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1일 일요일

미국 시트콤 시리즈 추천 및 티어 리스트

 추천 리스트 만들고 S에서 D까지 등급을 매길 만큼은 미국 시트콤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하여 글로 정리해본다. 모두 최소 1시즌 이상은 본 것들이다.

 F를 매길 정도로 형편 없는 것들은 아예 안 보거나 한두 편 보고 끝냈기 때문에 평가를 할 수가 없다. 말인즉 여기서 평가가 박해도 어느 정도 재미는 보장한다.


S: Arrested Development (못말리는 패밀리) (2003~2006, 2013, 2018)


살면서 본 것 중에 제일 웃기다.
애니메이션 Bojack Horseman을 너무 재밌게 봐서 목소리 연기를 한 윌 아넷의 대표작을 안 볼 수 없었는데 정말 보기를 잘했다.
시즌 3까지 나오고 캔슬됐다가 2012년에 넷플릭스가 부활시켜서 시즌 5까지 나왔다.
넷플릭스 한국 계정으로는 볼 수가 없고 다른 데서도 도저히 볼 방법이 없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시즌 4부터는 노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어쨌건 시즌 3까지는 기념비적으로 웃기다. 
부동산 재벌 일가가 사기죄에 연루되고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 이야기다.
매 회 3~4개의 서브플롯이 전개된다. 처음에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가 일이 진행되면서 서로 한 데 꼬이면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충돌하여 터져버리는데 이때 정말 배꼽 잡는다.


A: Community (커뮤니티) (2009~2015)


도널드 글로버, 켄 정의 출세작이다.
이것도 재밌게 본 애니메이션을 계기로 보게 된 것. Rick & Morty의 작가 댄 하먼이 만들었다고 해서 봤다. 
릭 앤 모티를 본 사람은 동의할 텐데, 평소에 미국의 상업영화, 가요, 드라마, 코믹스 등 팝컬처에 이렇다 할 취미가 없이 보면 재미가 많이 반감된다.
커뮤니티가 특히 그렇다. 모든 에피소드가 패러디와 오마주, 패러디의 패러디다.
잘 나가던 변호사였다가 학위 위조가 드러나 다시 학위를 받기 위해 2년제 대학(커뮤니티 컬리지)에 들어간 제프 윙어(조엘 맥헤일)라는 사람의 이야기지만 진짜 주인공은 그와 함께 스터디그룹에 들어간 아베드(대니 푸디)라는 청년이다. 모든 인간관계, 세상사를 팝컬처의 렌즈를 통해 보는 아베드의 시선에서, 캠퍼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패러디처럼 진행된다.
시즌 4가 제작될 때는 댄 하먼이 잠시 구설수 때문에 작가진에 참여를 못했는데 그래서 재미가 덜하지만 다른 평범한 시트콤들의 전성기 만큼은 한다.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30Rock>, <빅뱅이론> 등에 비하면 시청률이 매우 저조했지만 가장 열정적인 마니아층이 있다.
시트콤의 시트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A: It's Always Sunny In Philadelphia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 (2005~ )

애니메이션 <사우스파크>의 실사판이라고 하면 될 듯하다.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다만 사우스파크는 몇개만 보면 금방 질리는데 이건 전혀 안 질린다. 시즌 14까지 나오고 지금도 계속 나오는데도 말이다.
주인공들은 죄다 형편없는 인간들이다. 의도는 좋고 선하지만 의도치 않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악의로 가득하다. 주변에 착하고 멀쩡한 사람이 있으면 인생을 망가뜨려버린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사기나 음모를 획책하고 재미 좀 보는가 싶다가 응징당하는 이야기다.
에피소드 간 편차는 좀 있지만 대니 드비토의 카리스마가 어마어마하여 어지간히 재미없어도 이 사람 혼자서 다 살린다. 


B: 30 Rock (30록) (2016~2013)

30 Rock은 30 Rockefeller Plaza의 약칭이며 NBC방송국이 위치한 동네다. 티나 페이가 SNL의 작가 및 연기자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가상의 코미디프로그램 메인작가로 일하는 리즈 레몬이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사진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듯이 보통내기는 아니다. 티나 페이는 한국에서는 새라 페일린을 패러디한 리버럴 페미니스트 코미디언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데 '할리우드 리무진 리버럴' 풍자와 조롱을 아주 신랄하게 한다.
처음 두 시즌 정도는 현실적인 정치-방송사-제작진-연예인 간 갈등과 사건을 묘사한 시트콤이었다가 뒤로 갈수록 인물들은 만화 캐릭터처럼 되고(캐릭터의 몇몇 특징만 남고 극단적으로 되는 것을 Flanderization이라고 부른다) 초현실적이 되는데 오히려 더 재밌다.


B: Parks and Recreation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2009~2015)

크리스 프랫의 출세작이다.
<오피스> 작가였던 마이클 슈어가 따로 나와서 아류작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제지회사가 아니라 시청이다.
아류작이지만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을 고평가하는 이유는 <오피스>보다 훨씬 다채롭기 때문이다. <오피스>가 영국에서 수입될 때는 캐릭터가 사실상 네 명(마이클, 짐, 팸, 드와이트)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사람이라기보다는 NPC에 가까웠다. 반면 <팍 앤 레>에서는 가상의 소도시(교육 수준, 시민 수준이 매우 낮고 비만율은 매우 높은)를 만들고, 개성 있고 각자의 스토리가 있고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을 다수 등장시킨다. 그 덕에 등장인물 중 누가 한 데 엮이든지간에 꽤 그럴싸하고 재밌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특정 배우의 개인기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
굉장히 무해한 웃음을 준다. 초반에는 오피스처럼 민망하고 어색한 상황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웃음을 유도하고 시청자로 하여금 몸둘 바를 모르게 만드는 게 코미디 루틴이었는데 두 번째 시즌부터 매우 편한 시트콤이 된다. 그 때문인지 앉은 자리에서 여덟 편을 연속으로 봐도 전혀 지치지 않는다.


B: Brooklyn Nine-nine (브루클린 나인나인) (2013~2021)


마이클 슈어가 만든 시트콤은 대체로 보기가 편하다.
뉴욕 시 경찰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액션이나 추리가 많지는 않고 동료들 간의 이야기, 경찰서 내 정치가 주를 이루고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 문제, 인종 문제가 유쾌하지만 가볍지는 않게 다뤄진다.
굉장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코미디로 평가 받는다. 아주 가끔 설교조일 때가 있지만 살아있는 듯한 캐릭터들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쉽게 몰입이 되어 문제되지 않는다.
흑인 동성애자, 라틴계 양성애자 내세우며 "inclusive"한 티는 많이 내는데 내 기억으로 아시안은 딱 한 번 해커로 출연한다.


B: Curb Your Enthusiasm (커브 유어 엔수시아즘) (2000~ )

<사인펠드>의 작가 래리 데이비드가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제리 사인펠드가 너무 연기가 안 늘어서 직접 연기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다.
래리 데이비드는 <사인펠드> 작가로 떼돈을 번 자신을 연기한다. 본인의 극화된 시니컬하고 냉정한 성격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와 해프닝을 아주 웃기면서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위선을 극도로 싫어해서 인사치레, 해야 하는 말은 안 하고 안 해도 되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굳이 해서 갈등이 일어난다. 이렇게만 보면 사회화 덜 된 심술궂은 늙은이로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상하게 시청자들은 래리 데이비드를 응원하게 된다.
대본에는 상황 설명만 되어 있고 대사는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한다. 홍상수 감독이 작정하고 코미디물 찍으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B: Malcolm in the Middle (말콤네 좀 말려줘) (2000~2006)

초등학교 영재반에 들어간 말콤과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재능을 타고난 그의 형제들, 중산층 노동계급 가족 이야기와 성장기를 보여준다. 브라이언 크랜스턴의 코믹 연기가 발군이다.
무난한 가족 시트콤처럼 보이지만 생각외로 수위가 굉장히 세다. 사춘기 아이들은 항상 발정이 나 있고 아빠는 피임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섹스중독자, 엄마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독재자다. 현실적인 설정 및 배경과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밸런스가 꽤 훌륭하다.


C: Veep (부통령이 필요해) (2012~2019)

재밌기는 무지하게 재밌는데 상황보다는 대사빨에 지나치게 기대는 경향이 있어서 B보다는 C에 둔다.
영국 시리즈 <The Thick of It>의 미국 리메이크며 원작자 아르만도 이아누치가 작가로 참여했다. 시즌 4부터 이아누치가 고국으로 돌아가서 작가가 바뀌는데 이때부터 아주 살짝 노잼으로 기운다.



C: The Office (오피스) (2005~2013)

볼 땐 재밌지만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아주 높게 평가는 못 한다. 제지회사 바깥의 세계관이 제대로 구축이 안 되어서 스토리가 한정적이다. 결국 스티브 카렐 배우 한 명의 개인기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짐과 팸은 결국 언제 제대로 사귈까 떡밥만 길게 끈다.
스티브 카렐이 떠나고 제임스 스페이더가 들어왔을 때 제임스 스페이더의 캐릭터를 좀더 제대로 살렸으면 훨씬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이 크다. 


C: That '70s Show (요절복통 70쇼) (1998~2006)

70쇼를 보게 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로보캅>, <포트리스>에 출연한 커트우드 스미스가 너무 좋아서.
본래 70년대 시대적 분위기와 팝컬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방향으로 기획된 것으로 아는데 몇 시즌 거듭되면서 시대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인 시리즈는 몇 시즌 넘긴 뒤부터는 시간적 연속성에 있어서 다소간 무리수를 불가피하게 두게 된다. 70쇼에서 그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물들 간 다이내믹스에 새로움을 기하고자 계속 새로운 인물을 소개하곤 하는데 죄다 별 매력이 없어서 몇 회만에 없애버리고 다시 새로운 인물을 만들기를 반복한다.
시즌 7 이후 토퍼 그레이스가 스파이더맨3을 찍으러 가면서 사실상 주인공이었던 에릭이 자리를 비우고 랜디(조쉬 마이어스)로 대체되는데 얘가 너무 매력이 없어서 프로그램 자체가 통째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70쇼의 최소 7할이 토퍼 그레이스의 대사 전달력에 의존했다는 사실이 뽀록난다.


C: The Good Place (굿플레이스) (2016~2020)

마이클 슈어가 만들었대서 봤는데 에피소드 숫자가 적어서 끝까지 봤지, 더 많았으면 다 안 봤을 것 같다.
크리스틴 벨이 연기한 엘리노어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처음부터 'flanderization'되어 있는 것 같고 매력이 없다. 그나마 테드 댄슨이 중심을 잘 잡아줘서 봐줄 만하다.

C: Lucky Louie (럭키 루이) (2006)
시즌 1만 방영하고 제작 중단되었고 현지에서 시청율과 평가도 저조했지만 아마 한국에서는 이거 본 사람이 꽤 많을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잊을 만하면 몇몇 장면들이 짤방으로 돌기 때문이다.
실제 관중 앞에서 라이브로 촬영해서 웃음소리가 진짜 웃음소리다. 
출연진 대부분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스탠드업코미디언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톤이 매우 독특하다. 뭐가 어떻게 독특한지는 설명하지 못하겠다만.
대사들이 아주 상스럽고 저속해서 배우들의 훌륭한 대사 전달력으로 들으면 그것들 자체로 아주 웃기다. 다만 그러한 '원-라이너'(한 문장짜리 조크)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D: The Ranch (더 랜치) (2016~2020)

70쇼 출연진이 다수 출연한대서 호기심으로 봤는데 전체적으로 너무 심심하다.


D: The Big Bang Theory (빅뱅이론) (2007~2019)

똑똑한데 사회성은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소재는 좋은데 지나치게 반복적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사이먼 헬버그의 니콜라스 케이지 성대모사밖에 없다.

2021년 2월 4일 목요일

<관종의 조건> 리뷰


 




조회수에 자아를 의탁하는 사람들

오늘날 특히 미국에서 젊은이들의 '노빠꾸 인생' 스턴트가 도를 지나치고 있다. 아니 '선을 넘고' 있다. 몇가지 예만 들어도 눈살 찌푸려지고 탄식 나오게 만들기는 충분하다. 수직으로 점프한 사람의 다리를 양 옆에 서 있던 두 사람이 걷어차서 공중제비를 돌게 만드는 '대가리 깨기 챌린지'(Skullbreaker challenge), 콘센트에 플러그를 느슨하게 꽂고 접속부위에 동전을 갖다대는 '콘센트 챌린지'(Outlet challenge), 캡슐형 세탁 세제를 입 안에 넣고 터뜨리는 '타이드 팟 챌린지'(Tide Pod challenge), 공중화장실 좌변기 시트를 혀로 핥는 '코로나 챌린지'(Corona challenge) , 조회수는 올리면서 인간 지능의 바닥은 내리는 관심종자(이하 관종)들의 망동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상상을 음산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조회수 자체가 경제적 가치로 치환될 수 있는 경제 체제가 확립되어감에 따라 관종이라는 말은 더 이상 부정적인 멸칭이 아니라 하나의 미덕과 같은 것이 되고 있다. 자연히 '나쁜 관종''좋은 관종'을 구별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다. 임홍택 작가의 <관종의 조건>이 대표적이다.

임홍택은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으로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다. 나는 처음에 <90년생이 온다>라는 제목을 보고 당연히 사회학 저서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386세대의 2세들이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8-90년대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문화적 조건들 아래서도 이전 세대와 대동소이하게 격무에 시달리면서 그럼에도 임금노동만으로는 개인의 영달은 언감생심인바 빚을 내면서까지 주식에 투자하고 이른바 일상의 금융화의 의인화된 표상의 집단으로 떠오름으로써 예측 가능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제 변화에 대한 간략한 고찰을 담은 책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 책은 아니었고,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법’, ‘꼰대가 되지 않는 법에 가까운 것 같다. 기업들의 입장에서 새롭게 중심적인 소비자로 발돋움하는 90년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잘 하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을 듯하다.

 

사회학 연구서 아니라 자기경영서에 가깝지만 마냥 가볍지는 않아

 <관종의 조건><90년생이 온다>속편혹은 스핀오프라 할 수 있겠다. <90년생이 온다>를 보기 전에 <관종의 조건>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도 비슷하게, 경거망동을 일삼는 이상한 관종들이 출몰하게 되는 문화사회적 제 조건에 대한 논의이겠거니 하는 기대를 가졌다. 관종의 문화사회적 조건인줄 알았는데, 읽어보니까 쓸모 있는 관종이 되는 조건에 대한 책이다. 즉 여기서 조건은 관종이 되려면 ~해야 한다는 그러한 조건을 말한다. 심도 있는 사회학적 논의를 기대하면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사회학이나 문화연구 저서가 아니라 자기경영서 혹은 마케팅 저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가볍기만 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어디 외진 데 짱박혀서 사회와 완전히 고립된 채 자연인으로 살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관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몇몇 대중문화 셀러브리티에 빗대어 일깨워준다. 축구선수로 예를 들면 축구 실력 자체에 있어서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 수 있지만 대중적 인기는 엄청난 격차를 벌리는 경우가 다수 있다. 스스로 포장을 얼마나 잘하고 대중미디어에 얼마나 꾸준히 자신을 노출시키는가의 차이에 기인한다. 즉 더 잘 나가는 선수가 되고 몸값을 높이려면 실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금은 겸손이 미덕이 되는 시대가 아니다.

 

관종시대에 성공하려면, 특유의 매력자본 어필해야

 이전까지는 이를테면 이른바 스펙이 포장지로 기능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지나치게 흔한 것이 되어버려 변별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만고만한 것들 사이에서 눈에 띌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뽐낼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겸손하되 일정량의 자신감을 적시적소에 내비칠 수 있어야 한다. 내실을 갖추고 화려해져야 한다. 화려함에 그쳐서는 안 된다. 다른 대동소이하게 화려한 것들 사이에서 부각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매력을 내보여야 한다. 자신의 인생 궤적에 스토리텔링을 부여하여 흥미로운 캐릭터로 거듭나야 한다.

 주목경제 시대의 상품들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무한에 가깝게 생산되는 재화들 가운데 그만의 독특한 상징자본을 확보해 성능과 내구력을 넘어서는 특유의 매력으로 어필해야 시장에서 살아남는다. 가격 차이가 열 배 이상 나는 두 량의 자동차가 있다고 가정할 때 과연 둘 사이의 성능에도 그에 준하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상품이 지니는 기호, 브랜드가 관심을 끌고 값을 높인다.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의 무기는 개성이다라는 식의 90년대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이야기의 재탕이 아니다. 지금은 맞춤형 생산 시대다. 인력도 상품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외일 리 없다.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구직하는 사람은 많다. 이들 가운데서 도드라져 보이려면 스펙 쌓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목 경쟁을 벌여야 한다. 자기소개서를 허접한 인스타그램 명언으로 치장하라는 것도 아니고 면접장에서 춤추고 성대모사를 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공략하는 대상에 따라 맞춤형 관종질을 해야 한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각자의 몫으로 넘겨진다.

 

인기 필수 요소나열식으로 전개한 서술은 아쉬워뒷북손가락질이 더 무섭다

 좋은 관종이 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면서 관종질을 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기도 한 <관종의 조건>은 그래서 그 두 가지 목적을 충실히 달성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의구심이 든다. 예시로 들고 있는 온갖 밈meme들은 진부하고, 하루만 지나도 그날그날 타임라인의 플로우에서 밀려나는 세태를 생각해 볼 때 이미 낡은 것들에 가깝다. 혹여나 회사의 기획자나 경영진이 이 책을 참고하여 온갖 인기 영상을 섭렵하고 어떤 신제품을 내놓은들, 기업의 업무 프로세스를 생각할 때 해당 기획이 실현될 즈음 대중의 관심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흩어져서 완전히 다른 형태로 재조직되어 있을 것이다. ‘관종세대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경영진의 기대는 이루어지기 힘들다. 본래 단행본으로 되어 있는 오늘날 트렌드에 대한 제 논의는 뒷북의 혐의로부터 자유롭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1982년생 작가가 알려주는 90년대생이 현대 사회에서 관종질로 생존하는 법이라는 점에서 본서는 젊은이들이 지침서로 삼는 자기경영서의 탈을 쓴, 경영인들이 젊은 소비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읽는 마케팅서이며 어느 한 쪽도 충분치 못한 것이다.

 

90년대생에게 귀 기울이기

 그래도 관종세대에 어필하고자 하는 기업가들이나 경영진에게 나름의 대책을 제시하자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90년대 생을 굳이 알려고 하지 말고 90년대 생에게 결정권을 과감하게 쥐어주라는 것이다. 그 정도의 결단이 없다면 90년대생을 상대로 특별한 성공을 얻어내긴 힘들다. 아마도 밈이 닳고 닳아서, 그리고 결과물의 퀄리티를 파악할 수 있는 감식안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승인된 결과물은 마치 오래된 짤방처럼 뭉개진 픽셀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경영진이 정말로 90년대생을 사로잡는 비법을 알고 싶다면 그것을 가장 잘 아는 90년대생에게 전권을 쥐어주고, 자신이 가진 권한은 90년대생에게 결정권을 밀어주는 데 사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전문적인 영역에서 세부사항은 전문가나 기술자에게 위임하고 그것을 간섭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 많은 기업에서 젊은 세대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보일러를 고치러 온 기사에게 배관이나 작업 과정에 대해서 우리가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보일러 내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90년대생도 똑같이 바라봐야 한다. 보일러와 자동차는 삶의 필수품이지만 그것의 작동 방식이나 수리 방법을 모두가 알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한다면, 콘텐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당장 권한을 이양하거나 나누기 힘들다면 두 번째 조언이 있다. 이 책에 나온 내용이나 기획은 모두 선택지에서 배제해 나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의 함의 또한 쓸모 있는 관종에 대한 부정신학적 접근으로 점철되어 있다. 시류를 타려 하지 말고 유행에 상관없는 필수적인 무언가를 충실히 만들고 기획하는 데 힘쓰는 게 좋다. 말하자면 기본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무형의 아이디어를 경제적 가치가 뛰어난 상품으로 계발하고 정착시키는 데는 단순한 상품을 제조하거나 생산하는 것에 비해 엄청난 노력과 비용이 수반된다. 나이키나 애플, 스타벅스의 브랜드 가치나 혹은 한두 마디 슬로건으로 단칼에 정리될 수 있는 그들의 기업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시류에 잘 편승하면 한두번 반짝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그뿐이다. 유행에 민감한 것보다 품질이 더 중요하다. 가장 간단한 예시를 들자면 유행어로 범벅된 광고는 1년만 지나도 낡아 보인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20년 10월 13일 화요일

인싸들을 죽이자.

 

"미국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클리셰는 항상 최악의 성차별주의자들은 항상 체격만 좋고 공부는 전혀 안 하는 고교 운동선수들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 세계는 실제는 전혀 다름을 보여준다. 인터넷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오히려 너드nerd 성향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착한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를 사귄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증오로 가득 차 있고 타인의 행복에 미친듯이 시기심을 느끼는 인종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라는 것이다. 비슷하게, 60년대 이후로 서구 대중문화를 지배해왔던 미학적 가치들, 이를테면 위반, 전복, 반문화와 같은 것들이야말로 오늘날 온라인 극우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극우는 종래의 전통적인 편견들로 가득하지만 니체적인 반-도덕주의에 힘입어 기독교 윤리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과거의 극우와는 다르다."


영미권에서 쓰이는 Normies라는 말은 우리말로 '인싸'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직역하면 평범한 사람들인데, 20+n살이 넘도록 제대로 된 이성교제 경험이 없고 동성인 친구마저 극히 적은 본인들의 비참한 아다인생과는 다르게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시기, 질투, 더 나가면 저주까지 하고 살인도 불사하는 그러한 멘탈리티가 집약된 단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스스로 '아싸'라고 주장하는 한국에서의 '인싸'의 용례와는 약간 다르다. 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PC방 살인사건까지, 알파메일alpha male에 의해 번식 경쟁에서 탈락했다고 믿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베타메일beta male의 원한감정은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이라는 신조어로부터 짐작 가능하듯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미국에서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셀의 멘탈리티를 가진 자들이 정치세력화하면 대안우파alt-right로 호명된다. 이들이 인터넷 공론장에서 벌이는 온갖 트롤링, 극우주의적 언동들을 해설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어왔다. 대체로 살기 힘들어지고 여기저기 헤게모니에 빵꾸가 뚫리면서 다양하게 발생하는 병리적 현상이라든지, 진보 보수를 대표하는 양대 정당에서 호소력있는 정치를 하는 데 실패해 앞뒤 가리지 않는 망동들이 주목을 독점하게 됐다든지라는 얘기로 요약 가능하다. 저자 안젤라 네이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망동의 원천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디씨나 일베에 비견되는 4chan과 게이머게이트와 같은 사이버불링의 현장이 그것이다.



현대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밈이다. 한국에서도 유행어나 '짤'이라는 말 대신 밈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밈은 뭐든지 될 수 있다. 고릴라 하람베, 개구리 페페에서 마일로 이아노풀로스, 산타바바라 총기난사 사건의 엘리엇 로저까지 동물이건 그림이건 인물이건, 대안우파들을 움직이는 밈들의 변천사를 이 책은 보여준다.

이러한 밈들의 극우정치적 전용, 언어유희를 활용한 신조어와 은어들의 공론장 오염은 상황주의 전략들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68혁명을 위시한 신좌파 운동이 오늘날 대안우파의 반인륜적 망동들을 배태했다고 주장한다. 먼저 사드부터 니체, 바타유, 바네겜, 바흐친 등 68에 영감을 제공한 사상을 훑는다. 이것이 인터넷 발전에 힘입어 뒤늦게 위반과 전복의 가치가 문화의 주류를 점하게 된다. 그에 따라 아랍의 봄, 월가점령 등의 대중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리더 없는 투쟁'과 '금지를 금지'한 빈 자리에 극우의 상징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주류의 가치와 취향에 반하기만 하면 뭐든지 흐를 수 있는 공허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반문화적 위반의 사상의 텅 빈 사기극이다. 문화가 끔찍한 공포에 노출되는 동안 진보주의자들은 맹목적으로 그것을 카운터-헤게모니의 힘으로 낭만화했을 따름이다."


그러는 동안 위반과 전복의 가치는 대학 캠퍼스와 소셜네트워크 Tumblr를 중심으로 기이한 정체성 정치의 인정투쟁으로 표출되었다. 저자가 예로 든 것은 'spoonie'이다. spoonie의 어원을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일상적인 사회 생활을 조금만 하면 몹시 피로해지는 증후군(이라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스스로 spoonies라 말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질병 혹은 장애로 인정해주기를 요구한다.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저기서 반발이 있었고 리버럴 대학생들, 텀블러 이용자들은 반발하는 사람들을 혐오자로 몰아갔다.

흔히 일컬어지는 '주디스 버틀러 잘못 읽고 체한' 대학생들이 다수 속출했다. 저자는 젠더 유동성 자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지만 이들의 무근거한 젠더 라벨링과 에고 트립, 자기연민의 언어도단은 리버럴의 탈정치화의 일현상에 다름없으며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을 대안우파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시키는 부작용만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탈정치적 리버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다고 믿었던 비합리주의 사상은 미국에서 유구한 전통의 반지성주의를 자극했을 따름이고 그에 힘입은 청년 대안우파들의 테러 행위에 준하는 반동과 문화 전쟁의 향연은 바흐친의 카니발과 다르지 않다.

아주 재미있고 훌륭한 책이다. 대안우파와 극단적 PC의 망동을 균형있게 제시하며 진보진영의 반성을 유도한다. 문화연구자는 왜 비위가 좋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2020년 10월 1일 목요일

자식들은 왜 추석에 찾아오지 말라는 소리에도 전전긍긍하는가

 자식들은 왜 부모, 시부모가 추석에 오지 말라고 해도 전전긍긍하는가? '오지 말랬다고 정말 안 오냐'라는 볼멘소리 혹은 그에 준하는 수동적 공격성을 지겹도록 겪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냥 가면 아무 것도 준비 안 했는데 귀찮게 왜 왔냐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당신들께서는 좀처럼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다 망가져가는 세탁기를 보여주면서 "아들/딸아, 우리는 옷이 더러워져도 상관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되고 신경 안 써도 된다."라고 영상메시지를 보내는 노부부의 이야기 따위는 일말의 감동 코드가 섞인 우스개로 흔히 소비되지만 부모의 말씀을 너무 잘 따라서 정말로 신경 안 쓰면 후레자식 된다.

뭔가 까다로울 수 있는 일을 부탁하기에는 부탁하는 입장으로서 접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고 염치없이 보이기도 싫고 강압적으로 하기에는 나쁜 사람 되기가 싫은 사람은 자신의 요구를 상대방이 눈치껏 먼저 알아내기를 원한다.

'척하면 척하는' 빠른 눈치로 긴 말이 필요 없이 요구사항이 관철되기를 바라는 소통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알아서 생각하는 데 드는 시간이 처음부터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더 길 터이다. 확신을 기하기 위해 몇가지 물어보면 으레 돌아오는 건 '그걸 꼭 다 말을 해야 아냐'는 핀잔이다. 편의점 알바해본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흔히 꼽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빡치는 손님 유형이 이런 사람이다. 봉투 필요하시냐고 물으면 '그럼 이걸 다 손으로 들고 가란 말이냐'며 쏘아붙이는 사람.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생각외로 가까이 있다.

비슷하게, 뭐든 애매하게 업무 지시를 내리거나 늘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 직장상사 욕을 쉽게 접한다. 대충 말해도 잘 알아듣고 수행하는 직원을 원하는 마음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음흉한 속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 책임질 생각이 없는 것이다. 알아서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알아서 한 사람을 탓하면 되기 때문이다.

조조가 토벌을 갔다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어느날 밤 암구호를 계륵으로 정하라는 말에 양수는 조조의 의중을 지레짐작하고 병사들에게 짐싸라고 했다가 목이 날아갔다. 섣불리 나대다가는 좆되는 수가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 흔히 전해지지만 애초부터 조조라는 인물이 기다 아니다를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으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평소 부하들 눈치 없다고 얼마나 조인트를 까댔으면 그날 저녁식사 메뉴를 암호로 정한 것만으로 그 의중을 파악하려고 고민하게 만든 것인지.


2020년 9월 29일 화요일

'나중에'와 정치



미국의 기술 문화연구 저술가 클레이 셔키의 책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원제 Here comes everybody)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여러 개 소개된다. 이바나라는 사람이 택시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는데 집 가서 확인해보니 사샤라는 사람이 그것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바나는 사샤에게 연락해 집으로 보내주기를 공손히 부탁했는데 10대 여성이었던 사샤는 이바나에게 인종주의적 조롱과 협박이 담긴 메일을 보냈다. 이바나의 오빠 에반은 '도난당한 휴대폰'이라는 인터넷 페이지를 만들어 사연을 알렸다. 사연은 널리 공유되었고 며칠도 안 되어 사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이스페이스를 발견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계속해서 일의 진행 상황을 묻는 사람, 격려해주고 도와주겠다는 사람들로부터 메일이 수없이 날아왔다. 사샤의 집주소를 알아내 직접 찾아가서 집을 촬영해 페이지에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에반은 그가 만든 페이지에 자유게시판을 만들었는데 곧바로 접속자들이 폭주해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도난이 아니라 분실로 취급하며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민원이 엄청나게 빗발쳤고 경찰은 결국 입장을 바꿔 에반이 페이지를 만든 지 일주일 만에 사샤를 체포하고 휴대폰을 이바나에게 돌려줬다. 

"사샤 엄마는 딸이 체포되던 날 한 기자에게 "전화기 한 대 때문에 이렇게 골치를 썩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기억에 남을 말을 남겼다. 하지만 골치 썩게 한 것은 전화기가 아니라, 전화기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 즉 에반의 사이트에서 하나로 뭉친 사람들, 마이스페이스 신상정보와 가족의 주소를 찾아내고 경찰서에 압력을 넣게 도와준 사람들이었다."(클레이 셔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갤리온, 15쪽)

이 에피소드가 갖는 의의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경찰 행정까지 좌우하는 다수 인민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더 실용적인 측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따로 있다. 바로 '그럴듯한 약속'이다. 단순히 '휴대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내세웠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없었다. '도둑을 단죄합시다'라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추상적이다. 에반은 많은 사람의 흥미와 정의감을 자극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메시지를 제시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그럴듯한 약속'이다. 2016년 촛불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럴싸한 약속이 촛불의 간판으로 내세워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퇴진'이 그것이다. 그게 아니라 '사회구조 변혁', '제왕적 대통령제 철폐' 따위였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모일 수가 없다. 월스트리트점령운동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이유는 이들이 제시한 "1% 대 99%"가 너무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세력화와 결집은 미리 주어져 있는 정체성(이를테면 노동자, 이주민, 소수민족, 성소수자 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 세력이나 정체성 모두 공통된 요구를 가진 사람들의 일시적인 집합체다. 일시적인 집합과 그것의 지속성 있는 응고는 특정 기표를 구심점으로 이루어진다. 이질적인 사람들이 갖는 여러 가지 요구들 중에 당장 급한 것 예컨대 굶어죽지 않을 권리가 있으면 좀더 장기적인 목표 이를테면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있을 테다. 이러한 양극의 기표들 가운데서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당히 거창하면서 결과가 그림이 그려지는 메시지가 관철되어야 한다. 이 기표에 특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사람들의 상호충돌이 제어될 수 없어 결집이 지구력을 갖기 어렵다. 이것이 헤게모니적 기표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메시지들이 의인화된 한명의 개인으로 제시될 수도 있고 슬로건이 될 수도 있고 정책이 될 수도 있고 유행어 혹은 밈이 될 수도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기표들 간에 위계를 발생시킨다. 즉 사람들이 들고 오는 요구들 안에서 우선순위가 매겨진다. 당장 급해보이지 않는 것들, 추상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들, 이득을 받는 사람이 소수에 머무를 것 같은 요구들, 그 수혜자가 가까운 이웃에 누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요구들은 자연히 후순위로 나중으로 밀려난다.

리버럴이 보는 문재인에게는 늘 연관키워드 '나중에'가 따라붙는다. 문재인이 강당에서 경선후보 연설할 때 인권단체 활동가가 갑자기 일어서서 항의성 질의를 내뱉었는데 문재인은 '나중에 발언할 기회를 드리겠다'라고 답했다. 식순을 지키고 발언권을 얻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응답이었다. 이에 지지자들은 '나중에'를 연신 외쳤다. 이런 일을 가지고 문재인이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나중에 처리할 문제' 취급했다고 와전시키는 것은 악의적이다. '나중에'를 구호처럼 외친 지지자들의 속내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어보인다. 다만 그게 이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20년 9월 26일 토요일

음악을 왜 들을까 Seefeel - Filter Dub


Seefeel - Filter Dub


신체 기관 중 이동 범위가 가장 좁고 정적인 부분은 얼굴일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얼굴은 대신 가장 풍부한 표현력을 지녔다. 표정이다. 표정은 사회적인 기능을 한다. 표정을 타인에게 보임으로써 머리는 비로소 얼굴이 된다.

동물이 진화한다는 것은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 사이의 경로를 말한다. 뇌과학자 로돌포 이나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내부화된 운동이다. 운동이 밖으로 표현되는 대신 안쪽으로 접혀들어가면서 복잡다단한 경로가 생긴다. 경로가 단순한 도마뱀은 건드리는 즉시 튀어오르지만 인간은 그러지 않고 고개를 돌려 먼저 왜 건드리냐고 묻는다. 경로가 복잡하고 긴 사람은 계속 툭툭 건드려도 몸은 가만히 있고 대신 붉어지고 일그러지는 얼굴로 화를 표현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의 수용과 그에 대한 반응 양태를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깥으로 표현되어 식별 가능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 전달되고 공감되는 것이 느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감정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앞서 말한 몸 안쪽으로 접힌 경로가 얕고 단순한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다. 쉽게 울거나 화내거나 하는 등 감정기복이 크고 표현이 격한 사람을 가리켜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빈약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그런데 감정 변화를 잘 숨기는 편은 아니다. 감정을 억누를 이유도 전혀 없다. 감정 표현의 프로세스가 상당히 긴 탓이라고 강변해본다. 내가 운동을 잘 안 하는 것은 운동의 내부화의 정도가 심한 탓이라고 강변해본다. 나는 잇몸이 붓거나 혓바늘이 돋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신체적인 증상이 있은 뒤에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굉장히 둔하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음악을 듣는 것일 테다. 어느날 갑자기 그날따라 특정 곡의 멜로디가 하루종일 머리속을 맴돌 때가 있다. 그날따라 찾아 듣게 되는 곡, 특정 장르가 있다. 우연이라고만 보고 싶지는 않다. 그때 몸상태가 음악을 경유해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분위기가 명쾌히 묘사되지 않는 음악을 즐겨 듣는다. 즐겁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음악을 선호한다. 가사가 노골적인 노래는 전혀 안 좋아한다. 작곡가가 곡을 쓸 때 의도한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음악은 광고음악으로서나 제 기능을 한다.

Seefeel은 말도 안 되게 저평가되고 잊혀진 영국의 슈게이징 밴드다. 짧게 활동하고 해체했다가 재결성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데 가장 최근 음반을 낸 게 9년 전이다. 중학생 때 Aphex Twin의 리믹스 때문에 알게 됐는데 그때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왜 좋은지 모르겠다. 늘어지는 음이 8분 넘게 반복만 하는데 넋놓고 듣게 된다. 곰팡이 같은 음악이다.

2020년 9월 19일 토요일

문빠는 실체가 없다

 

오쟁이를 진(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남편에게는 반드시 바람난 아내가 필요하다.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이라는 글을 쓴 지젝에 따르면 아내가 정말로 바람이 났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남편의 망상은 병리적이다. 자신의 찌질하고 무능력한 비참한 삶에 대하여,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외간남자와 놀아나는 헤픈 여자에게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초라하나마 삶을 지탱할 수 있다.

논평마다 대깨문, 문빠 운운하는 리버럴/좌파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빠는 새로운 홍위병인가? 문빠는 실체가 없다.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들이 공격하는 허수아비인 '포스트모던 네오맑시스트'나 트럼프가 국가전복세력이라 주장하는 안티파Antifa와 같은 존재다. 문빠가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물론 아니다. 다만 문빠를 문빠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일괴암적인 세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빠가 있으면 낙빠, 명빠, 경빠, 추빠, 박빠도 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를 의인화하여 특정 정치인을 아이돌 소비하듯 정치를 대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슨 일만 있으면 '문빠다!' 외치며 '문빠들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오쟁이 진 사람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런 비평가연하는 사람들이 일신상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의 곤궁함의 막후에 어떤 세력의 농간이 있다고 믿는 것은 병리적이다.

이른바 '정치 팬덤' 담론은 다소 김빠진다. 그리고 대체로 악의적이다. 많은 사람이 정치 팬덤의 기원을 노사모에서 찾는다. 16대 대선 민주당 경선 때 노무현은 아웃사이더였고 정치적 기반은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 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경선 승리는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노사모라는 노빠 세력은 확실히 하나의 실체가 있는 정치적 집단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인터넷과 정치의 접목이 아직 낯설었을 때 3-40대 젊은 유권자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유연하고 느슨한 조직력을 유지하며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역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은 좌우와 세대를 막론하고 인터넷 정치의 게릴라전은 상수다. 정치 팬덤을 보는 시선이 20년 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정치 팬덤은 여야와 인물을 불문하지만 유난히 평단에서는 친문 성향의 동의어와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본다. 18대선 직후부터 몇 년 동안의 종합편성채널의 각종 시사프로그램을 반추하면 생각외로 여권 성향과 야권 성향의 패널들이 어느 정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지금은 안 나오지만 당시 수도꼭지마냥 '틀면 나오는' 정치평론가를 참칭하던 사람들로 황태순, 민영삼, 황장수 등이 있었다. 각각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언론특보, 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 및 문재인 대선 후보 선대위 전략단장, 16대 새천년민주당 낙선의원이다. 또한 TV조선에서 이름을 내걸고 프로그램을 진행한 장성민 역시 16대 새천년민주당 의원직을 지냈다. 모두 공통적으로 반노 인사들로서 친노 진영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혹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데올로그로 나서 친노/친문 패권을 외쳤고 이것이 정치권 바깥의 지지자들에게도 뻗쳐 친문 정치 팬덤 담론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러나 18대 대선 직후부터 19대 대선 직전까지 친문은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다. 문재인이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일 때도 당 안팎에서 두들겨 맞았다. '친문 패권주의'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온 시기는 문재인이 당대표로서 계파중심 보스정당을 청산하고 시스템정당을 관철시키려 했을 때다. 이때 얘기된 '친문 패권'이란 시스템 앞에서 풍전등화 신세가 된 당시 반문 중진의원들과 끈떨어진 정치인 출신 종편 패널들의 되도 않는 원한감정의 기표일 뿐이다. 당에는 없는 그 실체를 당 밖에서 찾다가 친문 팬덤으로 '친문 패권'의 빈 속을 채운 것이 지금의 문빠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희준 동아대 교수가 프레시안에 거의 똑같은 얘기를 했더라.

"친문 패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들이 주장하는 패권주의란 문재인이 나눠먹기를 거부하자 탈당해 떨어져 나간 호남 의원들, 그리고 자신의 지분을 보장해주지 않자 화가 난 당내 다선 의원들이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해 집어든 프레임일 뿐이다. 그들이 문제 삼는 패권주의적 행태라는 것도 고작 지지자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벌이는 집단행동뿐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49064?no=149064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정치 세력은 처음부터 주어진 정체성을 근간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치 세력은 가변하고 다질적인 정체성의 여러 집단이 우연한 계기를 맞아 특정한 기표를 구심점으로 결집한 일시적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문빠'는 빈 기표이며 그 내용물은 계속해서 바뀐다. 문빠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그 특정한 기표는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변혁이다.

2016년 촛불을 결집시킨 것은 '박근혜 퇴진'이다. 반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사람, 이석기 석방을 외치는 사람, 비박 성향 여당 지지자들까지 이질적인 요구들을 갖고 거리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결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두 가지의 공통된 요구가 촛불집회의 간판이 되어 이질적인 요구들 간의 상호충돌이 최소화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 촛불은 지도자만 갈아치웠을 뿐 유의미한 사회변혁은 이루지 못했다고 논평하는 사람이 많다. 촛불의 소명을 문재인 정부가 배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촛불의 목적은 사회변혁이 아니었다. 촛불의 명분이 사회변혁이었으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회변혁은 추상적이다. 진보 세력은 정치적 상상력이 부족한 대중을 상대로, 그들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박근혜 퇴진을 넘어 진보적 의제로 전환시킬 헤게모니 전략이 부재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약속이다. 박근혜 퇴진이 그것이다. 

촛불 이후 현재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기표는, 입을 열 때마다 문빠 운운하는 논객이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문재인 개인'이 아니라 적폐청산이다. 21대 총선 결과를 보며 혹자는 부르주아 정당의 승리라고 비아냥댔지만 이것은 오히려 민주당 압승의 역사적 의의와 당위성을 드러내는 말일 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군주제 멘탈리티에 머물러 있는 정당을 상대로 부르주아 공화파가 승리했다는 얘기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정부 여당 지지자들은 사회변혁이 아니라 정치변혁을 위해 결집한다. 

논객들은 문빠들에게, 문 정부 지지하고 보수정당 욕하는 것만으로 민주 진보 시민의 소임을 다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문빠 욕하는 것으로 지식인의 소임을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하느니 차라리 나라가 망하기를 더 원하는 사람들 26.1.6.

  2026 년 첫 거래일부터 코스피가 4,300 을 넘겼다 . 불과 2025 년 5 월까지만 해도 2,500 선이었다 . 2025 년 6 월 정권 교체 이후의 가파른 상승세는 망가져만 가는 줄 알았던 한국의 경제 상황에 희망이 보이는 것을 넘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