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7일 화요일

총선의 제문제

본 블로그 이름이 그렇듯 이 글 제목도 다소 장난스레 지은 것이니 높은 수준의 분석적인 글을 기대하지는 마시기를 바란다. 곳곳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한 2년 전부터 친한 친구들을 상대로 어떤 실험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 부동층을 설득하는 내러티브를 찾는 것이다. 중고교 동창 대부분은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나름의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양대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들은 중도를 자처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직전 대선과 지선에서 민주당에 투표했을지라도 언제든 지지를 거두고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에 투표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도처에서 기꺼이 적극적으로 찾는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대가리가 깨졌다'(대가리 깨져도 문재인 즉 대깨문에 빗대어 문재인정부/민주당 지지 철회를 뜻하는 말)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지만 고맙게도 시간을 내서 이번 총선 관련하여, 여전히 대깨문으로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친구들에게 마음껏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 다음은 그 자리에서 얘기한 것들을 글로 정리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과 민주당이 극좌라서 지지하지 못한다는 말을 동시에 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다. 엄밀히 말해 모순은 아니다. 둘 다 똑같이 부패하고 금뱃지 다는 데만 혈안이 된 사람들이지만 좌파는 더 싫기 때문에 그 중에서 차라리 부패한 보수를 찍겠다는 것일 테다.
 
그러나 한 가지 면에서 오류가 있다. 민주당은 극좌도 좌파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보아 일말의 진보적인 면은 있을지언정 진보라는 수사가 민주당의 핵심일 수는 없다. 표를 하나 만들어봤다. 한국 정치의 오버톤 윈도(Overton Window), 즉 사상의 허용 범위이다. 범위는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좁혀들어갔다. 
현재 한국 정치 지형은 파란색 사각형과 그 오른쪽에 국한한다. 민주당은 잘 쳐줘야 제3의길/사회자유주의 정당이다. 사회자유주의에서 사민주의까지 기조는 자본주의를 ‘고쳐 쓰자’이다. 사민주의를 넘어선 극좌진영만이 생산양식의 근본적 재구조화를 지향한다. 미래통합당은 신자유주의와 권위적보수주의에 걸쳐 있다.

한국에서 극좌와 극우가 비등한 세력을 갖고 경합했던 시절은 1950년대 이후로 없다. 이승만에 도전했던 진보당 정치인 조봉암의 사형 이후 구심점을 잃은 진보세력은 박정희의 청소로 인해 궤멸했다.
 
박정희 때 가파른 경제성장으로 중산층이 성장하면서 70년대 학번 대학생들로부터 정치적 의식이 각성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대학 내 민주화 및 사회변혁 동아리가 하나둘씩 생기는데 이들을 일컫는 운동권 집단은 전두환의 문화 유화 정책을 계기로 절정을 이룬다. 이른바 386세대다. 이들이 처음으로 국회에 대거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 1996년~2004년까지인데 당시 이들이 30대여서 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지금은 n86이라고 한다.
 
80년대 중후반 당시 운동권은 아주 거칠게 두 진영으로 나뉘어서 서로 논쟁을 벌였다. NL(민족해방-자주파[주사파])과 PD(민중민주주의-평등파). 저항의 담론을 만들기 위해서는 저항 대상과 저항 주체를 설정해야 하는데 양 진영은 상이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면 대상-주체의 관계를 NL은 <미국이 세운 괴뢰정부 - 한민족>, PD는 <파시스트 정부 - 노동계급>으로 설정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북한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북한에 환상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고 따라서 NL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다. 반면 좀 더 맑스주의 전통을 따르던 PD들에게는 김일성도 노동계급을 수탈하는 독재자에 불과했기 때문에 반북성향이었다. NL은 한반도를 미국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남북이 함께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친북성향이었다.
 
이들은 함께 1987년 6월 항쟁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 지지 여부를 두고 다시 갈라졌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중에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진보에 가까운 김대중을 지지하자는 게 운동권 주류의 입장, 단독 진보후보를 내세우자는 게 비주류 입장. 비주류는 PD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은 노태우 당선 뒤 합법 진보정당 창당을 단행, 김문수, 이재오가 지도부로 있었던 민중당이다. 그러나 1990년 총선에서 전멸하여 당은 해산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김영삼의 부름에 응해 미래통합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여 보수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이들을 따라가지 않은 일부는 NL과 재연합해 2004년 민주노동당 열풍을 일으킨다. 그러다 또 갈등이 일어나고 NL주류인 민노당과 PD주류인 진보신당으로 갈렸다가, 진보신당의 스타정치인이었던 심상정 노회찬 등이 다시 민노당 그리고 유시민의 국민참여당과 합쳐서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그런데 통진당 주류였던 NL파들이 당내경선 과정에 장난질을 해서 통진당 사태가 일어나고 심상정 노회찬 유시민 등이 다시 빠져나와서 정의당을 만들었다.
그 외 소련 붕괴를 계기로 사회주의에 환멸을 갖게 된 운동권 다수는 민주당으로 들어갔다. 요컨대 운동권 출신이 많다는 이유로 민주당을 좌파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김대중은 1997년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IMF의 요구사항을 200% 시행했다. 금융 자본시장 개방, 비정규직 정리해고제 노동유연화 등. 재벌개혁은 용두사미에 그쳤다. 재벌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신자유주의정책을 가속화했고 FTA를 추진했다. 이런 탓에 좌파들이 민주당을 아주 싫어한다. 다만 그동안 보수정권 견제를 위해 선거 때만 일시적으로 연합했을 뿐이다.
 
김대중-노무현 집권기 동안 경제위기는 극복되고 파이는 더 커졌다. 그러나 민중에게 돌아오는 몫은 매우 적었다. 오히려 해고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민중의 분노는 이명박의 압승으로 이어졌다. 이명박 때 코스피는 800선까지 곤두박질친다. 08년경제위기의 불가항력에 기인한 것으로 무조건 이명박 개인의 무능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경제위기의 직격타는 피했는데 당시 세계기업들의 중국 아웃소싱 등으로 중국 경제가 급상승하는 중이어서 대중국 무역으로 어느 정도 상쇄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이것도 이명박 개인이 잘한 거라고 하기 어렵다.
 
요컨대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에서는 모든 국가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탓에 경제적 측면에 한해서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게 거의 무의미하다. 더구나 지금은 중국도 정체기여서 가치를 창출할 통로가 극히 제한적이 되었다.
 
지금은 ‘재난자본주의’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지난 백년간의 성장의 대가가 한꺼번에 들이닥치고 있다. 신종바이러스 창궐은 그 일부일 뿐이다.
 
재난자본주의 시대에서 국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자본주의를 고수하는 한, 경제는 장기적인 불황과 극히 단기간의 반등만이 가능하다고 함이 옳다. 이런 때에 경제성장을 외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관건은 장기간의 불황과 지구적 위기 상황에 어떻게 고꾸라지느냐이다. 머리부터 떨어지기와 두 다리로 안착하기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정책적으로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말하는 게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닐 수 있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둘의 차이가 심하게 드러난다. 바로 국민 안전이라는 국가의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할 능력 여부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아직은 100% 드러났다고 할 수 없겠으나 어느 정도 드러난 윤곽을 종합해 요약하면 대충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2014년 4월 16일은 수요일이었다. 박근혜는 맘대로 수요일을 노는 날로 정했다. 상사가 출근 안 한 사무실을 상상해보자. 세월호가 침몰하기 시작한 것은 오전 아홉시다. 열시쯤 안보실에서 전화를 걸었는데 박근혜는 자느라고 안 받았다. 박근혜 최측근들은 박근혜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11시에는 전원이 구출되었다는 오보가 나와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두시쯤 최순실이 청와대에 와서 박근혜는 비로소 상황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미용사를 불러 두 시간 정도 육영수 스타일 올림머리를 준비하고 중앙재난대책본부로 출발했다. 다섯 시쯤 도착해서 ‘구명조끼가 많은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박근혜 때 코로나19가 터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박근혜를 옹립하고 그 밑에서 호가호위하던 정치인들 대부분이 여전히 미래통합당에 다수 남아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친박신당이 따로 있다고 미래통합당이 친박이 아닌 게 아니다. 혹은 이들이 박근혜를 버렸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함량 미달의 인물을 대선후보로 내세운 바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현 정부의 코로나19 대처가 전세계의 귀감이 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봉쇄하지 않고 셧다운도 하지 않은 채 행정력을 오버클럭하여 경제침체를 최소화하면서 위기상황에서 안착하는 중이다. 순전히 질병본부가 잘한 덕이라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다. 이 주장은 한국 외 대부분 나라들의 의료인들이 죄다 무능한 집단이라고 할 때만 말이 된다.
 
중국발 입국을 막지 않아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는 주장은 이탈리아의 사례가 반증한다. 중국에서 감염되고 다른 나라에 있다가 한국에 오는 사람까지 막지 않는 이상, 즉 사실상 국경을 봉쇄하지 않는 이상 입국제한은 무의미하다.
 
문재인 정부가 중국 눈치를 본다는 주장은 반만 맞다. 중국에 아웃소싱하는 대기업 눈치를 본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친기업적 정책은 자국민을 등한시하고 외국만을 위하는 것으로 왜곡되어 보이게 된다.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친다는 점에서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은 대동소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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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5일 일요일

슬라보예 지젝 -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20.3.19 번역

서구사회가 마비되고 무너지는 동안 우리는 벌써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끓는 물에서 앗뜨거 하며 재빨리 빠져나오는 것과 미지근한 물에서 서서히 말라죽는 것에 비유되는 것도 가능하려나 생각하게 된다. 체계의 발본적인 재구조화에 대한 동의가 서구사회에서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삽시간에 모아질 수 있을 거라고 기대된다면 한국은 위기 극복에 취해 골든타임을 놓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혁보다 혁명이 쉽다는 얘기가 있듯이 이런 생각은 좀 무책임하다. 느닷없는 허수아비 때리기로 보일 수 있겠는데 좌파진영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일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역시나 트위터에 노동은 못하게 하지 않으면서 나가 노는 건 못하게 하는 건 개인에게만 책임을 부과하는 거라고 볼멘소리 하는 사람이 있다. 상호 양보와 자제를 요구하는 것과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슬라보예 지젝 -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  20.3.19 번역

 
코로나와 싸우는 동안 우리 사회는 기본적인 윤리도 포기할 기세다. 그리고 도날드 트럼프는 소련 스타일의 “전쟁 공산주의”를 다시 소개하고 있다.
 
요새 나는 차라리 바이러스에 감염되기를 바랄 때가 있다. 적어도 지치게 만드는 불확실성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 잠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나의 불안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준다. 한 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늘 저녁을 기다리며 일상의 공포를 잊기 위해 어서 잠에 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자는 게 두렵다. 늘 악몽을 꾸고 공황을 느끼며 깨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가올 현실의 악몽을 꾼다.
 
무슨 현실? 현재 진행 중인 전염병 이후 발생할 제 변화를 감당하기 위해 급진적인 사회적 변화를 감내해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나 또한 이러한 주장을 많이 해왔다). 그런데 급진적인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은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을 대면케 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 일상에서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가 돌아가기를 멈춘 것이다. 전체 국가가 록다운 체제로 들어가 많은 이들이 집 안에 발이 묶여 있다(이러한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은 생존할 테지만, 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위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불가능을 행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 질서의 좌표 안에서는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것 말이다. 불가능했던 것은 실현되었고 세계는 멈췄다. 그리고 불가능이야말로 앞으로 최악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그 최악이란 뭘까?
 
내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야만주의로의 회귀, 집단 공황과 무질서로 잔인무도한 생존 폭력이 횡행하는 것이 아니다(다만 의료 보건 등 공공영역의 붕괴의 가능성 때문에 이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하겠다). 대놓고 야만으로 퇴행하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은 무자비한 생존주의적 조치들이 가해지면서도 유감과 연민이 뒤따르며 전문가의 의견에 의해 뒷받침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권력자들이 우리를 호명할 때 일정한 톤의 변화가 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침착하게 하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기적으로 암울한 예측을 내놓는다. 판데믹이 진정되는 데 최소 2년이 걸리며 최종적으로 바이러스가 인류의 60-70%를 감염시키고 수백만을 죽일 것이라는 등. 요컨대 이들이 관철시키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리가 사회 윤리의 기본 전제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노약자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탈리아는 이미 그렇게 선언했고, 사태가 더 악화되면 80세 이상 노년층 혹은 중병을 앓는 환자들은 그저 죽도록 내버려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른바 “적자생존”의 논리는 군대윤리의 기본 원리조차도 위반한다. 전쟁 뒤에 아무리 가망이 없어 보이더라도 중상을 입은 장병들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말이다(병원에서 이미 암환자들을 내치고 있는 것을 보면 놀라울 것도 없다).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건대,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다. 임종에 가까운 환자들을 위한 안락사 약품을 고르게 배분하여 불필요한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켜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다. 그럼에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아낌없이, 비용이 얼마가 되었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도와서 생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조르조 아감벤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우리 사회가 벌거벗은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사실상 모든 것(평범한 삶의 조건, 사회적 관계, 노동, 우정, 사랑, 신념 등)을 희생하도록 종용되었다. 벌거벗은 생명(그리고 그것을 잃을 위험)은 인민들을 한 데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만들고 분열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들은 이보다 더 해석에 열려 있다. 벌거벗은 생명은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도 바이러스 숙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아들들은 나에게 병을 옮길까 우려하며 나를 피하고 있다(애들에게는 사소한 질병일 수 있어도 나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지난 며칠 간 우리는 각자 모두에게 책임이 있으며 새로운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지겹게 듣고 있다. 미디어는 멋대로 행동하여 다른 이들을 위험에 노출시킨 사람들(한 남자가 가게에 들어가서 기침을 했다 등등)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환경 문제 관련해서 미디어가 개인들의 책임을 지겹도록 강조하는 것과 같다. 개인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경제 체계와 사회 체계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에 관한 중요한 질문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와의 투쟁은 이데올로기적 농간에 맞선 투쟁과 함께 해야 하며 생태학적 투쟁 일반의 일부로서 그렇게 해야 한다. 케이트 존스가 지적하듯이 야생에서 인류로의 질병 전이는 “경제 발전의 숨어 있던 대가다. 우리와 같은 존재는 모든 환경에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바이러스가 더 쉽게 전염되는 서식지를 계속해서 만들고 있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계속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즉 인류를 위한 지구적 의료체계를 갖추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연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야 한다. 바이러스는 감자, 곡물, 올리브와 같이 우리가 먹는 음식의 원천이 되는 식물들도 공격한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글로벌한 그림을, 그것이 함축하는 모든 역설들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를테면, 중국의 록다운 조치가 바이러스 때문에 사망한 사람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살렸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사망자 수 통계를 믿을 수 있다면): “환경 경제학자 마샬 버크에 따르면 오염된 공기와 그에 노출된 사람의 때 이른 사망 사이에 확실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가 말하길 ‘이것을 상기한다면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은 코로나19가 야기한 경제적 혼란으로 인한 대기오염의 감소 덕에 살 수 있게 된 사람들의 숫자보다 바이러스 자체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보다 많으냐는 것이다.’ ‘극히 보수적으로 추정한다고 할지라도, 내 생각에 답은 예스다.’ 겨우 두 달 동안의 대기오염 감소는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만 5세 이하의 아이들 4천명과 70세 이상의 노인 7만3천명을 살렸다.”
 
우리는 삼중의 위기에 빠져 있다: 의학적(전염병으로 인한), 경제적(전염병이 어떻게 종결되든 위기는 심각할 것이다), 그리고(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정신건강 관련한 위기이다. 수십억 인류의 삶-세계의 기본 좌표는 해체되고 있으며 그 변화는 해외여행에서 일상의 신체 접촉까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시급히 주식시장과 이윤의 좌표에서 벗어나서 사고해야 하며 필수 자원을 생산하고 배분할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를테면 당국에서 어떤 회사가 수백만 장의 마스크를 보관해두고 적절한 때에 판매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회사와 결코 협상해서는 안 된다. 마스크는 즉각 징발해 마땅하다.
 
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튀빙겐 소재 제약회사 CureVac에 10억달러를 제안하며 “미국만을 위한” 백신을 확보하기를 요청했다. 독일 보건부장관 옌스 슈판은 트럼프 행정부의 제안이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하며 CureVac은 오직 “세계를 위해” 백신을 개발하지, “한 국가만을 위해” 개발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야만과 문명 사이의 투쟁의 좋은 예를 목격한다. 그런데 트럼프가 비상 의료 공급을 위한 생산을 긴급히 증가시키기 위해 정부가 민간 산업에 압박을 가할 수 있게 만드는 국방물자생산법을 발령한 것도 또 다른 사례이다. “트럼프가 민간 산업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대통령은 연방 조항을 발령하여 판데믹에 발맞춰 정부의 민간 영역 통제를 가능케 하겠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필요에 따라’ 국내 산업 생산을 지도할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에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내가 몇 주 전에 “공산주의”를 거론했을 때 나는 조롱받았지만 이제는 “트럼프가 민간 자본을 통제하겠다고 선언했다.” 불과 일주일 전이라도 이런 헤드라인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비슷한 조치들이 많이 뒤따를 것이고 국가운영 보건 체계에 과부하가 생기면 자주적 지역 공동체의 필요성도 제기될 것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를 가능케 하려면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가 기능해야 한다: 전기, 음식, 의약품 공급 등(우리는 곧 회복한 자들과 어느 정도 면역력이 있는 자들을 긴급 공공 노동에 동원시키기 위해 이들의 리스트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유토피아 공산주의의 비전이 아니라, 단순 생존의 필요로 인해 도입된 공산주의이다. 안타깝게도 이 공산주의의 유형은 1918년 소련에서 “전쟁 공산주의”라 불렸던 유형이다.
 
흔히 말하듯,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자다. 트럼프도 모든 성인 시민들에게 1,000달러를 분배하는 기본소득의 한 형태를 고려하고 있다. 수조 달러가 시장 원칙들을 위반하며 쓰여질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 누구를 위해서? 이 강제된 사회주의는 부자를 위한 사회주의가 될 것인가(2008년 수백만의 보통사람들이 재산을 잃는 동안 은행들이 구제되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이번 전염병도 나오미 클라인이 “재난 자본주의”라 일컬은 길고 슬픈 이야기의 한 챕터에 불과한 것으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그로부터 새로운(시시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균형은 더 갖춘) 세계 질서가 탄생할 것인가?

2020년 4월 4일 토요일

아감벤 Clarifications 20.3.17 번역

이탈리아의 정치미학자 아감벤이 코로나19 국면에 대해서 한 마디 했다길래 읽어봤는데 다소 김빠지는 감이 있다. 제목이 해명인 이유는 아감벤이 이전에 썼던 짤막한 글이 다소간 논란이 되었어서 추가 설명을 하려는 의도로 쓴 글이기 때문이다. 이전 글도 읽어봤는데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는 똑같다. 지금은 예외상태이며 이 상태가 지속되고 익숙해지는 것이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미천한 배경지식을 동원하여 대충 설명해보자면 여기서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은 세속적 법이 적용되지 않는 신성한 존재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다. 주변부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가 예외상태(비상사태)다. 이런 예외적인 존재들은 늘 있어왔다. 사회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근대로 진입하기 위해 정신병자들이 만들어졌고 자본주의가 돌아가기 위해 실업자가 있어야 하고 등등.
어떤 논란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 배부른 소리나 하고 앉았다는 것이다. 상관있는 얘기일지 모르겠는데, 며칠 전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무슨 아이스버킷챌린지처럼 각자 집 안에서 존 레논의 이매진을 한 구절씩 이어서 불러서 유튜브에 올렸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바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은 다 먹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에서 며칠 만에 실직자가 육백만명 증가했다고 한다. 이런 걸 두고 비상사태라고 해야지 어디 좀 가고 싶은 데 못 가게 하고 데모 못하게 한다고 비상사태 선포 남발할 게 우려된다라고 할 게 아니라.


조르조 아감벤 clarifications 2020.3.17. 번역
 
 
공포는 나쁜 것이지만 안 보이는 척 하려 했던 많은 것들을 드러나게 해준다. 중요한 것은 질병의 심각성에 대해 의견을 보태는 게 아니라 전염병이 야기할 윤리적, 정치적 효과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라를 마비시킨 공황의 물결은 우리 사회가 벌거벗은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탈리아인들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사실상 모든 것(평범한 삶의 조건, 사회적 관계, 노동, 우정, 사랑, 신념 등)을 희생하도록 종용되었다. 벌거벗은 생명(그리고 그것을 잃을 위험)은 인민들을 한 데 모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만들고 분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웃 사람들은,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소설에서 묘사된 전염병의 사례와 같이, 이제는 단지 감염원으로만 간주될 뿐이며 적어도 1미터 이상은 떨어져 있어야 할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죽은 자들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며 우리 사랑하던 사람들의 시신이 어떻게 될지도 제대로 알 수 없다. 교회들은 이상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아무런 기약 없이 이러한 식으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버린 나라에서 인간관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리고 생존만을 유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또한 전염병이 명백히 확인시켜주는 것은, 지난 며칠 간 정부가 나서서 우리로 하여금 익숙해지게 강제한 예외상태가 진정으로 상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전염병 사례가 과거에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과 같이 움직일 자유도 앗아가는 예외상태를 선언할 이유가 된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속적 위기와 비상사태의 조건에서 사는 데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사회적, 정치적 삶은 물론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의 삶까지 모두 순수한 생물학으로 환원되어버렸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속적인 비상사태를 살아가는 사회는 자유 사회라 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자유를 희생시켜온 사회를 살고 있으며 그러한 사회가 영원한 공포와 불안의 상태로 가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바이러스를 전쟁에 비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상조치들은 우리를 통행금지의 상황에 살도록 강제한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급습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은 가장 부조리한 유형의 전쟁이다. 사실상 이건 내전이다. 적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현재만이 아니라 뒤의 일이다. 철조망에서 핵발전소까지 불온한 과학기술을 전쟁이 유산으로 남겼듯이, 보건 비상사태가 종결된 이후에도 정부가 못 다한 여러 실험들이 계속해서 진행될 공산이 크다. 대학교와 공교육을 폐쇄하고 온라인 강의만 진행한다거나, 어떤 문화적 정치적 아젠다가 되었든 일체의 집결이나 집단연설을 금지한다거나, 인간관계에 있어 가능한 한 모든 접촉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 등.

2020년 3월 29일 일요일

지난번 지구적 위기는 세계를 바꾸지 못했지만 이번 위기는 가능할지도

이른바 탈구의 계기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사고 체계, 문제틀로는 현재 맞닥뜨린 문제를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탈구라고 한다고 한다.
내가 3년 전부터 말하고 다니던 게 있는데 한국사회가 최하점을 찍고 반등하고 있다면 서구사회는 정점을 찍고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탄핵과 민주당 집권에 감개무량해서 오바한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 서구를 보고 멀쩡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미국과 서유럽 중심부 국가들 모두 싸잡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저 밑에 있더라도 천천히 새로운 합의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비해 기존의 합의들이 하나둘씩 깨지는 과정에 훨씬 더한 혼란이 불가피하게 따른다고 생각한다.
하나둘씩 깨지는 기존의 합의들 중 하나는 자유주의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한국 모델은 서구 국가들이 따라 하기 아주 어려울 것이다. 국가가 공무원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할 헤게모니가 없고 노동력 갈아 넣기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확진자 동선을 낱낱이 밝히는 데 대해 상당한 저항이 예상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 죽어 가는데 사생활이니 인권이니 따위가 중요하냐는 반응들이 하나둘씩 나오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제조업의 해외 아웃소싱에 대한 문제제기도 인민들 사이에서 안 나올 수가 없겠고 국가의 권한이 더 커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인권이 밥 먹여줍니까? 야만으로만 치부하고 넘길 발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The last global crisis didn't change the world. But this one could. by William Davies. <The Guardian> 2020.3.24 번역

위기crisis는 결정, 판단을 뜻하는 희랍어 ‘krisis’에서 나왔다. 여기서 비평가critic(판단하는 사람), 치명적critical이라는 말도 나온 것이다. 위기는 좋게 혹은 나쁘게 종결될 수 있지만 핵심은 그 결과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그 어떤 가능세계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은 그 종결 시기와 방법의 극단적인 불확실성으로 가늠된다. 임페리얼 칼리지의 연구자들(그들의 보고서는 영국 정부의 비교적 느긋한 대응을 뒤늦게나마 변화시켰다)에 따르면 강제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거둬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 내년 여름까지는 기다려야 할 백신개발이다. 그 긴 공백 기간 동안 발생할 만한 문제들을 최소화할 정책을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실행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거대한 지구적 불황, 노동시장 붕괴와 소비의 증발을 맞이할 것은 불가피하다. 2008년 가을에 정부를 움직인 것은 은행 체계를 정부가 지원하지 않는 이상 ATM에서 현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였다. 이제 밝혀진 것은 사람들이 집에서 나오기를 멈추면 돈의 순환도 멈춘다는 것이다. 영세 사업체들은 직원들을 무서운 속도로 해고하고 있는데 반면 미국 아마존은 10만 명의 추가적인 채용 공고를 올렸다.(붕괴되는 세계의 몇 안 되는 지속물은 거대 플랫폼의 끈질긴 성장이며 결코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없다.)
 
위기를 사고하는 현재 우리의 상상력을 구조 잡은 시대는 70년대이며, 역사적 균열이 어떻게 경제와 사회를 새로운 길로 추동하는지를 잘 드러낸다. 이 시기는 고정 환율, 자본 통제와 임금 정책 등을 위시한 전후post war 체계의 붕괴로 특징지어진다. 당시 전후 체계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야기한 것으로 여겨졌다. 위기는 레이건과 대처의 신우익의 부상을 위한 제 조건을 만들어냈으며 신우익들은 세금 감면, 이율 대폭 인상, 노동조합 분쇄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1970년대의 위기는 이데올로기의 광범한 전환을 야기하였고 이러한 전환은 좌파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몰고 왔다. 이때 위기는 자본주의의 케인즈주의 모델에 내재적인 모순(생산성 향상보다 빠른 임금상승,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것이었고 주도적인 사업 스타일의 철저한 개편이 요구되었다. 경직된 중공업 대신 그때그때의 소비자 요구에 기민하게 맞출 수 있는 유연한 생산체제에 투자하는 것이다.
 
1970년대 위기는 공간적인 측면도 중요하다. 자본은 북부 잉글랜드와 중서부 미국의 산업 본거지를 버리고 (국가의 도움을 받아)런던과 뉴욕과 같은 글로벌 도시의 금융 사업 지구로 옮겼다.
 
대처 집권 이후 4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좌파들은 다시 한 번 이데올로기적 전환이 역으로 발생하기를 바라며 1970년대의 그것과 같은 또 다른 전환적 계기를 초조하게 기다려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격변과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의 지구적 금융위기는 정책 기조의 근본적 전환을 유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부의 은행 구제 이후 대처주의적 자유시장주의 세계관은 영국과 유로존에서 더 지배적이 되었다. 2016년의 정치적 변동은 현상태를 겨냥했지만 일관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두 위기는 모두 현재 우한에서 시작된 위기에 비하면 그 전조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일찌감치 2020년의 위기와 그 여파가 1970년대의 그것과 다를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전염 경로가 지구적 자본주의(출장, 여행, 무역)의 경로를 따르고 있지만 전염의 근본 원인은 경제 외적이다. 전염병으로 인한 재앙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의문에 붙이지 않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아주 기본적인 속성에 기인한다. 바로 노동 시장에의 의존과 높은 수준의 국제적 접속성이다. 이 속성들은 고정 환율과 단체교섭이 케인즈주의의 핵심인 것과 같이 어떤 특정한 경제 체제 패러다임의 속성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속성인 것이다.
 
둘째로, 이번 위기에서 공간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의 그것과 다른 양상을 갖는다. 슈퍼리치들이 대피하는 벙커나 섬은 차치하고 이번 판데믹은 경제지리학을 막론하고 무차별적이다. 판데믹을 계기로 “지식-기반 노동”이 온라인으로 이뤄질 수 있음이 명백해지면서 도시 중심부의 가치가 절하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상이한 시기, 상이한 장소로부터 퍼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주간 가장 문제적이었던 것은 인간 행동의 보편성, 우려와 공포였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보급은 전례 없는 글로벌 대중을 만들어냈다. 9.11와 같은 사태는 전세계의 노키아 휴대폰이 진동하며 당장 TV를 켜라는 지시를 함으로써 글로벌 대중의 출현을 암시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는 나와 무관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스펙터클이 아니다. 사태는 당신의 창밖에서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모든 순간 경험들이 캡쳐되고 공유되는 유비쿼터스 소셜 미디어의 시대와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러한 공통된 경험의 강렬함은 현재 위기를 불황보다 전쟁에 가까운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음산한 이유 중 하나이다. 종국에 가서는 정부의 정책입안자들은 몇 명이 죽었는지에 따라서 평가될 것이다. 그 심판이 가능하기 전까지, 의료 시스템에 과부하가 오고,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죽어감에 따라 근대 문명의 표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던 공포가 짧게나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즉각적인, 몸으로 느껴지는 필멸의 위협은 이 시기를 2008년이나 1970년대보다 차라리 우리가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위기의 시기와 비슷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바로 1945년이다. 생사가 걸린 문제들은 극단적인 정책적 전환을 야기하며 이것은 어떤 경제적 지표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리시 수낙(영국 재무장관)이 깜짝 발표한 대로 사업체들이 노동자들을 계속 고용한 채로 둔다면 정부에서 임금의 80%까지 지원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조치들이 갑자기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며 이 가능성의 사고틀은 결코 쉽게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다.
 
이를 자본주의의 위기로 사고하기보다는, 새로운 경제적, 지적 활동이 가능한 전혀 다른 세계를 도래케 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1755년, 리스본은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75,000명이 사망하는 재앙을 겪었다. 경제는 파괴되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재건하여 자체적으로 생산자를 양성할 수 있었다. 대 영국 수출에의 의존을 낮춘 덕에 리스본의 경제는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은 또한 지대한 철학적 영향력을, 특히 볼테르와 칸트에게 발휘했다. 특히 칸트는 초창기 국제 뉴스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던 지진 관련한 정보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하여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지에 관한 기초 수준의 지진학적 이론을 생산해냈다. 프랑스 혁명의 전조가 된 리스본 지진은 모든 인류에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그 어마어마한 파괴력은 신학을 근본부터 흔들었고 과학적 사고의 권위를 격상시켰다. 칸트가 그의 후기 저작에서 결론 내리듯 신이 인류에게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속적 이성의 실천을 토대로 “세계시민사회”를 경유하여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자율성을 갖게끔 만들려 한 것이다.
 
2020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몇 년,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진정으로 지구적인 위기로서, 현재 위기는 또한 지구적인 전환점이라는 것이다. 근미래는 심신의 고통과 재정적 고통으로 점철될 것이다. 위기가 이 정도 규모로까지 심각해진 이상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삶이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지 않으면 문제는 결코 완벽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2020년 3월 25일 수요일

엘리자베스 워런이 삽질한 몇 개 이유

트위터에서였나 언젠가 봤던 얘기에 크게 공감했다. 정치인들에게는 어떤 어마어마한 악명이나 사생활 문제, 범죄기록이 따라붙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인 것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라고. 다른 건 다 극복할 수 있고 운이 따르면 정치적 재기도 가능하겠지만 조롱감이 되면 재기불능이라고.

엘리자베스 워런은 치명적인 실수로 평생 조롱거리가 따라붙게 되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이 네이티브 아메리칸 혈통이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DNA테스트 결과 전면 부정당한 것이다. 완전히 전면 부정은 아니고 1/64에서 1/1,024 정도의 네이티브 아메리칸 피가 있다고는 한다. 그냥 일반 백인 수준이다. 트럼프는 워런에게 Faux-cahontas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이 별명은 평생 떼낼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을 위시하여 워런에게는 일종의 구라쟁이라는 이미지가 씌워졌다. 유세 기간에는 본인이 교직에 있던 시절 임신을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고 이야기했는데 2007년 인터뷰가 발굴되어 교직이 자신과 맞지 않아 스스로 관뒀다고 말한 바 있음이 밝혀졌다. 워런은 지금도 임신 때문에 해고된 게 맞다고 주장하지만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보인다.

워런이 바이든, 샌더스와 함께 빅3 후보로 거듭나는가 싶더니 다시 하락세에 접어들자 두어 달 전 워런은 갑자기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샌더스가 지난해에 자신에게 여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바로 며칠 뒤 CNN에서 진행한 토론회에서 샌더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결코 그런 일 없다. 오히려 나는 2015년에 먼저 워런에게 가서 당시 대선에 출마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제안했었다. 생각이 없다고 해서 내가 출마한 거다."

샌더스의 발언에 이어 CNN 진행자는 샌더스에게 다시 질문했다. "샌더스 의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러니까 당신이 워런 의원에게 여자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샌더스는 그렇다고 대답, 진행자는 다시 워런에게 질문을 던졌다. "워런 의원, 샌더스가 당신에게 여자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워런의 대답 "동의하지 않았다"


토론회가 끝나면서 워런은 샌더스의 악수를 거절했다.


워런은 90년대까지 공화당원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 들어 상원의원이 되고 선명한 반-월가 스탠스를 취하면서 소위 샌더스의 친구로서 대표적인 당내 좌파로 이름값을 올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2016년 대선을 위한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정황이 나오던 와중에 샌더스 대신 클린턴을 공개지지했다. 이때부터 좌파성향 유권자들의 지지에 상한선이 생겼다.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 부의장이었던 털시 가버드가 부의장직을 때려치고 즉석에서 샌더스 지지선언을 해서 삽시간에 스타가 된 것과 크게 대비된다.


대형 언론사들, 엘리트 미디어(위의 CNN의 말도 안 되는 진행에서 확인되듯이)의 소위 '정치 전문가' 비평가들은 워런을 이용하여 샌더스를 떨구고자 온갖 공작을 벌였다. 이들은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데 워런 대신 샌더스를 지지하는 것은 여성혐오 외에는 이유가 없다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고 워런은 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막판에는 위의 무리수를 두면서 본인 선거캠프 관짝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경선후보를 사퇴하고 한 달이 가까워지도록 바이든이나 샌더스 어느 한 쪽에도 지지선언을 하지 않고 있다.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나라가 망하기를 더 원하는 사람들 26.1.6.

  2026 년 첫 거래일부터 코스피가 4,300 을 넘겼다 . 불과 2025 년 5 월까지만 해도 2,500 선이었다 . 2025 년 6 월 정권 교체 이후의 가파른 상승세는 망가져만 가는 줄 알았던 한국의 경제 상황에 희망이 보이는 것을 넘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