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행연구 검토
<경계도시2>에 관한 비평과 리뷰들은 대부분 송두율 교수의 경계인으로서의 사색을 보여주는 영화의 시선과 그를 둘러싼 한국 사회 구조에 대한 반성에 천착한다. 그러나 이는 감독이 이 영화를 촬영한 의도, 감독이 관객을 향해 던지려 한 메시지를 동어반복하는 것에 그친다. <경계도시2>의 문제틀에는 여러 가지의 쟁점들이 중첩되어 있다. 국가보안법 비판과 감독 자신이 고백한 레드콤플렉스라는 표면 효과의 심층을 보기 위해 레드콤플렉스를 세분화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 및 종북세력을 대하는 시선과 공산주의 일반을 대하는 시선을 의식과 무의식의 층위로 나누는 것이 선행되어야 송두율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하여 영화가 취하는 문제틀을 제대로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정성일은 “이 영화는 오로지 남한에서만 보여질 것이며 단 한 걸음만 바깥에 나가도 이 다큐멘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1]라고 했지만 이는 성급한 판단이며 레드콤플렉스라는 문제를 다만 한반도의 남북 간 갈등의 문제만으로 인식한 탓이다. 한국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미국 역시 매카시즘의 내상을 입은 바 있으며 영어권에서 commie라는 단어가 여전히 비하의 의미로 쓰이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동연이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2]에서 그는 <두 개의 문>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봉착할 수밖에 없었던 태생적 제약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날 것 그대로의 자료들을 재배치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여 사건의 진실의 층위에 다가갈 수 있게 했다고 했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남일당 건물의 두 개의 문을 넘어선 제3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했는데, 도식적으로 말해 허구의 문이 경찰측, 현실의 문이 피해자와 변호인측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선 또 다른 층위의 진실이 있음을 지적한 것은 옳았지만 글의 제목이 "사라진 3000쪽의 기록, '제3의 문'을 열어라"라는 것을 상기하면 결국 용산참사의 본질이 과잉진압이냐 아니냐의 프레임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박진 용산철거민사망사건진상조사단원이 밝혔듯이 “과잉진압이라는 것이 과잉진압이라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강정석은 벤야민의 비상사태와 아감벤의 호모사케르 개념을 언급함으로써 이동연의 글이 갖는 한계를 보완했다.
“결국 용산 참사는 ‘예외 상태’가 폭력을 매개로 하여 가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며, 따라서 그 상황에 철거민들과 경찰들은 서로 비식별역에 빠지며 부지불식간에 ‘호모 사케르’의 형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여기에는 가해자/피해자라는 프레임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사건 자체에 대한 국가적 폭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3]
헤게모니는 자발적 동의로 이루어진 지배이다. 동의가 깨진다는 것은 헤게모니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리고 남는 것은 폭력뿐이다. 부동산과 금융 등의 투기자본의 신화는 깨어지기 시작한 지 오래지만 이것을 근간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유지를 위해 폭력이 행사된다. 용산참사가 비상사태였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용산참사가 87년 6공화국체제 이후 헤게모니의 붕괴를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경찰특공대가 아무런 안전 조치도 없이 사지로 몰아넣어지게 된 비상식적인 공권력 작동의 배후에 어떤 정치적인 긴박함이 있던 것은 아닐까?
보수언론에서 쓰여진 원색적인 비난으로만 가득 한 리뷰들은 차치하고 <다이빙벨>을, 이른바 진영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과감하게 비판한 글로는 대표적으로 성상민이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이 있다.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박민규는 세월호를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4]이라고 정의했는데, 성상민은 ‘사고’와 ‘사건’을 혼동한다.
"이렇게 제작진들이 스스로 다큐멘터리를 사상누각의 형국으로 몰아넣는 순간 영화의 모든 부분은 결국 제 틀을 갖추지 못하고 내부에서 와장창 무너진다…… 왜 찢어진 호스가 어떤 식으로 찢어졌는지 전문가에 소견을 듣거나 검사를 하지 않고, 쾌속정이 부딛친 것이 어떻게 부딛친 것인지 당시 바지선에 탑승하고 있던 다른 사람이나 해경 측의 해명은 담아내지 않는 것인가?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이 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인터뷰나 검사는 하지 않는다."[5]
<다이빙벨>이 단지 ‘사고’의 측면에서, 이종인 씨의 다이빙벨이라면 조난자들 구출 작업이 수월했겠으나 뭔지 모를 이유로 정부 측에서 비협조적이었으며 적대적이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만 급급한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면 성상민의 지적이 옳다. 하지만 <다이빙벨>을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거대한 정치경제적 붕괴를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선행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한계를 진단해보건대 텍스트들에 대한 분석수준이 ‘사건사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판단된다. 사건사적 분석층위는 ‘구조사적’ 분석층위에 반대되는 것으로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관과 시간 개념을 참고한다. 브로델에게 시간은 단일하고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다수의 층위에서 중첩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초단기에서 초장기지속의 스펙트럼 안에서 역사학이 중시해야 하는 시간대는 그 중간에 해당하는 콩종크튀르(conjoncture)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이를테면 박민규가 세월호 참사를 ‘사고’가 아닌 ‘사건’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한 ‘사건사적 수준’이란 문제를 ‘사고’의 측면에 한하여 분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건사적’ 수준에서 더욱 추상화된 것이 ‘구조사적’ 수준인데, 이것을 바로 ‘사건’의 측면에서 문제를 보는 것과 연결하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오히려 ‘사건사적 편향’이나 ‘구조사적 편향’을 경계하며 양극의 층위를 변증법적으로 통합하는 관점이 ‘사건’의 측면에 가까우며 바로 콩종크튀르의 층위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행위와 구조의 변증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러한 연구방법의 전회는 최근의 과학철학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있는데, 구조의 지속성과 규칙성에 변화를 가하는 우연성과 불확실성, 사건성에 함께 주목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선행연구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의 「인식비판적 서론」에서 사건과 구조의 변증법에 도달하기 위한 매개적 방법으로서, 사실 인식을 넘어선 진리에의 통찰을 강조한 것에 의거하여 텍스트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각주
[2] 이동연, “사라진 3000쪽의 기록, ‘제3의 문’을 열어라”, 2012.06.18.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39028
[3] 강정석, “실제사건을 다룬 영화의 현실 효과에 대한 단상”, 『문화과학』, (서울: 문화과학사, 2012), 제71호, 203쪽.
[4] 박민규 외, 『눈먼 자들의 국가』, (파주: 문학동네, 2014년), 56쪽.
[5] 성상민, “주장이 근거 되는 순환 논증 빠진, 문제적 다큐 ‘다이빙벨’”, 2014.10.17. http://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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