니 전략이 부재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약속이다. 박근혜 퇴진이 그것이다. 

촛불 이후 현재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기표는, 입을 열 때마다 문빠 운운하는 논객이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문재인 개인'이 아니라 적폐청산이다. 21대 총선 결과를 보며 혹자는 부르주아 정당의 승리라고 비아냥댔지만 이것은 오히려 민주당 압승의 역사적 의의와 당위성을 드러내는 말일 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군주제 멘탈리티에 머물러 있는 정당을 상대로 부르주아 공화파가 승리했다는 얘기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정부 여당 지지자들은 사회변혁이 아니라 정치변혁을 위해 결집한다. 

논객들은 문빠들에게, 문 정부 지지하고 보수정당 욕하는 것만으로 민주 진보 시민의 소임을 다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문빠 욕하는 것으로 지식인의 소임을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2020년 9월 12일 토요일

미래는 취소되었다


Vaporwave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하위장르라고 하기에는 좀 협애한 정의인 것 같고 하위문화라고 하기에는 좀 오바하는 것 같다. 다만 이렇게 레이블 붙여진 음악과 영상은 내 취향과 잘 맞는다. 집에서 책읽을 때 화면보호기처럼 켜놓고 있기 좋다.

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후반까지의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음을 카세트테이프 필터로 돌려서 리버브와 콤프레서 이빠이 걸고 과거 TV나 라디오 광고 음성을 샘플링해서 피치를 낮추고 늘어지는 드럼비트를 넣는다. 그런 음악에 맞춰 세기말에 촬영된 8mm필름이나 광고, 애니메이션 등을 컴파일한다. 나는 이것을 농반진반 VHS미학이라고 부른다. 주요 테마는 사이버펑크, 쇼핑몰 아케이드, 됴쿄의 밤거리,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댓글을 보면 많이 오그라들고 황당하고 재미있다. 베이퍼웨이브를 보고 듣는 소비자들은 대부분 30대 이하 세대다. 기억하기는 커녕 경험해보지도 못한 세기말 문화의 분위기에 심취해 있고 향수마저 느낀다고 한다. "This reminds me of the memories that never happened"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은 꼭 있다.

사이버펑크, 도쿄, 일본 애니메이션은 모두 거품경제와 강한 관련이 있다. 특히 7-80년대부터 미국의 포드주의 체제가 이윤율 하락을 맞이하는 동안 일본이 도요타주의 체제로 급성장하면서 서구 선진국들의 경외의 대상이 된다. 이때 나오는 할리우드 SF영화들의 미래 이미지는 일본이 독점한다.

Can Fresh 'Blade Runner,' 'Alien,' and 'Terminator' Fix Their Franchises? -  mxdwn Movies


Inner Space [SOLARIS] | Jonathan Rosenbaum


8-90년대 TV광고 영상과 함께 베이퍼웨이브 제작자들이 즐겨 전용하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노동 집약적으로 CG가 전혀 없는 고밀도의 디테일한 수작업 그림이 프레임마다 정교하게 그려졌다. 지금은 인건비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당시 일본의 거품경제에서는 가능했으며 따라서 이때의 그림들은 모종의 상실감을 자아내는 듯하다. 지금은 느끼기 힘든 재질감에 대하여 묘한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것을 향수로 착각한다.

BAOH | 1989Akira (1988) - Cyberpunk Anime - SP 104 - Cyberpunk

베이퍼웨이브만 그런 게 아니라, 국적을 불문하고 현재 전반적인 문화 자체가 대체로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 같다. 이른바 복고 열풍은 이제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친다. 리메이크나 리마스터, 과거의 기술적 한계로 말미암은 조야한 질감을 재연하는 저예산 영화, 뮤직비디오, 인디 게임, 음원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나는 이것을 막연하나마 좋은 시절로 학습했고 기억하고 있는 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로 받아들인다.
요즘 나오는 SF영화는 죄다 시간여행 아니면 다른 행성으로 도망가는 얘기다. 그것도 아니면 옛날 거 리메이크. 프레드릭 제임슨 말대로 자본주의의 끝을 상상하는 것보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쉽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서 뭔가를 바로잡거나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만 할 수 있는 것일 테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고갈됐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재활용 뿐이다. 마크 피셔는 제임슨을 인용하며 우리의 미래는 취소되었다고 단언한다.

요즘 어린이들이 상상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2020년 9월 6일 일요일

유튜버들의 선넘기

"한국의 문화는 비천함을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평가의 기준이 도덕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평론가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의 위치에서 ‘나쁜 것’을 굽어보며 ‘나쁜 것’을 철저히 거부하도록 장려한다. 나는 시대를 역행해 비천함을 꿈의 질료로 활용하는 문화비평을 복권시키자고 권유하고 싶다.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의 입장에서 문화를 새로 서술하자. 사회적 실재, 세계, 시간성, 자본주의, 한국힙합, 실시간 스트리밍, 밈과 농담, 우리 문화 내부의 비천함을 사고하자."
 
t毬x(malware)라는 사람이 마테리알에 쓴 이 글https://ma-te-ri-al.online/3c16 나로서는 아주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다. 다만 위에 인용한 부분은 이해 여부는 차치하고 상당한 울림이 있다. 내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일 테다. 비평이든 연구든 하려면 비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이든 도덕적이든 어떤 이유가 되었건 속으로부터 역한 기분이 들더라도 어떤 것을 다만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대선 직후 트럼프에 투표한 노동계층을 비천한 존재라 불렀다. 정확히는 "You could put them in the basket of deplorables"라 했는데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들이라 의역 가능하다. 유력 정치인이 대다수 유권자들을 일거에 기각해버렸는데 리버럴 성향 지지자들은 이에 환호했다. 

미국에서 기각문화Cancel culture라는 것이 흥하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들이나 노예제를 낭만화한다는 이유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영화의 영화사적 의의를 폄하하려는 움직임들이다. 혹은 떠오르는 유명인, 정치인, 뮤지션, 배우 등의 과거를 캐내어 도덕적 낙인을 찍는 식이다. 혹은 최근의 잘못을 과거의 행보들에까지 소급적용해 생애를 깡그리 부정하는 식이다.

대학에서는 문학, 영화 등 텍스트를 학생들 앞에서 읽히기에 앞서 '트리거 워닝'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광민감성 발작 주의마냥, 특정 장면이 어떤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보기 싫은 사람은 나가도 좋다는 윤허를 내릴 수 있어야 하며 성적을 매길 때에도 정상참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이 배출할 인재상은 어떤 것인가?

최근 한 대학 강의실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는데 여기에 나오는 강간 묘사에 대하여 성폭행 피해자 학생이 항의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컬럼비아대 다문화문제 자문위원회에서 고전 예술작품에 자극성 경고를 표시하도록 권고했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안전함을 느껴야 한다라는 것이 권고안의 요지지만 제리 코인 교수가 지적했듯 학생들은 삶이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다. 4년 동안 거대한 안전 영역 안에서 자신을 보호막으로 둘러싸는 것, 그것이 바로 퇴보다.”(슬라보예 지젝,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 '정치적 올바름의 덫')

학부 영화비평 세미나에서 발제할 때 나는 별 생각 없이 <Behind the green door>라는 고전 포르노를 틀은 적이 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같이 세미나를 듣던 학생 한 명이 도중에 나가서 강사가 몇 마디 지적을 했는데 종강 후 해당 강사는 강의 평가에서 빵점 테러를 받았다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튜버들의 선 넘기

극우 유튜버들이 사회적 문제로 계속해서 호명되고 있다. 유튜브 정책상 허위정보나 혐오 표현 등으로 신고가 누적되면 그 채널에 소위 노란 딱지가 붙여져 광고가 제한되는 탓에 수익 창출이 불가능해지지만, 채팅창을 통해 추종자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슈퍼챗이라는 대안 수익모델이 있다. 현재 전 세계 슈퍼챗 후원금 1위 채널은 가로세로연구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노골적으로 조롱한 방송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그 주간에만 이천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선을 넘는다라는 말이 널리 유행했다. 방송인 김민아는 방송의 금도를 고려하지 않는 듯한 언행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유튜브 방송에서 중학생을 대상으로 성희롱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백만 단위의 구독자를 보유했던 유튜버 송대익은 치킨프랜차이즈 배달원이 음식을 빼먹었다는 내용의 거짓 방송을 송출하여 본사로부터 민형사상 피소를 앞두고 있다. 그 외에 한 유튜버가 투렛 증후군을 연기하다 발각된 사례가 있었고 어떤 이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 행세를 하며 공공장소에서 기침하고 쓰러지는 연기를 하는 등 난동을 부리다가 입건된 바 있다.

온갖 시정잡배들이 나타나 설쳐대며 사회에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라면 마땅히 미치광이 취급받았을 법한 언행을 보이는 사람들이 오늘날 갑자기 거대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모으고, 스타 연예인에 비견되는 두꺼운 팬층을 확보할 수 있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 그저 이상한 사람들이 최근 들어 유난히 급증했다고만 말하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하다.

극단적이고 금도를 넘는 이념을 갖는 사람들의 절대수는 과거와 비교하여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증가한 것은 곳곳에 주변부로 흩어져 있던 소수 이상한 사람들끼리의 연결 가능성이다. 연결 가능성의 제고는 커뮤니케이션 제 수단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며 그 중심에 유튜브가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회적 분위기와 통념상 차마 입 밖에 내기 눈치 보였던 특정 의견이나 불만사항을 남들과 공유하고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을 가까운 곳에서 찾기가 과거에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이용자라면 누구나 접속하는 유튜브에서 이용자별 성향에 맞춰진 동영상 추천의 연쇄를 몇 단계 거치기만 하면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클레이 셔키Clay Shirky는 그의 책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Here comes everybody)에서 재미있는 예를 제시한다. 페이스북 이전에 잘 나가던 미트업Meetup이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이트가 있었는데 서비스 출범 후 몇년 간 이용자들의 상호작용이 가장 활발했던 그룹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마녀 숭배자들, 이교도들, 무신론자들, 여호와의 증인, <제나> 팬모임 등이 그것이다. <제나>Xena Warrior Princess는 루시 롤리스 주연의 드라마 시리즈인데 대중적인 흥행은 덜했지만 소규모 열광팬들로부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셔키 말대로 "'제나'보다 '내 사랑 레이몬드' 시청자가 훨씬 많았지만, 실제로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는 쪽은 제나 팬들이었다."(215) 나머지 그룹들은 사회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그룹이었다. 과거에는 비난을 무릅쓰고 본인의 신념과 가치를 피력하고 동료들을 찾을 공간과 방법이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승인 없는 사회'들이 암암리에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트콤 <브루클린 99>에는 한 식인 살인범이 식인 관련 꿀팁을 레딧Reddit에서 찾는다는 조크가 나온다.

유튜브 이전에는 블로그가 이러한 기능을 했었지만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유튜브가 훨씬 효과적임은 물론이다. 블로그는 플랫폼이 통합되어 있지 않은 탓에 거대 단위의 이용자들 간의 대규모 접속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블로그는 대체로 활자 중심으로, 독자의 문해력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반면 유튜브 영상은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할 수 있고 화자의 격동하는 감정을 사실상 무매개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그에 동화되기가 아주 용이하다. 막연하나마 갖고 있었지만 위선의 파사드 아래 억압되어 있었던 어떤 특정한 감정이 유튜브 영상을 계기로 자극되고 분출되어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시청자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증폭되고 커다란 집결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 극우 유튜버를 중심으로 한 극우 세력화의 축약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선을 넘는’, 즉 사회적 금도를 무시하는 이들의 언행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것은 헤게모니 균열의 징후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다. 작금의 유튜버들을 위시한 여러 가지 기현상, 선 넘는 행위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행위에 대한 예찬이다. 모든 것이 의문에 붙여지는 오늘날 좌고우면 않고 사회적 질서에 개기는 행위를 상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눈살은 찌푸릴지언정 일말의 쾌감은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규칙이든 예의든 사회에서 지키라는 것들은 다 지키며 살아왔는데도 지금 사는 꼬락서니가 엉망이니 유튜버들을 대리 삼아 질서 자체를 문제시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극우 유튜버들의 준동은 이러한 선 넘기에 정치적 메시지가 더해진 것이다. 이들의 도를 지나친 막말, 근거 없는 비방, 혐오 표현, 가짜 뉴스 등의 표피 아래에 깃들어 있는, 지배 기득권 세력의 하향식 의제 설정에 대한 저항에의 욕망에 시선이 닿아야 한다. ‘기레기혹은 기더기라는 말로 표상되는 기성 언론에 대한 강한 불신 및 제반 전문가들을 향한 반발심 등을 단순히 반지성주의로 일축할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의 균열에 대한 대중의 반응으로 봐야 할 것이며 아래로부터의 담론 형성을 위한 움직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회 질서와 금도에 의해 음소거, 비가시화되고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던 요구들, 불만들, 헛소리들, 기이한 상념들과 상상력들이 유튜브를 매개로 공론장 중심부의 선을 침범하고 있다. 전혀 새로운 관계 연결의 가능성이 유튜브를 통해 현실화 됨에 따라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지각변동의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창작과비평 196호 <그런 세대는 없다> 촌평. 누가 왜 자꾸 그런 세대가 있다고 우기는가

  나는 386 세대 (‘586’, ‘n86’ 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 을 선호한다 ) 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 특히 386 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