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상호작용의 복잡성
앞서 밝혔듯이 본 논문의 연구방법의 주요 논거틀은 벤야민이 정리한 인식과 진리의 관계에 의거한다. “인식은 캐물을 수 있지만 진리는 그렇지 않다…개념이 오성(悟性)의 자발성에서 나오는 반면, 이념들은 관찰에 주어져 있다. 이념들은 앞서 주어져 있는 무엇이다.”[1] 텍스트들이 인식효과로서 사실들을 보여주면서 진리의 어느 층위에 다가가는가, 그리고 어떤 한계가 있는가가 주요 쟁점이 될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선행연구들에서 간과되었던, 사건사적 분석층위와 구조사적 분석층위가 변증법적으로 결합된 문제틀을 취해야 할 것이며 다큐멘터리 텍스트 자체와 그것을 둘러싼 콘텍스트를 공시적으로, 통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관계 분석 서술의 논리에는 시모어 채트먼의 이론을 참고할 것이다. 개별 작품들에 대한 논의로 들어가서는 빌 니콜스와 들뢰즈/옐름슬레브의 작업을 참고하여 텍스트의 표현 양식을 분석해 텍스트에서의 실재의 굴절 정도를 알아보고자 한다.
시모어 채트먼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화용론적 프레임<실제작가→내포작가→서술자→진술(사건/이야기/존재) →피화자→내포독자→실제독자>[2]을 모델로, 콘텍스트(1)에 다큐멘터리 장르, 콘텍스트(2)에 당시의 역사적 상황, 텍스트(1)에 영화가 다루는 실제 사건, 텍스트(2)에 표현양식을 대입하여 C(2)→C(1)→T(2)→T(1)의 순으로 개별작품 분석 논리의 틀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T(1)과 C(2)를 묶어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개별 사건들의 위치와 그 관계들을 규명하고 C(1)과 T(2)를 묶어 장르 분석과 표현면 분석을 병행한다면 본 논문의 서술 구조를 다음과 같이 시각화할 수 있을 것이다.[3]
편의상 작품 분석 논리의 틀을 C(2)→C(1)→T(2)→T(1)이라 표기했지만 이것이 선형적인 서술 순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작가가 현실적 맥락에서 사건을 대하는 견지가 어떠한지를 밝혀내는 연구와 텍스트가 실제 어떤 독자를 호명하는지,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연구방법은 비선형적인 지그재그 구조를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하 콘텍스트(2)는 역사적 콘텍스트, 콘텍스트(1)은 장르적 콘텍스트라 부르기로 한다.
본 논문은 텍스트(1)이 내용 층위, 텍스트(2)가 표현 층위에 해당한다는 가정 하에 내용의 소재/형식/기능과 표현의 소재/형식/기능의 여섯 개 틀에 맞춰 작품을 분석ㆍ재해석하는 것을 개별 작품 비평의 방법으로 삼고자 한다. 벤야민이 「인식비판적 서문」에서 인식과 진리를 구별한 것에 입각하여, 내용면 분석과 표현면 분석을 아우르는 비평이 이루어진다면 쇼트들 간의 관계(몽타주)를 넘어 관계들 간의 관계 즉 텍스트(1)과 (2)의 조응관계를 독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하 텍스트(2)는 표현면, 텍스트(1)은 내용면이라 부르기로 한다.
앞서 영화예술이 지성과 감성의 변증법을 시청각화한 예술 형태라고 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상술은 본고의 범위를 초과하지만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영화는 내용이 시청각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전자는 지성으로 독해되며 후자는 감성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형예술의 경우, 텍스트 자체만으로 그것의 내용을 독해하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영화는 내용적 소재들을 표현적 소재들로써 엄격한 시공간적 연속성의 제약 없이 영상화되기 때문에 내용면과 표현면은 동등한 위상을 갖는다. 들뢰즈/옐름슬레브의 기호학 범주에 따라 영화의 제작 공정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4]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예술의 속류적 이해에서는 종종 전자는 내용미학, 후자는 형식미학에 연결되어 양자가 서로 단절적이거나 대립적인 범주인 것으로 간주되게 된다. 하지만 영화 제작 공정을 이렇게 내용에 표현 형식을 부여하는 절차로서 통합적으로 이해한다면 로버트 스탬이 브레히트적 영화를 <리얼리즘적 모더니즘>이라 명명한 것이 정당화된다.[5] 통상적으로 스토리와 내러티브의 이해가 중요한 상업 극영화 혹은 그것에 담긴 사회적 메시지의 관철이 중요한 다큐멘터리 영화의 분석과 비평은 주로 내용면에 천착하며 표현면 분석의 중요성은 간과되는 경향이 있고 예술영화의 경우는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표현을 배제한 맹목, 내용을 배제한 공허는 앞서 말한 영화의 특수성을 살릴 수 없다. 영화 텍스트를 내용면과 표현면 층위로 해체/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한 까닭은 영화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감독과 제작진의 의식적/무의식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 실재가 왜곡/굴절되어 나타나며 그것의 정도와 논리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비평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것이 다루는 소재/이야기 말고도 그것이 재현되는 표현 양식에 있어서도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다. 내용면이 표현면으로 화하는 일종의 ‘번역’ 과정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축소, 누락되거나 추가, 확대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며 어떠한 논리가 그러한 현상의 기저에서 작동하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 내용면 분석은 시퀀스 분석으로써 메인플롯과 서브플롯을 변별하여 제기된 문제, 해결된 문제, 미해결된 문제들을 가려내어 역사적 콘텍스트에서의 문제틀과 연결해 성좌를 그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표현면 분석에서는 들뢰즈의 『시네마1』의 운동-이미지 유형들을 참고하여 이미지와 편집의 형식들을 분별해 장르적 콘텍스트와의 상응관계를 탐구한다.
역사적 콘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한국 정치경제의 통시적 변천사의 특정 위치에 텍스트를 정위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의 「세대의 정치학과 한국현대사의 재해석」에서 <한국 정치경제문화사의 중층적 주기들>[6]을 참조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독특한 점은 체제의 전환이 단절적이지 않고 체제가 이행함에 따라 과거의 산물이 몇 겹으로 누적되어 내속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탓에 텍스트가 다루는 사건과 그것이 문제화하는 체제의 산물은 시기적으로 서로 반드시 붙어 있을 필요는 없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경계도시2>의 문제틀은 전후 반공 이데올로기를 싹트게 한 53체제에 조응하고 <두 개의 문>은 실물팽창 주기에서 금융팽창 주기로 넘어가는 97체제와 신자유주의의 폭력적 수탈이 전면화되는 08체제에 조응하며, <다이빙벨>은 97-08체제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국면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텍스트라고 상정할 것이다.
또한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실제작가가 어떠한 방식으로 그의 이데올로기를 작품에 투영하였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역사적 콘텍스트에 대한 작업이 필요하다. 작품의 제작시기를 공시적으로 통찰하여, 제작 로케이션 안팎에서 정치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탐구해야만 내용의 재료들이 어떠한 사회적 약호들을 통해 걸러지는지, 그 걸러지는 과정에 어떤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지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전달체로서 작품은 “수신자와 송신자라는 두 개의 진영을 전제로 한다.” 콘텍스트 분석은 실질적 수용자, 즉 실제독자가 어떠한 사회적 약호 안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지를 알아내는 데에도 유용할 것이다.
콘텍스트(1) 즉 허구적 맥락의 분석은 곧 장르분석의 동의어라고 봐도 좋으며 따라서 허구적 맥락은 장르적 콘텍스트로 일컬을 수 있다. 작품의 유형에 따라 내포작가와 내포독자의 성질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빌 니콜스는 ‘촬영 대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작자, 대상, 관객이라는 삼자 간의 관계성 안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 삼자 간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원형적인 공식은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에게 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I speak about them to you).”[7]
니콜스는 같은 책에서 다큐멘터리의 하위 장르처럼 기능하는 재현 양식을 여섯 가지로 구분했다. 시적 양식, 설명적 양식, 참여적 양식, 관찰자적 양식, 성찰적 양식, 수행적 양식이 그것이다.[8] 반드시 한 작품이 하나의 양식만을 취하는 것은 아니고 둘 이상의 양식을 정도에 따라 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떤 작품이 특정한 양식을 따른다고 해서 구성의 모든 면이 결정되거나 강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I)와 당신(You)와 그들(Them)의 자리를 대체하는 명사와 이야기하는(speak about) 방식과 장르적 특성은 대응해야 한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실제 작가가 어떠한 입장에서(내포 작가) 어떤 관객층(내포 독자)을 대상으로 하였는지를 밝히는 데 필요한 작업이 장르 분석이다. 개별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화자의 성격과 이야기하는 방식, 소구하는 관객을 따져봄으로써 텍스트의 재현 양식을 분별해야 텍스트가 콘텍스트와 맺는 관계를 알아낼 수 있다.
이상 텍스트의 내용면과 표현면의 분석 방법, 역사적 콘텍스트와 장르적 콘텍스트의 분석 방법을 개괄했으며 이 분석으로 도출시킨 결과로서의 단자들을 연결해 변증법적 성좌를 그리는 것이 벤야민적 비평, 진실로의 접근을 위한 방법이 되겠다. 벤야민이 말한, 진리를 드러내는 이념으로서의 성좌라는 것이 그의 글만으로는 지나치게 함축적이고 비유적으로만 설명이 돼 있는 탓에 실체를 잡기가 굉장히 어렵다. 인식과 진리는 결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인식 효과들의 무질서한 흐름 안에서 진리 효과의 질서가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혼돈 속의 질서’와 ‘부분들의 합보다 큰 전체’를 골자로 하는 복잡계 과학의 논의를 빌어 ‘정지상태의 변증법’의 규명을 개괄할 수 있다. 심광현은 이를 스튜어트 카우프만의 상전이 실험으로 명료히 설명한다.[9] 단추들 수백 개를 흩뜨려 놓고 두 개를 무작위로 선택해 실로 둘을 묶는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하나의 단추가 여러 개의 단추에 중복돼서 연결된다. 중복으로 연결된 단추가 또 다른 중복으로 연결된 단추와 연결되면 단번에 큰 덩어리가 된다. 이러한 과정이 더 많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실 대 단추의 비율이 0.5를 넘길 때 갑자기 거대한 덩어리가 형성된다. 중요한 것은 이 개개의 부분들이 반드시 힘을 잃지 않고 임계점을 지나기까지 나름의 부단한 섭동을 유지해야만 창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내용면의 요소들이 개별 쇼트들로 화하고 그 쇼트들이 관계들(몽타주)을 이루어 하나의 전체적인 이야기가 완성되는 영화의 메커니즘과 흡사하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텍스트들에 대하여 확인하고자 하는 건 비단 인식(개념)들로 해체되어 있는 요소들을 얼마나 잘 규합해서 진리(이념)를 성좌적으로 보여줬는지의 여부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작품이 단지 그것이 다루는 사건의 사실관계들을 열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 이전의 어떤 힘으로서 그것의 본질을 각인하는 힘으로 존속하는 진리[10]에 얼마나 다가가느냐를 알아내는 일이다.
각주
[1] 최성만ㆍ김유동 옮김(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파주: 한길사, 2015년), 39-40쪽.
[2] 한용환 옮김(시모어 채트먼),『이야기와 담론』, (서울: 푸른사상, 2006년), 307쪽.
[3] 심광현, “제5강 운동-이미지와 내러티브의 인지생태학적 종합: 영화적 스토리텔링의 구조와 작용 분석”, 영상이론과 예술사 <서사분석세미나1> 강의록, 2017년, 34쪽.
[4] 같은 글, 16쪽.
[5] 오세필·구종상 옮김(로버트 스탬),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 (서울: 한나래, 1998년), 51쪽.
[6] 심광현, “세대의 정치학과 한국현대사의 재해석”, 『문화과학』, (서울: 문화과학사, 2010년), 제62호, 62쪽.
[7] 이선화 옮김(빌 니콜스), 『다큐멘터리 입문』, (파주: 한울아카데미, 2005년), 45쪽.
[8] 같은 책, 167-168쪽.
[9] 심광현, “정지상태의 변증법과 신체화된 미메시스의 미학과 정치”, 2013년
[10] 최성만ㆍ김유동 옮김(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파주: 한길사, 2015년),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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