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1일 일요일

미국 시트콤 시리즈 추천 및 티어 리스트

 추천 리스트 만들고 S에서 D까지 등급을 매길 만큼은 미국 시트콤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하여 글로 정리해본다. 모두 최소 1시즌 이상은 본 것들이다.

 F를 매길 정도로 형편 없는 것들은 아예 안 보거나 한두 편 보고 끝냈기 때문에 평가를 할 수가 없다. 말인즉 여기서 평가가 박해도 어느 정도 재미는 보장한다.


S: Arrested Development (못말리는 패밀리) (2003~2006, 2013, 2018)


살면서 본 것 중에 제일 웃기다.
애니메이션 Bojack Horseman을 너무 재밌게 봐서 목소리 연기를 한 윌 아넷의 대표작을 안 볼 수 없었는데 정말 보기를 잘했다.
시즌 3까지 나오고 캔슬됐다가 2012년에 넷플릭스가 부활시켜서 시즌 5까지 나왔다.
넷플릭스 한국 계정으로는 볼 수가 없고 다른 데서도 도저히 볼 방법이 없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시즌 4부터는 노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어쨌건 시즌 3까지는 기념비적으로 웃기다. 
부동산 재벌 일가가 사기죄에 연루되고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 이야기다.
매 회 3~4개의 서브플롯이 전개된다. 처음에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가 일이 진행되면서 서로 한 데 꼬이면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충돌하여 터져버리는데 이때 정말 배꼽 잡는다.


A: Community (커뮤니티) (2009~2015)


도널드 글로버, 켄 정의 출세작이다.
이것도 재밌게 본 애니메이션을 계기로 보게 된 것. Rick & Morty의 작가 댄 하먼이 만들었다고 해서 봤다. 
릭 앤 모티를 본 사람은 동의할 텐데, 평소에 미국의 상업영화, 가요, 드라마, 코믹스 등 팝컬처에 이렇다 할 취미가 없이 보면 재미가 많이 반감된다.
커뮤니티가 특히 그렇다. 모든 에피소드가 패러디와 오마주, 패러디의 패러디다.
잘 나가던 변호사였다가 학위 위조가 드러나 다시 학위를 받기 위해 2년제 대학(커뮤니티 컬리지)에 들어간 제프 윙어(조엘 맥헤일)라는 사람의 이야기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와 함께 스터디그룹에 들어간 아베드(대니 푸디)라는 청년이다. 모든 인간관계, 세상사를 팝컬처의 렌즈를 통해 보는 아베드의 시선에서,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패러디처럼 진행된다.
시즌 4가 제작될 때는 댄 하먼이 잠시 구설수 때문에 작가진에 참여를 못했는데 그래서 재미가 덜하지만 다른 평범한 시트콤들의 전성기 만큼은 한다.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30Rock>, <빅뱅이론> 등에 비하면 시청률이 매우 저조했지만 가장 열정적인 마니아층이 있다.
시트콤의 시트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A: It's Always Sunny In Philadelphia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 (2005~ )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의 실사판이라고 하면 될 듯하다.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다만 사우스파크는 몇개만 보면 금방 질리는데 이건 전혀 안 질린다. 시즌 14까지 나오고 지금도 계속 나오는데도 말이다.
주인공들은 죄다 형편없는 인간들이다. 의도는 좋고 선하지만 의도치 않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악의로 가득하다. 주변에 착하고 멀쩡한 사람이 있으면 인생을 망가뜨려버린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사기나 음모를 획책하고 재미 좀 보는가 싶다가 응징당하는 이야기다.
에피소드 간 편차는 좀 있지만 대니 드비토의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하여 어지간히 재미없어도 이 사람 혼자서 다 살린다. 


B: 30 Rock (30록) (2016~2013)

30 Rock은 30 Rockefeller Plaza의 약칭이며 NBC방송국이 위치한 동네다. 티나 페이가 SNL의 작가 및 연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가상의 코미디프로그램 메인작가로 일하는 리즈 레몬이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사진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듯이 보통내기는 아니다. 티나 페이는 한국에서는 새라 페일린을 패러디한 리버럴 페미니스트 코미디언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할리우드 리무진 리버럴' 풍자와 조롱을 아주 신랄하게 한다.
처음 두 시즌 정도는 현실적인 정치-방송사-제작진-연예인 간 갈등과 사건을 묘사한 시트콤이었다가 뒤로 갈수록 인물들은 만화 캐릭터처럼 되고(캐릭터의 몇몇 특징만 남고 극단적으로 되는 것을 Flanderization이라고 부른다) 초현실적이 되는데 오히려 더 재밌다.


B: Parks and Recreation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2009~2015)

크리스 프랫의 출세작이다.
<오피스> 작가였던 마이클 슈어가 따로 나와서 아류작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제지회사가 아니라 시청이다.
아류작이지만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을 고평가하는 이유는 <오피스>보다 훨씬 다채롭기 때문이다. <오피스>가 영국에서 수입될 때는 캐릭터가 사실상 네 명(마이클, 짐, 팸, 드와이트)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NPC에 가까웠다. 반면 <팍 앤 레>에서는 가상의 소도시(교육 수준, 시민 수준이 매우 낮고 비만율은 매우 높은)를 만들고, 개성 있고 각자의 스토리가 있고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을 다수 등장시킨다. 그 덕에 등장인물 중 누가 한 데 엮이든지간에 꽤 그럴싸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특정 배우의 개인기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굉장히 무해한 웃음을 준다. 초반에는 오피스처럼 민망하고 어색한 상황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웃음을 유도하고 시청자로 하여금 몸둘 바를 모르게 만드는 게 코미디 루틴이었는데 두 번째 시즌부터 매우 편한 시트콤이 된다. 그 때문인지 앉은 자리에서 여덟 편을 연속으로 봐도 전혀 지치지 않는다.


B: Brooklyn Nine-nine (브루클린 나인나인) (2013~2021)


마이클 슈어가 만든 시트콤은 대체로 보기가 편하다.
뉴욕 시 경찰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액션이나 추리가 많지는 않고 동료들 간의 이야기, 경찰서 내 정치가 주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 문제, 인종 문제가 유쾌하지만 가볍지는 않게 다뤄진다.
굉장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코미디로 평가 받는다. 아주 가끔 설교조일 때가 있지만 살아있는 듯한 캐릭터들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쉽게 몰입이 되어 문제되지 않는다.
흑인 동성애자, 라틴계 양성애자 내세우며 "inclusive"한 티는 많이 내는데 내 기억으로 아시안은 딱 한 번 해커로 출연한다.


B: Curb Your Enthusiasm (커브 유어 엔수시아즘) (2000~ )

<사인펠드>의 작가 래리 데이비드가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제리 사인펠드가 너무 연기가 안 늘어서 직접 연기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다.
래리 데이비드는 <사인펠드> 작가로 떼돈을 번 자신을 연기한다. 본인의 극화된 시니컬하고 냉정한 성격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와 해프닝을 아주 웃기면서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위선을 극도로 싫어해서 인사치레, 해야 하는 말은 안 하고 안 해도 되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굳이 해서 갈등이 일어난다. 이렇게만 보면 사회화 덜 된 심술궂은 늙은이로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상하게 시청자들은 래리 데이비드를 응원하게 된다.
대본에는 상황 설명만 되어 있고 대사는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한다. 홍상수 감독이 작정하고 코미디물 찍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B: Malcolm in the Middle (말콤네 좀 말려줘) (2000~2006)

초등학교 영재반에 들어간 말콤과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재능을 타고난 그의 형제들, 중산층 노동계급 가족 이야기와 성장기를 보여준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코믹 연기가 발군이다.
무난한 가족 시트콤처럼 보이지만 생각외로 수위가 굉장히 세다. 사춘기 아이들은 항상 발정이 나 있고 아빠는 피임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섹스중독자, 엄마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독재자다. 현실적인 설정 및 배경과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밸런스가 꽤 훌륭하다.


C: Veep (부통령이 필요해) (2012~2019)

재밌기는 무지하게 재밌는데 상황보다는 대사빨에 지나치게 기대는 경향이 있어서 B보다는 C에 둔다.
영국 시리즈 <The Thick of It>의 미국 리메이크며 원작자 아르만도 이아누치가 작가로 참여했다. 시즌 4부터 이아누치가 고국으로 돌아가서 작가가 바뀌는데 이때부터 아주 살짝 노잼으로 기운다.



C: The Office (오피스) (2005~2013)

볼 땐 재밌지만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아주 높게 평가는 못 한다. 제지회사 바깥의 세계관이 제대로 구축이 안 되어서 스토리가 한정적이다. 결국 스티브 카렐 배우 한 명의 개인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짐과 팸은 결국 언제 제대로 사귈까 떡밥만 길게 끈다.
스티브 카렐이 떠나고 제임스 스페이더가 들어왔을 때 제임스 스페이더의 캐릭터를 좀더 제대로 살렸으면 훨씬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이 크다. 


C: That '70s Show (요절복통 70쇼) (1998~2006)

70쇼를 보게 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로보캅>, <포트리스>에 출연한 커트우드 스미스가 너무 좋아서.
본래 70년대 시대적 분위기와 팝컬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기획된 것으로 아는데 몇 시즌 거듭되면서 시대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인 시리즈는 몇 시즌 넘긴 뒤부터는 시간적 연속성에 있어서 다소간 무리수를 불가피하게 두게 된다. 70쇼에서 그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물들 간 다이내믹스에 새로움을 기하고자 계속 새로운 인물을 소개하곤 하는데 죄다 별 매력이 없어서 몇 회만에 없애버리고 다시 새로운 인물을 만들기를 반복한다.
시즌 7 이후 토퍼 그레이스가 스파이더맨3을 찍으러 가면서 사실상 주인공이었던 에릭이 자리를 비우고 랜디(조쉬 마이어스)로 대체되는데 얘가 너무 매력이 없어서 프로그램 자체가 통째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70쇼의 최소 7할이 토퍼 그레이스의 대사 전달력에 의존했다는 사실이 뽀록난다.


C: The Good Place (굿플레이스) (2016~2020)

마이클 슈어가 만들었대서 봤는데 에피소드 숫자가 적어서 끝까지 봤지, 더 많았으면 다 안 봤을 것 같다.
크리스틴 벨이 연기한 엘리노어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처음부터 'flanderization'되어 있는 것 같고 매력이 없다. 그나마 테드 댄슨이 중심을 잘 잡아줘서 봐줄 만하다.

C: Lucky Louie (럭키 루이) (2006)
시즌 1만 방영하고 제작 중단되었고 현지에서 시청율과 평가도 저조했지만 아마 한국에서는 이거 본 사람이 꽤 많을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잊을 만하면 몇몇 장면들이 짤방으로 돌기 때문이다.
실제 관중 앞에서 라이브로 촬영해서 웃음소리가 진짜 웃음소리다. 
출연진 대부분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스탠드업코미디언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톤이 매우 독특하다. 뭐가 어떻게 독특한지는 설명하지 못하겠다만.
대사들이 아주 상스럽고 저속해서 배우들의 훌륭한 대사 전달력으로 들으면 그것들 자체로 아주 웃기다. 다만 그러한 '원-라이너'(한 문장짜리 조크)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D: The Ranch (더 랜치) (2016~2020)

70쇼 출연진이 다수 출연한대서 호기심으로 봤는데 전체적으로 너무 심심하다.


D: The Big Bang Theory (빅뱅이론) (2007~2019)

똑똑한데 사회성은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소재는 좋은데 지나치게 반복적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사이먼 헬버그의 니콜라스 케이지 성대모사밖에 없다.

2021년 2월 4일 목요일

<관종의 조건> 리뷰


 




조회수에 자아를 의탁하는 사람들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 젊은이들의 '노빠꾸 인생' 스턴트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 아니 '선을 넘고' 있다. 몇가지 예만 들어도 눈살 찌푸려지고 탄식 나오게 만들기는 충분하다. 수직으로 점프한 사람의 다리를 양 옆에 서 있던 두 사람이 걷어차서 공중제비를 돌게 만드는 '대가리 깨기 챌린지'(Skullbreaker challenge), 콘센트에 플러그를 느슨하게 꽂고 접속부위에 동전을 갖다대는 '콘센트 챌린지'(Outlet challenge), 캡슐형 세탁 세제를 입 안에 넣고 터뜨리는 '타이드 팟 챌린지'(Tide Pod challenge), 공중화장실 좌변기 시트를 혀로 핥는 '코로나 챌린지'(Corona challenge) , 조회수는 올리면서 인간 지능의 바닥은 내리는 관심종자(이하 관종)들의 망동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상상을 음산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조회수 자체가 경제적 가치로 치환될 수 있는 경제 체제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관종이라는 말은 더 이상 부정적인 멸칭이 아니라 하나의 미덕과 같은 것이 되고 있다. 자연히 '나쁜 관종''좋은 관종'을 구별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다. 임홍택 작가의 <관종의 조건>이 대표적이다.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으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다. 나는 처음에 <90년생이 온다>라는 제목을 보고 당연히 사회학 저서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386세대의 2세들이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8-90년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 아래서도 이전 세대와 대동소이하게 격무에 시달리면서 그럼에도 임금노동만으로는 개인의 영달은 언감생심인바 빚을 내면서까지 주식에 투자하고 이른바 일상의 금융화의 의인화된 표상의 집단으로 떠오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제 변화에 대한 간략한 고찰을 담은 책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 책은 아니었고,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법’, ‘꼰대가 되지 않는 법에 가까운 것 같다. 기업들의 입장에서 새롭게 중심적인 소비자로 발돋움하는 90년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잘 하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을 듯하다.

 

사회학 연구서 아니라 자기경영서에 가깝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아

 <관종의 조건><90년생이 온다>속편혹은 스핀오프라 할 수 있겠다. <90년생이 온다>를 보기 전에 <관종의 조건>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도 비슷하게, 경거망동을 일삼는 이상한 관종들이 출몰하게 되는 문화사회적 제 조건에 대한 논의이겠거니 하는 기대를 가졌다. 관종의 문화사회적 조건인줄 알았는데, 읽어보니까 쓸모 있는 관종이 되는 조건에 대한 책이다. 즉 여기서 조건은 관종이 되려면 ~해야 한다는 그러한 조건을 말한다. 심도 있는 사회학적 논의를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사회학이나 문화연구 저서가 아니라 자기경영서 혹은 마케팅 저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가볍기만 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어디 외진 데 짱박혀서 사회와 완전히 고립된 채 자연인으로 살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관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몇몇 대중문화 셀러브리티에 빗대어 일깨워준다. 축구선수로 예를 들면 축구 실력 자체에 있어서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수 있지만 대중적 인기는 엄청난 격차를 벌리는 경우가 다수 있다. 스스로 포장을 얼마나 잘하고 대중미디어에 얼마나 꾸준히 자신을 노출시키는가의 차이에 기인한다. 즉 더 잘 나가는 선수가 되고 몸값을 높이려면 실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금은 겸손이 미덕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관종시대에 성공하려면, 특유의 매력자본 어필해야

 이전까지는 이를테면 이른바 스펙이 포장지로 기능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지나치게 흔한 것이 되어버려 변별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것들 사이에서 눈에 띌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뽐낼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겸손하되 일정량의 자신감을 적시적소에 내비칠 수 있어야 한다. 내실을 갖추고 화려해져야 한다. 화려함에 그쳐서는 안 된다. 다른 대동소이하게 화려한 것들 사이에서 부각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매력을 내보여야 한다. 자신의 인생 궤적에 스토리텔링을 부여하여 흥미로운 캐릭터로 거듭나야 한다.

 주목경제 시대의 상품들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무한에 가깝게 생산되는 재화들 가운데 그만의 독특한 상징자본을 확보해 성능과 내구력을 넘어서는 특유의 매력으로 어필해야 시장에서 살아남는다. 가격 차이가 열 배 이상 나는 두 량의 자동차가 있다고 가정할 때 과연 둘 사이의 성능에도 그에 준하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상품이 지니는 기호, 브랜드가 관심을 끌고 값을 높인다.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의 무기는 개성이다라는 식의 90년대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이야기의 재탕이 아니다. 지금은 맞춤형 생산 시대다. 인력도 상품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외일 리 없다.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구직하는 사람은 많다. 이들 가운데서 도드라져 보이려면 스펙 쌓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목 경쟁을 벌여야 한다. 자기소개서를 허접한 인스타그램 명언으로 치장하라는 것도 아니고 면접장에서 춤추고 성대모사를 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공략하는 대상에 따라 맞춤형 관종질을 해야 한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으로 넘겨진다.

 

인기 필수 요소나열식으로 전개한 서술은 아쉬워뒷북손가락질이 더 무섭다

 좋은 관종이 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면서 관종질을 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한 <관종의 조건>은 그래서 그 두 가지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구심이 든다. 예시로 들고 있는 온갖 밈meme들은 진부하고, 하루만 지나도 그날그날 타임라인의 플로우에서 밀려나는 세태를 생각해 볼 때 이미 낡은 것들에 가깝다. 혹여나 회사의 기획자나 경영진이 이 책을 참고하여 온갖 인기 영상을 섭렵하고 어떤 신제품을 내놓은들, 기업의 업무 프로세스를 생각할 때 해당 기획이 실현될 즈음 대중의 관심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흩어져서 완전히 다른 형태로 재조직되어 있을 것이다. ‘관종세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경영진의 기대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본래 단행본으로 되어 있는 오늘날 트렌드에 대한 제 논의는 뒷북의 혐의로부터 자유롭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1982년생 작가가 알려주는 90년대생이 현대 사회에서 관종질로 생존하는 법이라는 점에서 본서는 젊은이들이 지침서로 삼는 자기경영서의 탈을 쓴, 경영인들이 젊은 소비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읽는 마케팅서이며 어느 한 쪽도 충분치 못한 것이다.

 

90년대생에게 귀 기울이기

 그래도 관종세대에 어필하고자 하는 기업가들이나 경영진에게 나름의 대책을 제시하자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90년대 생을 굳이 알려고 하지 말고 90년대 생에게 결정권을 과감하게 쥐어주라는 것이다. 그 정도의 결단이 없다면 90년대생을 상대로 특별한 성공을 얻어내긴 힘들다. 아마도 밈이 닳고 닳아서, 그리고 결과물의 퀄리티를 파악할 수 있는 감식안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승인된 결과물은 마치 오래된 짤방처럼 뭉개진 픽셀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경영진이 정말로 90년대생을 사로잡는 비법을 알고 싶다면 그것을 가장 잘 아는 90년대생에게 전권을 쥐어주고, 자신이 가진 권한은 90년대생에게 결정권을 밀어주는 데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전문적인 영역에서 세부사항은 전문가나 기술자에게 위임하고 그것을 간섭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많은 기업에서 젊은 세대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보일러를 고치러 온 기사에게 배관이나 작업 과정에 대해서 우리가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보일러 내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90년대생도 똑같이 바라봐야 한다. 보일러와 자동차는 삶의 필수품이지만 그것의 작동 방식이나 수리 방법을 모두가 알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한다면, 콘텐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당장 권한을 이양하거나 나누기 힘들다면 두 번째 조언이 있다. 이 책에 나온 내용이나 기획은 모두 선택지에서 배제해 나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의 함의 또한 쓸모 있는 관종에 대한 부정신학적 접근으로 점철되어 있다. 시류를 타려 하지 말고 유행에 상관없는 필수적인 무언가를 충실히 만들고 기획하는 데 힘쓰는 게 좋다. 말하자면 기본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무형의 아이디어를 경제적 가치가 뛰어난 상품으로 계발하고 정착시키는 데는 단순한 상품을 제조하거나 생산하는 것에 비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수반된다. 나이키나 애플, 스타벅스의 브랜드 가치나 혹은 한두 마디 슬로건으로 단칼에 정리될 수 있는 그들의 기업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시류에 잘 편승하면 한두번 반짝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그뿐이다. 유행에 민감한 것보다 품질이 더 중요하다. 가장 간단한 예시를 들자면 유행어로 범벅된 광고는 1년만 지나도 낡아 보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창작과비평 196호 <그런 세대는 없다> 촌평. 누가 왜 자꾸 그런 세대가 있다고 우기는가

  나는 386 세대 (‘586’, ‘n86’ 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 을 선호한다 ) 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 특히 386 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