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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트콤 시리즈 추천 및 티어 리스트

 추천 리스트 만들고 S에서 D까지 등급을 매길 만큼은 미국 시트콤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하여 글로 정리해본다. 모두 최소 1시즌 이상은 본 것들이다.

 F를 매길 정도로 형편 없는 것들은 아예 안 보거나 한두 편 보고 끝냈기 때문에 평가를 할 수가 없다. 말인즉 여기서 평가가 박해도 어느 정도 재미는 보장한다.


S: Arrested Development (못말리는 패밀리) (2003~2006, 2013, 2018)


살면서 본 것 중에 제일 웃기다.
애니메이션 Bojack Horseman을 너무 재밌게 봐서 목소리 연기를 한 윌 아넷의 대표작을 안 볼 수 없었는데 정말 보기를 잘했다.
시즌 3까지 나오고 캔슬됐다가 2012년에 넷플릭스가 부활시켜서 시즌 5까지 나왔다.
넷플릭스 한국 계정으로는 볼 수가 없고 다른 데서도 도저히 볼 방법이 없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시즌 4부터는 노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어쨌건 시즌 3까지는 기념비적으로 웃기다. 
부동산 재벌 일가가 사기죄에 연루되고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 이야기다.
매 회 3~4개의 서브플롯이 전개된다. 처음에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가 일이 진행되면서 서로 한 데 꼬이면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충돌하여 터져버리는데 이때 정말 배꼽 잡는다.


A: Community (커뮤니티) (2009~2015)


도널드 글로버, 켄 정의 출세작이다.
이것도 재밌게 본 애니메이션을 계기로 보게 된 것. Rick & Morty의 작가 댄 하먼이 만들었다고 해서 봤다. 
릭 앤 모티를 본 사람은 동의할 텐데, 평소에 미국의 상업영화, 가요, 드라마, 코믹스 등 팝컬처에 이렇다 할 취미가 없이 보면 재미가 많이 반감된다.
커뮤니티가 특히 그렇다. 모든 에피소드가 패러디와 오마주, 패러디의 패러디다.
잘 나가던 변호사였다가 학위 위조가 드러나 다시 학위를 받기 위해 2년제 대학(커뮤니티 컬리지)에 들어간 제프 윙어(조엘 맥헤일)라는 사람의 이야기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와 함께 스터디그룹에 들어간 아베드(대니 푸디)라는 청년이다. 모든 인간관계, 세상사를 팝컬처의 렌즈를 통해 보는 아베드의 시선에서,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패러디처럼 진행된다.
시즌 4가 제작될 때는 댄 하먼이 잠시 구설수 때문에 작가진에 참여를 못했는데 그래서 재미가 덜하지만 다른 평범한 시트콤들의 전성기 만큼은 한다.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30Rock>, <빅뱅이론> 등에 비하면 시청률이 매우 저조했지만 가장 열정적인 마니아층이 있다.
시트콤의 시트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A: It's Always Sunny In Philadelphia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 (2005~ )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의 실사판이라고 하면 될 듯하다.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다만 사우스파크는 몇개만 보면 금방 질리는데 이건 전혀 안 질린다. 시즌 14까지 나오고 지금도 계속 나오는데도 말이다.
주인공들은 죄다 형편없는 인간들이다. 의도는 좋고 선하지만 의도치 않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악의로 가득하다. 주변에 착하고 멀쩡한 사람이 있으면 인생을 망가뜨려버린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사기나 음모를 획책하고 재미 좀 보는가 싶다가 응징당하는 이야기다.
에피소드 간 편차는 좀 있지만 대니 드비토의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하여 어지간히 재미없어도 이 사람 혼자서 다 살린다. 


B: 30 Rock (30록) (2016~2013)

30 Rock은 30 Rockefeller Plaza의 약칭이며 NBC방송국이 위치한 동네다. 티나 페이가 SNL의 작가 및 연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가상의 코미디프로그램 메인작가로 일하는 리즈 레몬이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사진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듯이 보통내기는 아니다. 티나 페이는 한국에서는 새라 페일린을 패러디한 리버럴 페미니스트 코미디언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할리우드 리무진 리버럴' 풍자와 조롱을 아주 신랄하게 한다.
처음 두 시즌 정도는 현실적인 정치-방송사-제작진-연예인 간 갈등과 사건을 묘사한 시트콤이었다가 뒤로 갈수록 인물들은 만화 캐릭터처럼 되고(캐릭터의 몇몇 특징만 남고 극단적으로 되는 것을 Flanderization이라고 부른다) 초현실적이 되는데 오히려 더 재밌다.


B: Parks and Recreation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2009~2015)

크리스 프랫의 출세작이다.
<오피스> 작가였던 마이클 슈어가 따로 나와서 아류작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제지회사가 아니라 시청이다.
아류작이지만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을 고평가하는 이유는 <오피스>보다 훨씬 다채롭기 때문이다. <오피스>가 영국에서 수입될 때는 캐릭터가 사실상 네 명(마이클, 짐, 팸, 드와이트)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NPC에 가까웠다. 반면 <팍 앤 레>에서는 가상의 소도시(교육 수준, 시민 수준이 매우 낮고 비만율은 매우 높은)를 만들고, 개성 있고 각자의 스토리가 있고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을 다수 등장시킨다. 그 덕에 등장인물 중 누가 한 데 엮이든지간에 꽤 그럴싸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특정 배우의 개인기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굉장히 무해한 웃음을 준다. 초반에는 오피스처럼 민망하고 어색한 상황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웃음을 유도하고 시청자로 하여금 몸둘 바를 모르게 만드는 게 코미디 루틴이었는데 두 번째 시즌부터 매우 편한 시트콤이 된다. 그 때문인지 앉은 자리에서 여덟 편을 연속으로 봐도 전혀 지치지 않는다.


B: Brooklyn Nine-nine (브루클린 나인나인) (2013~2021)


마이클 슈어가 만든 시트콤은 대체로 보기가 편하다.
뉴욕 시 경찰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액션이나 추리가 많지는 않고 동료들 간의 이야기, 경찰서 내 정치가 주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 문제, 인종 문제가 유쾌하지만 가볍지는 않게 다뤄진다.
굉장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코미디로 평가 받는다. 아주 가끔 설교조일 때가 있지만 살아있는 듯한 캐릭터들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쉽게 몰입이 되어 문제되지 않는다.
흑인 동성애자, 라틴계 양성애자 내세우며 "inclusive"한 티는 많이 내는데 내 기억으로 아시안은 딱 한 번 해커로 출연한다.


B: Curb Your Enthusiasm (커브 유어 엔수시아즘) (2000~ )

<사인펠드>의 작가 래리 데이비드가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제리 사인펠드가 너무 연기가 안 늘어서 직접 연기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다.
래리 데이비드는 <사인펠드> 작가로 떼돈을 번 자신을 연기한다. 본인의 극화된 시니컬하고 냉정한 성격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와 해프닝을 아주 웃기면서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위선을 극도로 싫어해서 인사치레, 해야 하는 말은 안 하고 안 해도 되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굳이 해서 갈등이 일어난다. 이렇게만 보면 사회화 덜 된 심술궂은 늙은이로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상하게 시청자들은 래리 데이비드를 응원하게 된다.
대본에는 상황 설명만 되어 있고 대사는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한다. 홍상수 감독이 작정하고 코미디물 찍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B: Malcolm in the Middle (말콤네 좀 말려줘) (2000~2006)

초등학교 영재반에 들어간 말콤과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재능을 타고난 그의 형제들, 중산층 노동계급 가족 이야기와 성장기를 보여준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코믹 연기가 발군이다.
무난한 가족 시트콤처럼 보이지만 생각외로 수위가 굉장히 세다. 사춘기 아이들은 항상 발정이 나 있고 아빠는 피임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섹스중독자, 엄마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독재자다. 현실적인 설정 및 배경과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밸런스가 꽤 훌륭하다.


C: Veep (부통령이 필요해) (2012~2019)

재밌기는 무지하게 재밌는데 상황보다는 대사빨에 지나치게 기대는 경향이 있어서 B보다는 C에 둔다.
영국 시리즈 <The Thick of It>의 미국 리메이크며 원작자 아르만도 이아누치가 작가로 참여했다. 시즌 4부터 이아누치가 고국으로 돌아가서 작가가 바뀌는데 이때부터 아주 살짝 노잼으로 기운다.



C: The Office (오피스) (2005~2013)

볼 땐 재밌지만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아주 높게 평가는 못 한다. 제지회사 바깥의 세계관이 제대로 구축이 안 되어서 스토리가 한정적이다. 결국 스티브 카렐 배우 한 명의 개인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짐과 팸은 결국 언제 제대로 사귈까 떡밥만 길게 끈다.
스티브 카렐이 떠나고 제임스 스페이더가 들어왔을 때 제임스 스페이더의 캐릭터를 좀더 제대로 살렸으면 훨씬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이 크다. 


C: That '70s Show (요절복통 70쇼) (1998~2006)

70쇼를 보게 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로보캅>, <포트리스>에 출연한 커트우드 스미스가 너무 좋아서.
본래 70년대 시대적 분위기와 팝컬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기획된 것으로 아는데 몇 시즌 거듭되면서 시대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인 시리즈는 몇 시즌 넘긴 뒤부터는 시간적 연속성에 있어서 다소간 무리수를 불가피하게 두게 된다. 70쇼에서 그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물들 간 다이내믹스에 새로움을 기하고자 계속 새로운 인물을 소개하곤 하는데 죄다 별 매력이 없어서 몇 회만에 없애버리고 다시 새로운 인물을 만들기를 반복한다.
시즌 7 이후 토퍼 그레이스가 스파이더맨3을 찍으러 가면서 사실상 주인공이었던 에릭이 자리를 비우고 랜디(조쉬 마이어스)로 대체되는데 얘가 너무 매력이 없어서 프로그램 자체가 통째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70쇼의 최소 7할이 토퍼 그레이스의 대사 전달력에 의존했다는 사실이 뽀록난다.


C: The Good Place (굿플레이스) (2016~2020)

마이클 슈어가 만들었대서 봤는데 에피소드 숫자가 적어서 끝까지 봤지, 더 많았으면 다 안 봤을 것 같다.
크리스틴 벨이 연기한 엘리노어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처음부터 'flanderization'되어 있는 것 같고 매력이 없다. 그나마 테드 댄슨이 중심을 잘 잡아줘서 봐줄 만하다.

C: Lucky Louie (럭키 루이) (2006)
시즌 1만 방영하고 제작 중단되었고 현지에서 시청율과 평가도 저조했지만 아마 한국에서는 이거 본 사람이 꽤 많을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잊을 만하면 몇몇 장면들이 짤방으로 돌기 때문이다.
실제 관중 앞에서 라이브로 촬영해서 웃음소리가 진짜 웃음소리다. 
출연진 대부분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스탠드업코미디언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톤이 매우 독특하다. 뭐가 어떻게 독특한지는 설명하지 못하겠다만.
대사들이 아주 상스럽고 저속해서 배우들의 훌륭한 대사 전달력으로 들으면 그것들 자체로 아주 웃기다. 다만 그러한 '원-라이너'(한 문장짜리 조크)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D: The Ranch (더 랜치) (2016~2020)

70쇼 출연진이 다수 출연한대서 호기심으로 봤는데 전체적으로 너무 심심하다.


D: The Big Bang Theory (빅뱅이론) (2007~2019)

똑똑한데 사회성은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소재는 좋은데 지나치게 반복적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사이먼 헬버그의 니콜라스 케이지 성대모사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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