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비판적 다큐멘터리와 사회 변동의 관계 : <경계도시2>, <두 개의 문>, <다이빙벨>을 중심으로
I. 서론
1. 연구 취지 및 연구 대상
2. 선행연구 검토
3. 서술방법
II. 본론
1.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상호작용의 복잡성
2. <경계도시2>와 레드콤플렉스
1) 내용의 시퀀스 분석
2) 표현의 스타일 분석
3) 내용과 표현의 관계 분석
4) 역사적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
5) 장르적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
6) 소결
3. <두 개의 문>과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1) 내용의 시퀀스 분석
2) 표현의 스타일 분석
3) 내용과 표현의 관계 분석
4) 역사적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
5) 장르적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
6) 소결
4. <다이빙벨>과 파국
1) 내용의 시퀀스 분석
2) 표현의 스타일 분석
3) 내용과 표현의 관계 분석
4) 역사적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
5) 장르적 콘텍스트와 텍스트의 관계
6) 소결
5. 종합평가
1) 텍스트와 체제
2) 텍스트의 소재
3) 텍스트의 스타일
4)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변증법적 성좌
III. 결론 – 성과와 한계
I. 서론
1. 연구 취지 및 연구 대상
예술은 사회 변혁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가? ‘사회에 변혁을 가져오는 예술’이라는 기치는 이제는 낡은 상투어로서 그 효력이 다 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 질문을 섣불리 무의미한 것으로 기각해서는 안 된다. 요즘과 같은 시기만큼 “예술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생활/삶/세계의 갱신과 변화를 위한 수단”(고봉준, 2017)이라는 주장이 특히 공명하는 때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의해야 할 것은 앞 인용문의 ‘수단’이라는 말을 사전적 의미의 수단, 즉 도구로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예술의 정치화를 말한 것은 예술을 정치에 ‘이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 그대로 예술이 곧 정치가 ‘됨’을 가리킨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국가적으로, 지구적으로 사회가 급격히 요동치는 시기에 우리는 퇴보 혹은 진보의 양 갈래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놓여 있다. 퇴보의 가능성을 진보의 가능성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진보적 문화정치로서 예술의 힘에 대한 고찰을 재개해야 한다. 소위 진보적 예술 활동이란 회화, 음악, 연극, 영화 등 형태와 장르를 불문하지만 본고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한정해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야말로 지성과 감성의 변증법을 시청각화한 예술 형태로서 사회 변혁을 위한 진보적 문화정치에 더욱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연구방법에서 후술될 것이다.
과거에도 사회적 변동의 시기가 있었고 급변의 시기에 예술의 역할을 고민한 사람들이 있었다. 386 세대를 예로 들자면 그들이 대학생이던 시절, 한국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비판적 운동을 펼치면서 당시 명실상부한 가장 진보적인 세대로 성장했다. 하지만 기성세대로 진입하고 그 중 상당수가 뉴라이트로 정치세력화하거나 한국 경제의 본격적 신자유주의화를 이끌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본 논문은, 당시에도 여러 가지 진보적인 비판적 다큐멘터리들이 다수 제작되었음에도 그러한 현상이 빚어지게 된 이유에는 주체양식의 변화, 랑시에르 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성과 감성의 재분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 크다는 전제를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맑스는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다음엔 소극으로 반복된다는 말을 했다. 1848년 프랑스 혁명 직후 루이 보나파르트가 집권하게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맑스는 당시 프랑스의 소농민들이 보나파르트에게 지지를 보낸 까닭을 계급 조직화의 결여로 진단했다. 문제는 그 조건으로서 이해관계의 공명과 연대인데 일찌감치 지배계급에의 동일시로 고착된 인민 대중의 인식과 감성의 구조에 변혁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계급 연대는 요원한 일이다. 세계의 변혁과 변혁하는 주체로서 인간은 불가분하며 맑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포이어바흐 테제 3번에서 이미 드러낸 바 있다.(심광현, 2014) “환경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이 인간들에 의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환경의 변화와 인간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와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Marx & Engels, 1932/2009) 이러한 환경과 자기의 동시적인 변화를 생산양식과 주체양식의 변증법이라 일컫는다면 다음과 같은 도식화가 가능하다.(심광현, 2011)
맑스는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다음엔 소극으로 반복된다는 말을 했다. 1848년 프랑스 혁명 직후 루이 보나파르트가 집권하게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맑스는 당시 프랑스의 소농민들이 보나파르트에게 지지를 보낸 까닭을 계급 조직화의 결여로 진단했다. 문제는 그 조건으로서 이해관계의 공명과 연대인데 일찌감치 지배계급에의 동일시로 고착된 인민 대중의 인식과 감성의 구조에 변혁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계급 연대는 요원한 일이다. 세계의 변혁과 변혁하는 주체로서 인간은 불가분하며 맑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포이어바흐 테제 3번에서 이미 드러낸 바 있다.(심광현, 2014) “환경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이 인간들에 의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환경의 변화와 인간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와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Marx & Engels, 1932/2009) 이러한 환경과 자기의 동시적인 변화를 생산양식과 주체양식의 변증법이라 일컫는다면 다음과 같은 도식화가 가능하다.(심광현, 2011)
고착화된 생산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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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생산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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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착화된 주체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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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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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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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주체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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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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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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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어느 시기건 최소 3세대를 포함하며 각 세대에 조응하는 특징적인 문화, 삶의 방식들이 공존한다고 했는데 이것을 감정구조라 정의했다. 윌리엄스의 세 가지 감정구조를 잔여적인/지배적인/도래하는 것으로 요약하여 표에 연결해보면 잔여적인 것은 (3)에 해당하고 지배적인 것은 환경의 요동 여부에 따라 (1)이 될 수도 있고 (3)이 될 수도 있다. 도래하는 것은 (2) 혹은 (4)가 될 것이다. 즉 새로이 도래하는 감정구조가 반드시 지배적인 것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는 까닭에, 요동하는 환경 속에서 변화된 생산양식과 상응관계를 맺지 못하는 잔여적인/지배적인 감정구조가 다시금 체계에 퇴화를 가져오는 상황도 가능한 것이다. 맑스는 『자본』의 서문에서 또다시 이러한 현상을 경고했다. “현대의 고난과 아울러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수많은 고난…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죽은 것에 의해서도 고통을 받고 있다. 죽은 것이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다!”(Marx, 1867/2010) 작금의 한국사회가 이를 정확히 예증한다. 우리는 여전히 성장 신화, 산업화ㆍ박정희 신화의 괴롭힘을 받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주체양식의 헤게모니 쟁투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으로 문제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알튀세르가 맑스의 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하고자 한 시도에서 그의 인식론적 단절을 논하면서 고안한 개념으로 문제틀problematic은 간단히 말하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게 하는 사고의 프레임이라 할 수 있다. 알튀세르가 말한 과학의 존재 조건으로서 문제틀은 다음의 문장으로 설명 가능하다. “과학은 한정된 이론적 구조 내에 그 지형에 근거해서, 그리고 절대적·한정적 조건을 가능하게 하는 문제틀(인용자 수정)에 근거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뿐”(Althusser, 1967/1991)이다. Problematic의 다른 번역어로서 문제의식과 문제설정이 있지만 사유의 전제가 되는 프레임으로서 의미를 살리고자 문제틀이라는 번역어를 취하기로 한다.
진보의 발목을 붙잡는 신화를 해체하고 새로운 주체양식을 도래시키는 데 필요한 영화예술의 과제를 논하기에 앞서, 과거에 제작된 진보적 비판적 다큐멘터리들의 성과와 한계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논의의 엄밀함과 풍부함을 위해 최대한 많은 수의 다큐멘터리들을 살펴보는 것이 맞겠지만 시간과 역량이 허락하지 않는 탓에 시기적으로는 2000년대 이후의 것에 한정하고, 정치적 현안들을 직간접적으로 다룬 것에 한정해서 세 편의 다큐멘터리, <경계도시2>와 <두 개의 문> 그리고 <다이빙벨>을 차례로 다루고자 한다. 비교적 현재와 가까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을 분석한다면 어떤 문제들이 해소되고, 해소되지 않은 채 잔존ㆍ지속되며 추가되었는지에 대하여 현재적인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서술방법에서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경계도시2>와 <두 개의 문>과 <다이빙벨>이 연구 대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한국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와 정치적 상부구조가 차례로 무너지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세 편의 비판적 다큐멘터리가 정치경제 구조의 변동과의 관계 안에서 단순한 사실관계들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문제의 해결을 위한 진실의 층위에 다가가는지를 고찰하고, 실제 사건을 제시하는 문제틀이 관객으로 하여금 이데올로기를 볼 수 있게 만드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말하듯 예술의 특수성이란 “현실을 암시하고 있는 어떤 것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 ‘느끼게 하는 것’, ‘지각하게 하는 것’”(Althusser, 1968/1995)이기 때문이다. 그로써 그 성과와 한계를 명료히 하여 공을 계승하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향후의 비판적 다큐멘터리의 과제를 밝히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변혁을 가져오는 예술 형태로서 영화예술의 효용, 그리고 그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비평의 중요성이 규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문헌
고봉준, “미학주의를 위한 변명”, 『21세기문학』, (서울: 21세기문학, 2017년) 통권76호.
심광현, 『맑스와 마음의 정치학』, (서울: 문화과학사, 2014년), 59쪽.
박재희 옮김(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I』, (파주: 청년사, 2009년), 190쪽.
심광현, “제1강 세계체계의 축적 순환과 사유의 반복과 차이”, 영상이론과 예술사 <영상이론의 철학적 계보학> 강의록, 2011년, 1쪽을 참고함.
김수행 옮김(칼 마르크스), 『자본론I(상)』, (서울: 비봉출판사, 2010년), 5쪽.
김진엽 옮김(루이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서울: 두레, 1991년), 29쪽.
이진수 옮김(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서울: 백의, 1995년),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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