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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지구적 위기는 세계를 바꾸지 못했지만 이번 위기는 가능할지도

이른바 탈구의 계기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사고 체계, 문제틀로는 현재 맞닥뜨린 문제를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탈구라고 한다고 한다.
내가 3년 전부터 말하고 다니던 게 있는데 한국사회가 최하점을 찍고 반등하고 있다면 서구사회는 정점을 찍고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탄핵과 민주당 집권에 감개무량해서 오바한 감도 없지 않지만 지금 서구를 보고 멀쩡하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미국과 서유럽 중심부 국가들 모두 싸잡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저 밑에 있더라도 천천히 새로운 합의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비해 기존의 합의들이 하나둘씩 깨지는 과정에 훨씬 더한 혼란이 불가피하게 따른다고 생각한다.
하나둘씩 깨지는 기존의 합의들 중 하나는 자유주의이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한국 모델은 서구 국가들이 따라 하기 아주 어려울 것이다. 국가가 공무원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할 헤게모니가 없고 노동력 갈아 넣기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확진자 동선을 낱낱이 밝히는 데 대해 상당한 저항이 예상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 죽어 가는데 사생활이니 인권이니 따위가 중요하냐는 반응들이 하나둘씩 나오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제조업의 해외 아웃소싱에 대한 문제제기도 인민들 사이에서 안 나올 수가 없겠고 국가의 권한이 더 커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인권이 밥 먹여줍니까? 야만으로만 치부하고 넘길 발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The last global crisis didn't change the world. But this one could. by William Davies. <The Guardian> 2020.3.24 번역

위기crisis는 결정, 판단을 뜻하는 희랍어 ‘krisis’에서 나왔다. 여기서 비평가critic(판단하는 사람), 치명적critical이라는 말도 나온 것이다. 위기는 좋게 혹은 나쁘게 종결될 수 있지만 핵심은 그 결과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기를 겪는다는 것은 그 어떤 가능세계로든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은 그 종결 시기와 방법의 극단적인 불확실성으로 가늠된다. 임페리얼 칼리지의 연구자들(그들의 보고서는 영국 정부의 비교적 느긋한 대응을 뒤늦게나마 변화시켰다)에 따르면 강제된 사회적 거리두기를 거둬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 내년 여름까지는 기다려야 할 백신개발이다. 그 긴 공백 기간 동안 발생할 만한 문제들을 최소화할 정책을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실행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거대한 지구적 불황, 노동시장 붕괴와 소비의 증발을 맞이할 것은 불가피하다. 2008년 가을에 정부를 움직인 것은 은행 체계를 정부가 지원하지 않는 이상 ATM에서 현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였다. 이제 밝혀진 것은 사람들이 집에서 나오기를 멈추면 돈의 순환도 멈춘다는 것이다. 영세 사업체들은 직원들을 무서운 속도로 해고하고 있는데 반면 미국 아마존은 10만 명의 추가적인 채용 공고를 올렸다.(붕괴되는 세계의 몇 안 되는 지속물은 거대 플랫폼의 끈질긴 성장이며 결코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없다.)
 
위기를 사고하는 현재 우리의 상상력을 구조 잡은 시대는 70년대이며, 역사적 균열이 어떻게 경제와 사회를 새로운 길로 추동하는지를 잘 드러낸다. 이 시기는 고정 환율, 자본 통제와 임금 정책 등을 위시한 전후post war 체계의 붕괴로 특징지어진다. 당시 전후 체계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야기한 것으로 여겨졌다. 위기는 레이건과 대처의 신우익의 부상을 위한 제 조건을 만들어냈으며 신우익들은 세금 감면, 이율 대폭 인상, 노동조합 분쇄라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1970년대의 위기는 이데올로기의 광범한 전환을 야기하였고 이러한 전환은 좌파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몰고 왔다. 이때 위기는 자본주의의 케인즈주의 모델에 내재적인 모순(생산성 향상보다 빠른 임금상승,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것이었고 주도적인 사업 스타일의 철저한 개편이 요구되었다. 경직된 중공업 대신 그때그때의 소비자 요구에 기민하게 맞출 수 있는 유연한 생산체제에 투자하는 것이다.
 
1970년대 위기는 공간적인 측면도 중요하다. 자본은 북부 잉글랜드와 중서부 미국의 산업 본거지를 버리고 (국가의 도움을 받아)런던과 뉴욕과 같은 글로벌 도시의 금융 사업 지구로 옮겼다.
 
대처 집권 이후 4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좌파들은 다시 한 번 이데올로기적 전환이 역으로 발생하기를 바라며 1970년대의 그것과 같은 또 다른 전환적 계기를 초조하게 기다려왔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격변과 고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의 지구적 금융위기는 정책 기조의 근본적 전환을 유발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부의 은행 구제 이후 대처주의적 자유시장주의 세계관은 영국과 유로존에서 더 지배적이 되었다. 2016년의 정치적 변동은 현상태를 겨냥했지만 일관성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두 위기는 모두 현재 우한에서 시작된 위기에 비하면 그 전조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일찌감치 2020년의 위기와 그 여파가 1970년대의 그것과 다를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전염 경로가 지구적 자본주의(출장, 여행, 무역)의 경로를 따르고 있지만 전염의 근본 원인은 경제 외적이다. 전염병으로 인한 재앙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의문에 붙이지 않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아주 기본적인 속성에 기인한다. 바로 노동 시장에의 의존과 높은 수준의 국제적 접속성이다. 이 속성들은 고정 환율과 단체교섭이 케인즈주의의 핵심인 것과 같이 어떤 특정한 경제 체제 패러다임의 속성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속성인 것이다.
 
둘째로, 이번 위기에서 공간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의 그것과 다른 양상을 갖는다. 슈퍼리치들이 대피하는 벙커나 섬은 차치하고 이번 판데믹은 경제지리학을 막론하고 무차별적이다. 판데믹을 계기로 지식-기반 노동이 온라인으로 이뤄질 수 있음이 명백해지면서 도시 중심부의 가치가 절하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상이한 시기, 상이한 장소로부터 퍼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주간 가장 문제적이었던 것은 인간 행동의 보편성, 우려와 공포였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보급은 전례 없는 글로벌 대중을 만들어냈다. 9.11와 같은 사태는 전세계의 노키아 휴대폰이 진동하며 당장 TV를 켜라는 지시를 함으로써 글로벌 대중의 출현을 암시했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는 나와 무관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스펙터클이 아니다. 사태는 당신의 창밖에서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모든 순간 경험들이 캡쳐되고 공유되는 유비쿼터스 소셜 미디어의 시대와 완벽히 들어맞는다.
 
이러한 공통된 경험의 강렬함은 현재 위기를 불황보다 전쟁에 가까운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음산한 이유 중 하나이다. 종국에 가서는 정부의 정책입안자들은 몇 명이 죽었는지에 따라서 평가될 것이다. 그 심판이 가능하기 전까지, 의료 시스템에 과부하가 오고,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죽어감에 따라 근대 문명의 표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던 공포가 짧게나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즉각적인, 몸으로 느껴지는 필멸의 위협은 이 시기를 2008년이나 1970년대보다 차라리 우리가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위기의 시기와 비슷하다고 느끼게 만든다. 바로 1945년이다. 생사가 걸린 문제들은 극단적인 정책적 전환을 야기하며 이것은 어떤 경제적 지표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리시 수낙(영국 재무장관)이 깜짝 발표한 대로 사업체들이 노동자들을 계속 고용한 채로 둔다면 정부에서 임금의 80%까지 지원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조치들이 갑자기 가능해지게 되는 것이며 이 가능성의 사고틀은 결코 쉽게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다.
 
이를 자본주의의 위기로 사고하기보다는, 새로운 경제적, 지적 활동이 가능한 전혀 다른 세계를 도래케 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1755, 리스본은 지진과 쓰나미로 인해 75,000명이 사망하는 재앙을 겪었다. 경제는 파괴되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재건하여 자체적으로 생산자를 양성할 수 있었다. 대 영국 수출에의 의존을 낮춘 덕에 리스본의 경제는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진은 또한 지대한 철학적 영향력을, 특히 볼테르와 칸트에게 발휘했다. 특히 칸트는 초창기 국제 뉴스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던 지진 관련한 정보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하여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지에 관한 기초 수준의 지진학적 이론을 생산해냈다. 프랑스 혁명의 전조가 된 리스본 지진은 모든 인류에 영향력을 행사한 사건으로 간주되었다. 그 어마어마한 파괴력은 신학을 근본부터 흔들었고 과학적 사고의 권위를 격상시켰다. 칸트가 그의 후기 저작에서 결론 내리듯 신이 인류에게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속적 이성의 실천을 토대로 세계시민사회를 경유하여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자율성을 갖게끔 만들려 한 것이다.
 
2020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몇 년,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진정으로 지구적인 위기로서, 현재 위기는 또한 지구적인 전환점이라는 것이다. 근미래는 심신의 고통과 재정적 고통으로 점철될 것이다. 위기가 이 정도 규모로까지 심각해진 이상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삶이 근본적으로 재구성되지 않으면 문제는 결코 완벽히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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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클리셰는 항상 최악의 성차별주의자들은 항상 체격만 좋고 공부는 전혀 안 하는 고교 운동선수들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 세계는 실제는 전혀 다름을 보여준다. 인터넷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오히려 너드nerd 성향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착한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를 사귄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증오로 가득 차 있고 타인의 행복에 미친듯이 시기심을 느끼는 인종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라는 것이다. 비슷하게, 60년대 이후로 서구 대중문화를 지배해왔던 미학적 가치들, 이를테면 위반, 전복, 반문화와 같은 것들이야말로 오늘날 온라인 극우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극우는 종래의 전통적인 편견들로 가득하지만 니체적인 반-도덕주의에 힘입어 기독교 윤리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과거의 극우와는 다르다." 영미권에서 쓰이는 Normies라는 말은 우리말로 '인싸'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직역하면 평범한 사람들인데, 20+n살이 넘도록 제대로 된 이성교제 경험이 없고 동성인 친구마저 극히 적은 본인들의 비참한 아다인생과는 다르게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시기, 질투, 더 나가면 저주까지 하고 살인도 불사하는 그러한 멘탈리티가 집약된 단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스스로 '아싸'라고 주장하는 한국에서의 '인싸'의 용례와는 약간 다르다. 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PC방 살인사건까지, 알파메일alpha male에 의해 번식 경쟁에서 탈락했다고 믿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베타메일beta male의 원한감정은 인셀( In voluntary Ce libate, 비자발적 독신)이라는 신조어로부터 짐작 가능하듯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미국에서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셀의 멘탈리티를 가진 자들이 정치세력화하면 대안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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