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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20.3.19 번역

서구사회가 마비되고 무너지는 동안 우리는 벌써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끓는 물에서 앗뜨거 하며 재빨리 빠져나오는 것과 미지근한 물에서 서서히 말라죽는 것에 비유되는 것도 가능하려나 생각하게 된다. 체계의 발본적인 재구조화에 대한 동의가 서구사회에서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삽시간에 모아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된다면 한국은 위기 극복에 취해 골든타임을 놓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혁보다 혁명이 쉽다는 얘기가 있듯이 이런 생각은 좀 무책임하다. 느닷없는 허수아비 때리기로 보일 수 있겠는데 좌파진영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일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역시나 트위터에 노동은 못하게 하지 않으면서 나가 노는 건 못하게 하는 건 개인에게만 책임을 부과하는 거라고 볼멘소리 하는 사람이 있다. 상호 양보와 자제를 요구하는 것과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슬라보예 지젝 -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20.3.19 번역

 
코로나와 싸우는 동안 우리 사회는 기본적인 윤리도 포기할 기세다. 그리고 도날드 트럼프는 소련 스타일의 전쟁 공산주의를 다시 소개하고 있다.
 
요새 나는 차라리 바이러스에 감염되기를 바랄 때가 있다. 적어도 지치게 만드는 불확실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 잠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나의 불안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준다. 한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늘 저녁을 기다리며 일상의 공포를 잊기 위해 어서 잠에 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자는 게 두렵다. 늘 악몽을 꾸고 공황을 느끼며 깨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현실의 악몽을 꾼다.
 
무슨 현실? 현재 진행 중인 전염병 이후 발생할 제 변화를 감당하기 위해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를 감내해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나 또한 이러한 주장을 많이 해왔다). 그런데 급진적인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은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을 대면케 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일상에서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돌아가기를 멈춘 것이다. 전체 국가가 록다운 체제로 들어가 많은 이들이 집 안에 발이 묶여 있다(이러한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생존할 테지만, 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불가능을 행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질서의 좌표 안에서는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것 말이다. 불가능했던 것은 실현되었고 세계는 멈췄다. 그리고 불가능이야말로 앞으로 최악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그 최악이란 뭘까?
 
내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야만주의로의 회귀, 집단 공황과 무질서로 잔인무도한 생존 폭력이 횡행하는 것이 아니다(다만 의료 보건 등 공공영역의 붕괴의 가능성 때문에 이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하겠다). 대놓고 야만으로 퇴행하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은 무자비한 생존주의적 조치들이 가해지면서도 유감과 연민이 뒤따르며 전문가의 의견에 의해 뒷받침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권력자들이 우리를 호명할 때 일정한 톤의 변화가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침착하게 하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기적으로 암울한 예측을 내놓는다. 판데믹이 진정되는 데 최소 2년이 걸리며 최종적으로 바이러스가 인류의 60-70%를 감염시키고 수백만을 죽일 것이라는 등. 요컨대 이들이 관철시키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사회 윤리의 기본 전제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노약자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탈리아는 이미 그렇게 선언했고, 사태가 더 악화되면 80세 이상 노년층 혹은 중병을 앓는 환자들은 그저 죽도록 내버려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른바 적자생존의 논리는 군대윤리의 기본 원리조차도 위반한다. 전쟁 뒤에 아무리 가망이 없어 보이더라도 중상을 입은 장병들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말이다(병원에서 이미 암환자들을 내치고 있는 것을 보면 놀라울 것도 없다).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건대,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다. 임종에 가까운 환자들을 위한 안락사 약품을 고르게 배분하여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다. 그럼에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아낌없이, 비용이 얼마가 되었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도와서 생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조르조 아감벤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우리 사회가 벌거벗은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사실상 모든 것(평범한 삶의 조건, 사회적 관계, 노동, 우정, 사랑, 신념 등)을 희생하도록 종용되었다. 벌거벗은 생명(그리고 그것을 잃을 위험)은 인민들을 한 데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만들고 분열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들은 이보다 더 해석에 열려 있다. 벌거벗은 생명은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도 바이러스 숙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아들들은 나에게 병을 옮길까 우려하며 나를 피하고 있다(애들에게는 사소한 질병일 수 있어도 나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지난 며칠 간 우리는 각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며 새로운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지겹게 듣고 있다. 미디어는 멋대로 행동하여 다른 이들을 위험에 노출시킨 사람들(한 남자가 가게에 들어가서 기침을 했다 등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환경 문제 관련해서 미디어가 개인들의 책임을 지겹도록 강조하는 것과 같다. 개인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경제 체계와 사회 체계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와의 투쟁은 이데올로기적 농간에 맞선 투쟁과 함께 해야 하며 생태학적 투쟁 일반의 일부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 케이트 존스가 지적하듯이 야생에서 인류로의 질병 전이는 경제 발전의 숨어 있던 대가다. 우리와 같은 존재는 모든 환경에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바이러스가 더 쉽게 전염되는 서식지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계속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즉 인류를 위한 지구적 의료체계를 갖추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연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야 한다. 바이러스는 감자, 곡물, 올리브와 같이 우리가 먹는 음식의 원천이 되는 식물들도 공격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글로벌한 그림을, 그것이 함축하는 모든 역설들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를테면, 중국의 록다운 조치가 바이러스 때문에 사망한 사람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살렸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사망자 수 통계를 믿을 수 있다면): “환경 경제학자 마샬 버크에 따르면 오염된 공기와 그에 노출된 사람의 때 이른 사망 사이에 확실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가 말하길 이것을 상기한다면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은 코로나19가 야기한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대기오염의 감소 덕에 살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숫자보다 바이러스 자체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보다 많으냐는 것이다.’ ‘극히 보수적으로 추정한다고 할지라도, 내 생각에 답은 예스다.’ 겨우 두 달 동안의 대기오염 감소는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만 5세 이하의 아이들 4천명과 70세 이상의 노인 73천명을 살렸다.”
 
우리는 삼중의 위기에 빠져 있다: 의학적(전염병으로 인한), 경제적(전염병이 어떻게 종결되든 위기는 심각할 것이다), 그리고(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정신건강 관련한 위기이다. 수십억 인류의 삶-세계의 기본 좌표는 해체되고 있으며 그 변화는 해외여행에서 일상의 신체 접촉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시급히 주식시장과 이윤의 좌표에서 벗어나서 사고해야 하며 필수 자원을 생산하고 배분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를테면 당국에서 어떤 회사가 수백만 장의 마스크를 보관해두고 적절한 때에 판매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회사와 결코 협상해서는 안 된다. 마스크는 즉각 징발해 마땅하다.
 
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튀빙겐 소재 제약회사 CureVac10억달러를 제안하며 미국만을 위한백신을 확보하기를 요청했다. 독일 보건부장관 옌스 슈판은 트럼프 행정부의 제안이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하며 CureVac은 오직 세계를 위해백신을 개발하지, “한 국가만을 위해개발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야만과 문명 사이의 투쟁의 좋은 예를 목격한다. 그런데 트럼프가 비상 의료 공급을 위한 생산을 긴급히 증가시키기 위해 정부가 민간 산업에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만드는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령한 것도 또 다른 사례이다. “트럼프가 민간 산업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대통령은 연방 조항을 발령하여 판데믹에 발맞춰 정부의 민간 영역 통제를 가능케 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필요에 따라국내 산업 생산을 지도할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에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내가 몇 주 전에 공산주의를 거론했을 때 나는 조롱받았지만 이제는 트럼프가 민간 자본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했다.” 불과 일주일 전이라도 이런 헤드라인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비슷한 조치들이 많이 뒤따를 것이고 국가운영 보건 체계에 과부하가 생기면 자주적 지역 공동체의 필요성도 제기될 것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를 가능케 하려면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가 기능해야 한다: 전기, 음식, 의약품 공급 등(우리는 곧 회복한 자들과 어느 정도 면역력이 있는 자들을 긴급 공공 노동에 동원시키기 위해 이들의 리스트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유토피아 공산주의의 비전이 아니라, 단순 생존의 필요로 인해 도입된 공산주의이다. 안타깝게도 이 공산주의의 유형은 1918년 소련에서 전쟁 공산주의라 불렸던 유형이다.
 
흔히 말하듯,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자다. 트럼프도 모든 성인 시민들에게 1,000달러를 분배하는 기본소득의 한 형태를 고려하고 있다. 수조 달러가 시장 원칙들을 위반하며 쓰여질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 누구를 위해서? 이 강제된 사회주의는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가 될 것인가(2008년 수백만의 보통사람들이 재산을 잃는 동안 은행들이 구제되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번 전염병도 나오미 클라인이 재난 자본주의라 일컬은 길고 슬픈 이야기의 한 챕터에 불과한 것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그로부터 새로운(시시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균형은 더 갖춘) 세계 질서가 탄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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