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3일 화요일

인싸들을 죽이자.

 

"미국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클리셰는 항상 최악의 성차별주의자들은 항상 체격만 좋고 공부는 전혀 안 하는 고교 운동선수들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 세계는 실제는 전혀 다름을 보여준다. 인터넷으로 인해 드러나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오히려 너드nerd 성향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착한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를 사귄 적이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증오로 가득 차 있고 타인의 행복에 미친듯이 시기심을 느끼는 인종주의자이자 여성혐오자라는 것이다. 비슷하게, 60년대 이후로 서구 대중문화를 지배해왔던 미학적 가치들, 이를테면 위반, 전복, 반문화와 같은 것들이야말로 오늘날 온라인 극우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온라인 극우는 종래의 전통적인 편견들로 가득하지만 니체적인 반-도덕주의에 힘입어 기독교 윤리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과거의 극우와는 다르다."


영미권에서 쓰이는 Normies라는 말은 우리말로 '인싸'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직역하면 평범한 사람들인데, 20+n살이 넘도록 제대로 된 이성교제 경험이 없고 동성인 친구마저 극히 적은 본인들의 비참한 아다인생과는 다르게 정상적인 사회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시기, 질투, 더 나가면 저주까지 하고 살인도 불사하는 그러한 멘탈리티가 집약된 단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다 스스로 '아싸'라고 주장하는 한국에서의 '인싸'의 용례와는 약간 다르다. 하지만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PC방 살인사건까지, 알파메일alpha male에 의해 번식 경쟁에서 탈락했다고 믿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베타메일beta male의 원한감정은 인셀(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이라는 신조어로부터 짐작 가능하듯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미국에서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셀의 멘탈리티를 가진 자들이 정치세력화하면 대안우파alt-right로 호명된다. 이들이 인터넷 공론장에서 벌이는 온갖 트롤링, 극우주의적 언동들을 해설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어왔다. 대체로 살기 힘들어지고 여기저기 헤게모니에 빵꾸가 뚫리면서 다양하게 발생하는 병리적 현상이라든지, 진보 보수를 대표하는 양대 정당에서 호소력있는 정치를 하는 데 실패해 앞뒤 가리지 않는 망동들이 주목을 독점하게 됐다든지라는 얘기로 요약 가능하다. 저자 안젤라 네이글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망동의 원천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디씨나 일베에 비견되는 4chan과 게이머게이트와 같은 사이버불링의 현장이 그것이다.



현대 정치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밈이다. 한국에서도 유행어나 '짤'이라는 말 대신 밈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밈은 뭐든지 될 수 있다. 고릴라 하람베, 개구리 페페에서 마일로 이아노풀로스, 산타바바라 총기난사 사건의 엘리엇 로저까지 동물이건 그림이건 인물이건, 대안우파들을 움직이는 밈들의 변천사를 이 책은 보여준다.

이러한 밈들의 극우정치적 전용, 언어유희를 활용한 신조어와 은어들의 공론장 오염은 상황주의 전략들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68혁명을 위시한 신좌파 운동이 오늘날 대안우파의 반인륜적 망동들을 배태했다고 주장한다. 먼저 사드부터 니체, 바타유, 바네겜, 바흐친 등 68에 영감을 제공한 사상을 훑는다. 이것이 인터넷 발전에 힘입어 뒤늦게 위반과 전복의 가치가 문화의 주류를 점하게 된다. 그에 따라 아랍의 봄, 월가점령 등의 대중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리더 없는 투쟁'과 '금지를 금지'한 빈 자리에 극우의 상징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주류의 가치와 취향에 반하기만 하면 뭐든지 흐를 수 있는 공허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반문화적 위반의 사상의 텅 빈 사기극이다. 문화가 끔찍한 공포에 노출되는 동안 진보주의자들은 맹목적으로 그것을 카운터-헤게모니의 힘으로 낭만화했을 따름이다."


그러는 동안 위반과 전복의 가치는 대학 캠퍼스와 소셜네트워크 Tumblr를 중심으로 기이한 정체성 정치의 인정투쟁으로 표출되었다. 저자가 예로 든 것은 'spoonie'이다. spoonie의 어원을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일상적인 사회 생활을 조금만 하면 몹시 피로해지는 증후군(이라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스스로 spoonies라 말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질병 혹은 장애로 인정해주기를 요구한다.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당연히 여기저기서 반발이 있었고 리버럴 대학생들, 텀블러 이용자들은 반발하는 사람들을 혐오자로 몰아갔다.

흔히 일컬어지는 '주디스 버틀러 잘못 읽고 체한' 대학생들이 다수 속출했다. 저자는 젠더 유동성 자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지만 이들의 무근거한 젠더 라벨링과 에고 트립, 자기연민의 언어도단은 리버럴의 탈정치화의 일현상에 다름없으며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을 대안우파의 정신적 지주로 부상시키는 부작용만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탈정치적 리버럴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다고 믿었던 비합리주의 사상은 미국에서 유구한 전통의 반지성주의를 자극했을 따름이고 그에 힘입은 청년 대안우파들의 테러 행위에 준하는 반동과 문화 전쟁의 향연은 바흐친의 카니발과 다르지 않다.

아주 재미있고 훌륭한 책이다. 대안우파와 극단적 PC의 망동을 균형있게 제시하며 진보진영의 반성을 유도한다. 문화연구자는 왜 비위가 좋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2020년 10월 1일 목요일

자식들은 왜 추석에 찾아오지 말라는 소리에도 전전긍긍하는가

 자식들은 왜 부모, 시부모가 추석에 오지 말라고 해도 전전긍긍하는가? '오지 말랬다고 정말 안 오냐'라는 볼멘소리 혹은 그에 준하는 수동적 공격성을 지겹도록 겪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냥 가면 아무 것도 준비 안 했는데 귀찮게 왜 왔냐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당신들께서는 좀처럼 진짜로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다 망가져가는 세탁기를 보여주면서 "아들/딸아, 우리는 옷이 더러워져도 상관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되고 신경 안 써도 된다."라고 영상메시지를 보내는 노부부의 이야기 따위는 일말의 감동 코드가 섞인 우스개로 흔히 소비되지만 부모의 말씀을 너무 잘 따라서 정말로 신경 안 쓰면 후레자식 된다.

뭔가 까다로울 수 있는 일을 부탁하기에는 부탁하는 입장으로서 접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기는 싫고 염치없이 보이기도 싫고 강압적으로 하기에는 나쁜 사람 되기가 싫은 사람은 자신의 요구를 상대방이 눈치껏 먼저 알아내기를 원한다.

'척하면 척하는' 빠른 눈치로 긴 말이 필요 없이 요구사항이 관철되기를 바라는 소통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자 알아서 생각하는 데 드는 시간이 처음부터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드는 시간보다 더 길 터이다. 확신을 기하기 위해 몇가지 물어보면 으레 돌아오는 건 '그걸 꼭 다 말을 해야 아냐'는 핀잔이다. 편의점 알바해본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흔히 꼽히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빡치는 손님 유형이 이런 사람이다. 봉투 필요하시냐고 물으면 '그럼 이걸 다 손으로 들고 가란 말이냐'며 쏘아붙이는 사람. 이런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생각외로 가까이 있다.

비슷하게, 뭐든 애매하게 업무 지시를 내리거나 늘 '알아서 하라'고 말하는 직장상사 욕을 쉽게 접한다. 대충 말해도 잘 알아듣고 수행하는 직원을 원하는 마음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음흉한 속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본인이 책임질 생각이 없는 것이다. 알아서 했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알아서 한 사람을 탓하면 되기 때문이다.

조조가 토벌을 갔다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어느날 밤 암구호를 계륵으로 정하라는 말에 양수는 조조의 의중을 지레짐작하고 병사들에게 짐싸라고 했다가 목이 날아갔다. 섣불리 나대다가는 좆되는 수가 있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로 흔히 전해지지만 애초부터 조조라는 인물이 기다 아니다를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었으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평소 부하들 눈치 없다고 얼마나 조인트를 까댔으면 그날 저녁식사 메뉴를 암호로 정한 것만으로 그 의중을 파악하려고 고민하게 만든 것인지.


2020년 9월 29일 화요일

'나중에'와 정치



미국의 기술 문화연구 저술가 클레이 셔키의 책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원제 Here comes everybody)에 재미있는 일화들이 여러 개 소개된다. 이바나라는 사람이 택시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는데 집 가서 확인해보니 사샤라는 사람이 그것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바나는 사샤에게 연락해 집으로 보내주기를 공손히 부탁했는데 10대 여성이었던 사샤는 이바나에게 인종주의적 조롱과 협박이 담긴 메일을 보냈다. 이바나의 오빠 에반은 '도난당한 휴대폰'이라는 인터넷 페이지를 만들어 사연을 알렸다. 사연은 널리 공유되었고 며칠도 안 되어 사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이스페이스를 발견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계속해서 일의 진행 상황을 묻는 사람, 격려해주고 도와주겠다는 사람들로부터 메일이 수없이 날아왔다. 사샤의 집주소를 알아내 직접 찾아가서 집을 촬영해 페이지에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에반은 그가 만든 페이지에 자유게시판을 만들었는데 곧바로 접속자들이 폭주해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도난이 아니라 분실로 취급하며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민원이 엄청나게 빗발쳤고 경찰은 결국 입장을 바꿔 에반이 페이지를 만든 지 일주일 만에 사샤를 체포하고 휴대폰을 이바나에게 돌려줬다. 

"사샤 엄마는 딸이 체포되던 날 한 기자에게 "전화기 한 대 때문에 이렇게 골치를 썩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라는 기억에 남을 말을 남겼다. 하지만 골치 썩게 한 것은 전화기가 아니라, 전화기 반대편에 있던 사람들, 즉 에반의 사이트에서 하나로 뭉친 사람들, 마이스페이스 신상정보와 가족의 주소를 찾아내고 경찰서에 압력을 넣게 도와준 사람들이었다."(클레이 셔키,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갤리온, 15쪽)

이 에피소드가 갖는 의의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경찰 행정까지 좌우하는 다수 인민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더 실용적인 측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따로 있다. 바로 '그럴듯한 약속'이다. 단순히 '휴대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내세웠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 수 없었다. '도둑을 단죄합시다'라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행동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추상적이다. 에반은 많은 사람의 흥미와 정의감을 자극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메시지를 제시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그럴듯한 약속'이다. 2016년 촛불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그럴싸한 약속이 촛불의 간판으로 내세워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퇴진'이 그것이다. 그게 아니라 '사회구조 변혁', '제왕적 대통령제 철폐' 따위였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모일 수가 없다. 월스트리트점령운동이 허무하게 끝나버린 이유는 이들이 제시한 "1% 대 99%"가 너무 추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치 세력화와 결집은 미리 주어져 있는 정체성(이를테면 노동자, 이주민, 소수민족, 성소수자 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 세력이나 정체성 모두 공통된 요구를 가진 사람들의 일시적인 집합체다. 일시적인 집합과 그것의 지속성 있는 응고는 특정 기표를 구심점으로 이루어진다. 이질적인 사람들이 갖는 여러 가지 요구들 중에 당장 급한 것 예컨대 굶어죽지 않을 권리가 있으면 좀더 장기적인 목표 이를테면 모두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있을 테다. 이러한 양극의 기표들 가운데서 그 사이 어딘가에서 적당히 거창하면서 결과가 그림이 그려지는 메시지가 관철되어야 한다. 이 기표에 특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사람들의 상호충돌이 제어될 수 없어 결집이 지구력을 갖기 어렵다. 이것이 헤게모니적 기표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메시지들이 의인화된 한명의 개인으로 제시될 수도 있고 슬로건이 될 수도 있고 정책이 될 수도 있고 유행어 혹은 밈이 될 수도 있고 뭐든 될 수 있다.

헤게모니적 기표는 기표들 간에 위계를 발생시킨다. 즉 사람들이 들고 오는 요구들 안에서 우선순위가 매겨진다. 당장 급해보이지 않는 것들, 추상적이고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들, 이득을 받는 사람이 소수에 머무를 것 같은 요구들, 그 수혜자가 가까운 이웃에 누가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요구들은 자연히 후순위로 나중으로 밀려난다.

리버럴이 보는 문재인에게는 늘 연관키워드 '나중에'가 따라붙는다. 문재인이 강당에서 경선후보 연설할 때 인권단체 활동가가 갑자기 일어서서 항의성 질의를 내뱉었는데 문재인은 '나중에 발언할 기회를 드리겠다'라고 답했다. 식순을 지키고 발언권을 얻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응답이었다. 이에 지지자들은 '나중에'를 연신 외쳤다. 이런 일을 가지고 문재인이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나중에 처리할 문제' 취급했다고 와전시키는 것은 악의적이다. '나중에'를 구호처럼 외친 지지자들의 속내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어보인다. 다만 그게 이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20년 9월 26일 토요일

음악을 왜 들을까 Seefeel - Filter Dub


Seefeel - Filter Dub


신체 기관 중 이동 범위가 가장 좁고 정적인 부분은 얼굴일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얼굴은 대신 가장 풍부한 표현력을 지녔다. 표정이다. 표정은 사회적인 기능을 한다. 표정을 타인에게 보임으로써 머리는 비로소 얼굴이 된다.

동물이 진화한다는 것은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 사이의 경로를 말한다. 뇌과학자 로돌포 이나스에 따르면 마음이란 내부화된 운동이다. 운동이 밖으로 표현되는 대신 안쪽으로 접혀들어가면서 복잡다단한 경로가 생긴다. 경로가 단순한 도마뱀은 건드리는 즉시 튀어오르지만 인간은 그러지 않고 고개를 돌려 먼저 왜 건드리냐고 묻는다. 경로가 복잡하고 긴 사람은 계속 툭툭 건드려도 몸은 가만히 있고 대신 붉어지고 일그러지는 얼굴로 화를 표현한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의 수용과 그에 대한 반응 양태를 감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깥으로 표현되어 식별 가능한 상태로 다른 사람에 전달되고 공감되는 것이 느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감정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앞서 말한 몸 안쪽으로 접힌 경로가 얕고 단순한 사람이거나 사기꾼이다. 쉽게 울거나 화내거나 하는 등 감정기복이 크고 표현이 격한 사람을 가리켜 감수성이 풍부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빈약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그런데 감정 변화를 잘 숨기는 편은 아니다. 감정을 억누를 이유도 전혀 없다. 감정 표현의 프로세스가 상당히 긴 탓이라고 강변해본다. 내가 운동을 잘 안 하는 것은 운동의 내부화의 정도가 심한 탓이라고 강변해본다. 나는 잇몸이 붓거나 혓바늘이 돋거나 하는 식으로 어떤 신체적인 증상이 있은 뒤에야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굉장히 둔하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음악을 듣는 것일 테다. 어느날 갑자기 그날따라 특정 곡의 멜로디가 하루종일 머리속을 맴돌 때가 있다. 그날따라 찾아 듣게 되는 곡, 특정 장르가 있다. 우연이라고만 보고 싶지는 않다. 그때 몸상태가 음악을 경유해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분위기가 명쾌히 묘사되지 않는 음악을 즐겨 듣는다. 즐겁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고 신나지도 않고 우울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음악을 선호한다. 가사가 노골적인 노래는 전혀 안 좋아한다. 작곡가가 곡을 쓸 때 의도한 감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음악은 광고음악으로서나 제 기능을 한다.

Seefeel은 말도 안 되게 저평가되고 잊혀진 영국의 슈게이징 밴드다. 짧게 활동하고 해체했다가 재결성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데 가장 최근 음반을 낸 게 9년 전이다. 중학생 때 Aphex Twin의 리믹스 때문에 알게 됐는데 그때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왜 좋은지 모르겠다. 늘어지는 음이 8분 넘게 반복만 하는데 넋놓고 듣게 된다. 곰팡이 같은 음악이다.

2020년 9월 19일 토요일

문빠는 실체가 없다

 

오쟁이를 진(혹은 그렇게 믿고 있는) 남편에게는 반드시 바람난 아내가 필요하다.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이라는 글을 쓴 지젝에 따르면 아내가 정말로 바람이 났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남편의 망상은 병리적이다. 자신의 찌질하고 무능력한 비참한 삶에 대하여,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외간남자와 놀아나는 헤픈 여자에게 책임을 묻고 단죄해야 초라하나마 삶을 지탱할 수 있다.

논평마다 대깨문, 문빠 운운하는 리버럴/좌파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문빠는 새로운 홍위병인가? 문빠는 실체가 없다. 조던 피터슨 같은 사람들이 공격하는 허수아비인 '포스트모던 네오맑시스트'나 트럼프가 국가전복세력이라 주장하는 안티파Antifa와 같은 존재다. 문빠가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물론 아니다. 다만 문빠를 문빠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일괴암적인 세력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빠가 있으면 낙빠, 명빠, 경빠, 추빠, 박빠도 있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를 의인화하여 특정 정치인을 아이돌 소비하듯 정치를 대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슨 일만 있으면 '문빠다!' 외치며 '문빠들 때문에 문재인 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오쟁이 진 사람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런 비평가연하는 사람들이 일신상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들의 곤궁함의 막후에 어떤 세력의 농간이 있다고 믿는 것은 병리적이다.

이른바 '정치 팬덤' 담론은 다소 김빠진다. 그리고 대체로 악의적이다. 많은 사람이 정치 팬덤의 기원을 노사모에서 찾는다. 16대 대선 민주당 경선 때 노무현은 아웃사이더였고 정치적 기반은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 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경선 승리는 전무후무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노사모라는 노빠 세력은 확실히 하나의 실체가 있는 정치적 집단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인터넷과 정치의 접목이 아직 낯설었을 때 3-40대 젊은 유권자들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유연하고 느슨한 조직력을 유지하며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에 역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은 좌우와 세대를 막론하고 인터넷 정치의 게릴라전은 상수다. 정치 팬덤을 보는 시선이 20년 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정치 팬덤은 여야와 인물을 불문하지만 유난히 평단에서는 친문 성향의 동의어와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본다. 18대선 직후부터 몇 년 동안의 종합편성채널의 각종 시사프로그램을 반추하면 생각외로 여권 성향과 야권 성향의 패널들이 어느 정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지금은 안 나오지만 당시 수도꼭지마냥 '틀면 나오는' 정치평론가를 참칭하던 사람들로 황태순, 민영삼, 황장수 등이 있었다. 각각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언론특보, 새천년민주당 부대변인 및 문재인 대선 후보 선대위 전략단장, 16대 새천년민주당 낙선의원이다. 또한 TV조선에서 이름을 내걸고 프로그램을 진행한 장성민 역시 16대 새천년민주당 의원직을 지냈다. 모두 공통적으로 반노 인사들로서 친노 진영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혹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데올로그로 나서 친노/친문 패권을 외쳤고 이것이 정치권 바깥의 지지자들에게도 뻗쳐 친문 정치 팬덤 담론으로 비화한 것이다.

그러나 18대 대선 직후부터 19대 대선 직전까지 친문은 한 번도 주류인 적이 없었다. 문재인이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일 때도 당 안팎에서 두들겨 맞았다. '친문 패권주의'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나온 시기는 문재인이 당대표로서 계파중심 보스정당을 청산하고 시스템정당을 관철시키려 했을 때다. 이때 얘기된 '친문 패권'이란 시스템 앞에서 풍전등화 신세가 된 당시 반문 중진의원들과 끈떨어진 정치인 출신 종편 패널들의 되도 않는 원한감정의 기표일 뿐이다. 당에는 없는 그 실체를 당 밖에서 찾다가 친문 팬덤으로 '친문 패권'의 빈 속을 채운 것이 지금의 문빠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희준 동아대 교수가 프레시안에 거의 똑같은 얘기를 했더라.

"친문 패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들이 주장하는 패권주의란 문재인이 나눠먹기를 거부하자 탈당해 떨어져 나간 호남 의원들, 그리고 자신의 지분을 보장해주지 않자 화가 난 당내 다선 의원들이 문재인을 공격하기 위해 집어든 프레임일 뿐이다. 그들이 문제 삼는 패권주의적 행태라는 것도 고작 지지자들이 온·오프라인에서 벌이는 집단행동뿐이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49064?no=149064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정치 세력은 처음부터 주어진 정체성을 근간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치 세력은 가변하고 다질적인 정체성의 여러 집단이 우연한 계기를 맞아 특정한 기표를 구심점으로 결집한 일시적 결과물이라고 봐야 한다. '문빠'는 빈 기표이며 그 내용물은 계속해서 바뀐다. 문빠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그 특정한 기표는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변혁이다.

2016년 촛불을 결집시킨 것은 '박근혜 퇴진'이다. 반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사람, 이석기 석방을 외치는 사람, 비박 성향 여당 지지자들까지 이질적인 요구들을 갖고 거리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결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두 가지의 공통된 요구가 촛불집회의 간판이 되어 이질적인 요구들 간의 상호충돌이 최소화되었기 때문이다. 2016년 촛불은 지도자만 갈아치웠을 뿐 유의미한 사회변혁은 이루지 못했다고 논평하는 사람이 많다. 촛불의 소명을 문재인 정부가 배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촛불의 목적은 사회변혁이 아니었다. 촛불의 명분이 사회변혁이었으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회변혁은 추상적이다. 진보 세력은 정치적 상상력이 부족한 대중을 상대로, 그들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박근혜 퇴진을 넘어 진보적 의제로 전환시킬 헤게모니 전략이 부재했다.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약속이다. 박근혜 퇴진이 그것이다. 

촛불 이후 현재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을 결집하는 기표는, 입을 열 때마다 문빠 운운하는 논객이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문재인 개인'이 아니라 적폐청산이다. 21대 총선 결과를 보며 혹자는 부르주아 정당의 승리라고 비아냥댔지만 이것은 오히려 민주당 압승의 역사적 의의와 당위성을 드러내는 말일 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군주제 멘탈리티에 머물러 있는 정당을 상대로 부르주아 공화파가 승리했다는 얘기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정부 여당 지지자들은 사회변혁이 아니라 정치변혁을 위해 결집한다. 

논객들은 문빠들에게, 문 정부 지지하고 보수정당 욕하는 것만으로 민주 진보 시민의 소임을 다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문빠 욕하는 것으로 지식인의 소임을 한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2020년 9월 12일 토요일

미래는 취소되었다


Vaporwave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하위장르라고 하기에는 좀 협애한 정의인 것 같고 하위문화라고 하기에는 좀 오바하는 것 같다. 다만 이렇게 레이블 붙여진 음악과 영상은 내 취향과 잘 맞는다. 집에서 책읽을 때 화면보호기처럼 켜놓고 있기 좋다.

7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후반까지의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음을 카세트테이프 필터로 돌려서 리버브와 콤프레서 이빠이 걸고 과거 TV나 라디오 광고 음성을 샘플링해서 피치를 낮추고 늘어지는 드럼비트를 넣는다. 그런 음악에 맞춰 세기말에 촬영된 8mm필름이나 광고, 애니메이션 등을 컴파일한다. 나는 이것을 농반진반 VHS미학이라고 부른다. 주요 테마는 사이버펑크, 쇼핑몰 아케이드, 됴쿄의 밤거리,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댓글을 보면 많이 오그라들고 황당하고 재미있다. 베이퍼웨이브를 보고 듣는 소비자들은 대부분 30대 이하 세대다. 기억하기는 커녕 경험해보지도 못한 세기말 문화의 분위기에 심취해 있고 향수마저 느낀다고 한다. "This reminds me of the memories that never happened" 이런 얘기 하는 사람은 꼭 있다.

사이버펑크, 도쿄, 일본 애니메이션은 모두 거품경제와 강한 관련이 있다. 특히 7-80년대부터 미국의 포드주의 체제가 이윤율 하락을 맞이하는 동안 일본이 도요타주의 체제로 급성장하면서 서구 선진국들의 경외의 대상이 된다. 이때 나오는 할리우드 SF영화들의 미래 이미지는 일본이 독점한다.

Can Fresh 'Blade Runner,' 'Alien,' and 'Terminator' Fix Their Franchises? -  mxdwn Movies


Inner Space [SOLARIS] | Jonathan Rosenbaum


8-90년대 TV광고 영상과 함께 베이퍼웨이브 제작자들이 즐겨 전용하는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일본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노동 집약적으로 CG가 전혀 없는 고밀도의 디테일한 수작업 그림이 프레임마다 정교하게 그려졌다. 지금은 인건비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당시 일본의 거품경제에서는 가능했으며 따라서 이때의 그림들은 모종의 상실감을 자아내는 듯하다. 지금은 느끼기 힘든 재질감에 대하여 묘한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것을 향수로 착각한다.

BAOH | 1989Akira (1988) - Cyberpunk Anime - SP 104 - Cyberpunk

베이퍼웨이브만 그런 게 아니라, 국적을 불문하고 현재 전반적인 문화 자체가 대체로 뒤를 돌아보고 있는 것 같다. 이른바 복고 열풍은 이제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지친다. 리메이크나 리마스터, 과거의 기술적 한계로 말미암은 조야한 질감을 재연하는 저예산 영화, 뮤직비디오, 인디 게임, 음원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나는 이것을 막연하나마 좋은 시절로 학습했고 기억하고 있는 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로 받아들인다.
요즘 나오는 SF영화는 죄다 시간여행 아니면 다른 행성으로 도망가는 얘기다. 그것도 아니면 옛날 거 리메이크. 프레드릭 제임슨 말대로 자본주의의 끝을 상상하는 것보다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쉽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서 뭔가를 바로잡거나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만 할 수 있는 것일 테다.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고갈됐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재활용 뿐이다. 마크 피셔는 제임슨을 인용하며 우리의 미래는 취소되었다고 단언한다.

요즘 어린이들이 상상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2020년 9월 6일 일요일

유튜버들의 선넘기

"한국의 문화는 비천함을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는 평가의 기준이 도덕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평론가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의 위치에서 ‘나쁜 것’을 굽어보며 ‘나쁜 것’을 철저히 거부하도록 장려한다. 나는 시대를 역행해 비천함을 꿈의 질료로 활용하는 문화비평을 복권시키자고 권유하고 싶다.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의 입장에서 문화를 새로 서술하자. 사회적 실재, 세계, 시간성, 자본주의, 한국힙합, 실시간 스트리밍, 밈과 농담, 우리 문화 내부의 비천함을 사고하자."
 
t毬x(malware)라는 사람이 마테리알에 쓴 이 글https://ma-te-ri-al.online/3c16 나로서는 아주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다. 다만 위에 인용한 부분은 이해 여부는 차치하고 상당한 울림이 있다. 내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일 테다. 비평이든 연구든 하려면 비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이든 도덕적이든 어떤 이유가 되었건 속으로부터 역한 기분이 들더라도 어떤 것을 다만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대선 직후 트럼프에 투표한 노동계층을 비천한 존재라 불렀다. 정확히는 "You could put them in the basket of deplorables"라 했는데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들이라 의역 가능하다. 유력 정치인이 대다수 유권자들을 일거에 기각해버렸는데 리버럴 성향 지지자들은 이에 환호했다. 

미국에서 기각문화Cancel culture라는 것이 흥하고 있다.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들이나 노예제를 낭만화한다는 이유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영화의 영화사적 의의를 폄하하려는 움직임들이다. 혹은 떠오르는 유명인, 정치인, 뮤지션, 배우 등의 과거를 캐내어 도덕적 낙인을 찍는 식이다. 혹은 최근의 잘못을 과거의 행보들에까지 소급적용해 생애를 깡그리 부정하는 식이다.

대학에서는 문학, 영화 등 텍스트를 학생들 앞에서 읽히기에 앞서 '트리거 워닝'을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광민감성 발작 주의마냥, 특정 장면이 어떤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보기 싫은 사람은 나가도 좋다는 윤허를 내릴 수 있어야 하며 성적을 매길 때에도 정상참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이 배출할 인재상은 어떤 것인가?

최근 한 대학 강의실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는데 여기에 나오는 강간 묘사에 대하여 성폭행 피해자 학생이 항의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컬럼비아대 다문화문제 자문위원회에서 고전 예술작품에 자극성 경고를 표시하도록 권고했다. “학생들은 교실에서 안전함을 느껴야 한다라는 것이 권고안의 요지지만 제리 코인 교수가 지적했듯 학생들은 삶이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다. 4년 동안 거대한 안전 영역 안에서 자신을 보호막으로 둘러싸는 것, 그것이 바로 퇴보다.”(슬라보예 지젝,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 '정치적 올바름의 덫')

학부 영화비평 세미나에서 발제할 때 나는 별 생각 없이 <Behind the green door>라는 고전 포르노를 틀은 적이 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같이 세미나를 듣던 학생 한 명이 도중에 나가서 강사가 몇 마디 지적을 했는데 종강 후 해당 강사는 강의 평가에서 빵점 테러를 받았다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튜버들의 선 넘기

극우 유튜버들이 사회적 문제로 계속해서 호명되고 있다. 유튜브 정책상 허위정보나 혐오 표현 등으로 신고가 누적되면 그 채널에 소위 노란 딱지가 붙여져 광고가 제한되는 탓에 수익 창출이 불가능해지지만, 채팅창을 통해 추종자들로부터 후원금을 받을 수 있는 슈퍼챗이라는 대안 수익모델이 있다. 현재 전 세계 슈퍼챗 후원금 1위 채널은 가로세로연구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노골적으로 조롱한 방송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그 주간에만 이천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선을 넘는다라는 말이 널리 유행했다. 방송인 김민아는 방송의 금도를 고려하지 않는 듯한 언행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유튜브 방송에서 중학생을 대상으로 성희롱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었다. 백만 단위의 구독자를 보유했던 유튜버 송대익은 치킨프랜차이즈 배달원이 음식을 빼먹었다는 내용의 거짓 방송을 송출하여 본사로부터 민형사상 피소를 앞두고 있다. 그 외에 한 유튜버가 투렛 증후군을 연기하다 발각된 사례가 있었고 어떤 이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자 행세를 하며 공공장소에서 기침하고 쓰러지는 연기를 하는 등 난동을 부리다가 입건된 바 있다.

온갖 시정잡배들이 나타나 설쳐대며 사회에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라면 마땅히 미치광이 취급받았을 법한 언행을 보이는 사람들이 오늘날 갑자기 거대 정당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모으고, 스타 연예인에 비견되는 두꺼운 팬층을 확보할 수 있게 된 배경이 무엇일까? 그저 이상한 사람들이 최근 들어 유난히 급증했다고만 말하기에는 뭔가 많이 부족하다.

극단적이고 금도를 넘는 이념을 갖는 사람들의 절대수는 과거와 비교하여 대동소이하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증가한 것은 곳곳에 주변부로 흩어져 있던 소수 이상한 사람들끼리의 연결 가능성이다. 연결 가능성의 제고는 커뮤니케이션 제 수단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며 그 중심에 유튜브가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사회적 분위기와 통념상 차마 입 밖에 내기 눈치 보였던 특정 의견이나 불만사항을 남들과 공유하고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을 가까운 곳에서 찾기가 과거에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이용자라면 누구나 접속하는 유튜브에서 이용자별 성향에 맞춰진 동영상 추천의 연쇄를 몇 단계 거치기만 하면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클레이 셔키Clay Shirky는 그의 책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Here comes everybody)에서 재미있는 예를 제시한다. 페이스북 이전에 잘 나가던 미트업Meetup이라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이트가 있었는데 서비스 출범 후 몇년 간 이용자들의 상호작용이 가장 활발했던 그룹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마녀 숭배자들, 이교도들, 무신론자들, 여호와의 증인, <제나> 팬모임 등이 그것이다. <제나>Xena Warrior Princess는 루시 롤리스 주연의 드라마 시리즈인데 대중적인 흥행은 덜했지만 소규모 열광팬들로부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셔키 말대로 "'제나'보다 '내 사랑 레이몬드' 시청자가 훨씬 많았지만, 실제로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는 쪽은 제나 팬들이었다."(215) 나머지 그룹들은 사회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그룹이었다. 과거에는 비난을 무릅쓰고 본인의 신념과 가치를 피력하고 동료들을 찾을 공간과 방법이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사회적 승인 없는 사회'들이 암암리에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시트콤 <브루클린 99>에는 한 식인 살인범이 식인 관련 꿀팁을 레딧Reddit에서 찾는다는 조크가 나온다.

유튜브 이전에는 블로그가 이러한 기능을 했었지만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유튜브가 훨씬 효과적임은 물론이다. 블로그는 플랫폼이 통합되어 있지 않은 탓에 거대 단위의 이용자들 간의 대규모 접속에 한계가 있다. 그리고 블로그는 대체로 활자 중심으로, 독자의 문해력과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반면 유튜브 영상은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할 수 있고 화자의 격동하는 감정을 사실상 무매개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그에 동화되기가 아주 용이하다. 막연하나마 갖고 있었지만 위선의 파사드 아래 억압되어 있었던 어떤 특정한 감정이 유튜브 영상을 계기로 자극되고 분출되어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시청자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증폭되고 커다란 집결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 극우 유튜버를 중심으로 한 극우 세력화의 축약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선을 넘는’, 즉 사회적 금도를 무시하는 이들의 언행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 것은 헤게모니 균열의 징후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다. 작금의 유튜버들을 위시한 여러 가지 기현상, 선 넘는 행위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헤게모니에 도전하는 행위에 대한 예찬이다. 모든 것이 의문에 붙여지는 오늘날 좌고우면 않고 사회적 질서에 개기는 행위를 상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눈살은 찌푸릴지언정 일말의 쾌감은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규칙이든 예의든 사회에서 지키라는 것들은 다 지키며 살아왔는데도 지금 사는 꼬락서니가 엉망이니 유튜버들을 대리 삼아 질서 자체를 문제시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극우 유튜버들의 준동은 이러한 선 넘기에 정치적 메시지가 더해진 것이다. 이들의 도를 지나친 막말, 근거 없는 비방, 혐오 표현, 가짜 뉴스 등의 표피 아래에 깃들어 있는, 지배 기득권 세력의 하향식 의제 설정에 대한 저항에의 욕망에 시선이 닿아야 한다. ‘기레기혹은 기더기라는 말로 표상되는 기성 언론에 대한 강한 불신 및 제반 전문가들을 향한 반발심 등을 단순히 반지성주의로 일축할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의 균열에 대한 대중의 반응으로 봐야 할 것이며 아래로부터의 담론 형성을 위한 움직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회 질서와 금도에 의해 음소거, 비가시화되고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던 요구들, 불만들, 헛소리들, 기이한 상념들과 상상력들이 유튜브를 매개로 공론장 중심부의 선을 침범하고 있다. 전혀 새로운 관계 연결의 가능성이 유튜브를 통해 현실화 됨에 따라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지각변동의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이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한다.

2020년 7월 13일 월요일

더 우스꽝스럽게 실패하라

<다시 더 낫게 실패하라>라는 제목의 철학책이 있다. 삶의 격언으로 삼을 만한 좋은 말이다. 하지만 다시 실패할 기회조차도 사치일 수 있는 오늘날 이런 얘기는 많이 공허하게 들린다. 차라리 <더 우스꽝스럽게 실패하라>가 더 낫겠다. 제대로 확실하게 해내지 못할 바에 좆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해서 어그로를 끄는 데 성공한다면 주목경제의 밑천이라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글배우라는 필명의 어떤 시인이 시집을 냈는데 잠시 어그로가 끌렸다. 엄밀히 시집은 아니고 에세이로 분류되는데 책 커버 디자인이 문학동네 시인선 표지와 똑같아서 문제였다.
베스트셀러 작가 글배우 신간 에세이집, '문학동네 시인선' 표지 표절 ...
지금은 리커버판으로 나오는 것 같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들뢰즈의 <소진된 인간>이 떠오르는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표지보다는 책 내용이 더 흥미롭다.

이슈종합] SNS 작가 글배우, 문학동네 시인선 표지 디자인 표절 논란에 ...
'저게 도대체 뭐야'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온다. 조선일보 [리빙 포인트] '음식이 싱거울 땐'이 떠오른다.
물론 이건 합성이다.


더 그럴싸한 글이었다면 지금 만큼의 인기를 전혀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당연히 못 낸다. 그러나 못쓴 수준이 어느 정도를 지나치면 얘기는 달라진다. 얼마나 형편없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글이 재미가 없네', '글이 별 내용이 없네', '문장 구성이 너무 단순하네' 등 그다지 잘 못쓴 글을 봤을 때 으레 할 수 있는 평가가 아니라 '저게 도대체 뭐야'라는 반응부터 튀어나오게 만드는 이상한 글이어야만 한다.

글배우는 문동시인선 표지 디자인으로 어그로를 끄는 데 성공했다. 이걸 하나의 퍼포먼스라 생각하고 그의 집필과 출판까지의 과정을 보면 꽤 재밌다. R. Mutt의 변기 같기도 하다. 다음 에세이집 낼 때 표지에 지은이 얼굴과 전혀 닮지 않은 대충 그린 그림도 넣으면 더 훌륭할 듯하다.

영어로 'It's so bad, it's so good'이라는 표현이 이미 널리 쓰인다. 구릴 대로 구려서 애착마저 간다는 뜻이다. 다만 대충 만든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진지하게 임하고 열심히 만든 것이어야 한다. 'so bad so good' 영화의 대명사로는 <더 룸>이 있다. 제작, 감독, 주연배우를 도맡은 토미 와이소Tommy Wiseau는 이 영화로 인생역전했다. <더 룸>이 제작되기 전까지 토미 와이소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지금도 그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출생연도와 출생지조차 추측만 난무한 미스테리의 인물이지만 영미권의 젊은 인터넷 이용자들 중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더 룸>은 기본을 전혀 지키지 않은 만듦새와 무논리한 전개 등으로 보는 사람들을 당혹케 만들었으며 최악의 영화로 늘 꼽힌다. 그러면서도 컬트적인 사랑을 받으며 오랫동안 밈으로 소비되고 있다.

<골목식당> 류의 프로그램을 보면 일부러 음식을 더 엉망으로 만들어서 욕하려고 방문하는 사람들 대상으로 단타 장사를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요새 내 주변에도 게임 스트리밍을 보는 사람이 많은데, 보는 사람이 화가 날 정도로 게임을 정말 못하는 것 자체를 콘텐츠로 내세우는 스트리머들도 꽤 있다더라.

비의 <깡>을 좋아서 소비하는 사람은 없다. 무지하게 촌스럽고 완전 구린 음악과 가사, 뮤직비디오, 안무는 그것만으로도 놀림감이 되기에 충분했지만 비가 아니라 다른 가수였다면 오늘과 같은 재발굴은 없었을 것이다. 할리우드에 진출해 기고만장해서 있는 설레발은 다 치다가 <닌자 어새신> 이후 한국에서 십년째 삽질만 하다가 <자전차왕 엄복동>으로 사실상 커리어의 관짝에 못박고 있었던 비이기 때문에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사람들은 비를 놀리려고 <깡>을 소비했는데 어찌됐건 이런 소비행위 자체가 비의 화려한 재기를 위한 밑천이 되고 있다. 즐거움을 선사하지 못할 바에 우스운 사람이라도 되는 게 낫다.


2020년 5월 8일 금요일

코로나바이러스는 세상을 바꿀 것인가? 그람시의 '인터레그넘'과 지젝의 자문화중심적 철학에 대하여 by Ramzy Baroud & Romana Rubeo, Counterpunch

카운터펀치라는 웹진에 수록된 글이다. 처음 본 웹진인데 재밌는 글이 꽤 있어보인다. 앞으로도 여기서 몇개 더 번역해볼 것 같다.
여기서 지젝을 꽤 강하게 비판하는데 그로서는 좀 당혹스러울 것 같다. 그가 그동안 해왔던 얘기와 크게 다를 것은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결국 저자들이 하고자 한 얘기는 오늘날 드러나고 있는 몇몇 변화의 지표들에 감개무량하여 설레발치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좌파들은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우직하게 국제적인 계급투쟁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모든 게 바뀌거나 아예 안 바뀌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는 말은 맞는 것 같다.


Will the Coronavirus Change the World? On Gramsci’s ‘Interregnum’ and Zizek’s Ethnocentric Philosophy by RAMZY BAROUD, ROMANA RUBEO 번역

 
예언들이 많이 나왔고 거의 기정사실처럼 되었다: 포스트-코로나의 세계는 우리가 지금껏 봤거나 경험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게 생겼을 것이다. 적어도 2차대전 이후의 세계와는 다르게 말이다.
 
높은 사망률(엄청난 경제적 타격은 말할 것도 없이)을 경험한 많은 나라에서 곡선이 어느 정도 평평해지기도 전에,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은 편안하게 격리 생활을 하면서 미래의 여러 시나리오를 예측하기 시작했다.
 
Foreign Policy코로나바이러스 판데믹 이후 세상이라는 제목의 널리 읽힌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초래한 대대적인 손상의 중대성은 베를린장벽의 붕괴나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이 초래한 결과에 비견될 수 있다.
 
주요 신문 및 뉴스 매체들이 포스트-코로나의 가능한 세계들의 밑그림을 제시하는 유행에 편승하는 동안, Foreign Policy는 열두 명의 사상가들에게 그들이 그리고 있는 미래의 상을 제시하기를 요청했다.
 
Stephen M. Walt코로나19가 세계를 덜 개방적이고 덜 번영하며 덜 자유로운 곳으로 만들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Robert Niblett는 쓰기를, “21세기 초반을 특징지었던, 상호 이익으로서의 지구화라는 관념이 회복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상호 이익이라는 말은 다른 작은 나라들이나 가난한 나라들의 경우를 보면 쉽게 논박되는 말로, 이 문제만으로도 다른 글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열두 명의 사상가 중 많은 이들에게 지구화는 중요한 논점이다. 다만 논쟁의 핵심은 지구화가 현 상태의 그것으로 지속될 것인가 혹은 재정의되거나 완전히 버려질 것인가 여부이다.
 
Kishore Mahbubani는 말하기를, “코로나19는 세계 경제의 진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일찍이 시작된 변화를 가속화하기만 할 것이다: 미국 중심의 지구화에서 중국 중심의 지구화로의 이동."
 
등등...
 
정치경제학자들이 코로나19가 주요 경제 동향, 지구화 및 그에 따른 정치 권력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는 동안, 환경운동가들은 인류 대다수에 영향을 미치는 격리가 어찌 되었건 지구에 아직은 희망이 있음을 일깨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수많은 기사는 과학 연구를 인용하고 델리의 푸른 하늘과 베네치아의 깨끗한 물을 보여주는 사진을 걸면서, 다가오는 변화가 환경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을 강조한다.
 
온갖 예언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신빙성이 떨어진 철학자들조차도 그들만의 이데올로기적 바이러스’, 대안 사회, 국민-국가를 넘어선 사회, 지구적 연대와 협업의 형태로 스스로를 실현하는 사회에 대한 사변이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예측을 제시하며 논의의 장에 컴백하려 하고 있다.
 
독일 언론 Die Welt에 기고한 글에서 지젝은 그가 하나의 역설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제시한다: 코로나19자본주의에 타격을 입히면서 동시에 인민과 과학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를 재-발명하도록 우리를 자극할 것이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종종 셀럽 철학자로 불려왔던 지젝은 난민, 이민자, 무슬림을 대상으로 자문화중심적 담론을 주창한 바 있다.
 
그들(유럽으로 몰려온 난민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결국 우리 모두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느니 하는 인도주의적 발상은 늘 아니꼬웠다.” 지젝은 그의 책 난민, 테러, 그리고 이웃 간의 말썽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니, 우리는 똑같지 않다. 우리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Quartz에서 펴낸 이 책을 논의하는 한 글에서 Annalisa Merelli는 쓰기를, “2015년 파리에서 테러가 발생한 후 지젝은,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유럽에 받아들이면서 발생하는 문제들과 특히 난민들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공공 안전 위험 요소들에 대한 열린 토론을 금기시하는 것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자유주의자들에게 경고를 했다.”
 
이 자칭 맑스주의 철학자는 더 나아가서, 기독교 신학을 거론하며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일부 좌파 집단 안에서의 이른바 이슬람에 대한 어느 비판이라도 금기시하는 것을 비판한다.
 
대부분의 난민들이 서구의 인권 개념과 공존할 수 없는 문화에서 왔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팩트다라고 지젝은 주장하며, 편리하게도 서구의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와 경제적 지배를 위한 전쟁들이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중동의 위기를 야기한 핵심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아마 지젝의 비정통적인 공산주의 재발명지구적 경제의 불행(그가 편리하게 주장하듯이)이 아니라 전쟁으로 추동되는 서구 헤게모니와 신식민주의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수백만의 난민들을 배제한다고 추정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지젝의 불편한 논의를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비판하는 이유는, 지금과 같은 맥락에서 그러한 셀럽의 철학이 전혀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전쟁, 인종주의, 제노포비아, 포퓰리즘적 극우 이데올로기 등에 의하여 진행이 더뎌지는 공평한 사회를 위한 변화를 논하는 데 있어서 방해만 되기 때문이다.
 
사실, 기술 발전, 수출, 외화평가, 대기질과 같은 것들의 직접적이고 단순한 지표가 있다면 분석가들에게 있어 대기오염이나 지구화의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훨씬 쉬워지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가 일상 사회의 여러 골칫거리와 거의 완전히 유리된 채, 별다른 근거 없이 사회의 재발명을 논한다는 것은 지적 사고실험 이상이 될 수 없다.
 
미래를 예측하는 대부분의 분석이 갖는 문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오래전부터 우리를 괴롭혔던 문제들, 그리고 그 문제들이 현재 우리에게 어떠한 피해를 주는지에 관한 정직한 검토에 입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지구적 위기의 암울한 상황으로 우리를 내몬 문제들을 진실하게 직면하고 분석하지 않고서 어떻게 미래의 적절한 대응과 도전을 더 낫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동의한다.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현 상태는 도저히 지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멘, 리비아, 시리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의 비인간화와 경제적 종속 등등. 예사가 되게 놔둬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더 낫고 더 공평한 미래의 도래를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역사적으로 타당해야 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방어 가능해야 하며, 곤경에 빠진 세계, 우리 자신, 타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시선으로 무장해야 한다.
 
지젝과 같은 사람이 유럽과 기독교에 대해 자문화중심적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공산주의자로 불린다는 게 신기하다. 지구적 계급 투쟁의 역사와 중요성을 인지하지 않는 공산주의는 어떤 공산주의일까?
 
맑스주의의 계급 투쟁을 좀 더 넓고 지구적인 의미로 파악하여 역사적으로 서구 열강이 지배 계급을 표상하며 남반구의 식민지배를 받고 억압받은 국가들이 하층 계급을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고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억압, 수탈, 종속의 역학이 역사의 동력이 된 것이다. 맑스주의에 따르면 역사는 물질적 생산 체계의 내부적 모순에 의해 움직인다.
 
판데믹 창궐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가차 없이 변화를 생성하고 추동할 것이며 그러한 낭만화된 변화가 지구적 층위에서든 지역사회 구조의 차원에서든 하층 계급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가정은 순진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의 위기가(의료 체계 문제든 경제적 문제든) 그 주요 원인들이 자본주의 체계 내부의 근본적 문제들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질 수 있는 구조적 위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계는 이탈리아의 반파시스트 지식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인터레그넘이라 일컬은 것을 맞이하고 있다.
 
옥중수고에서 그람시가 쓰기를, “정확히 위기를 가리키는 것은 낡은 것이 소멸하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 인터레그넘에서 아주 다양한 병리적 징후들이 나타난다.”
 
다양한 병리적 징후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어떤 점진적인 붕괴로 표현이 되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들만의 이윤을 위해서만 움직였던 서구 자본주의 열강이 그토록 열심히 건설해낸 지구적 체계의 붕괴 말이다.
 
1980년대 후반의 소련 붕괴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도전받지 않는, 군국주의적이며 타협의 여지 없이 자본주의적인)의 확립을 도래케 할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 중 실현된 것은 별로 없다. 미국이 주도한 첫 이라크전(1990-1991), 평행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와 그에 따른 새로운 중동등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과 서구 동맹은 군사적, 기술적 우위를 지속 가능한 지배력으로 전환하는 데 한계에 봉착하면서 예상되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피봇 투 아시아’(중동으로부터의 군사 철수에 뒤따른) 정책은 필연적인 쇠퇴의 시작을 알리는 것에 불과하며 그 어떤 행정부도 얼마나 호전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대응하든 간에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 질서에 대해 무자비한 위기 앞에서 무능력한 모습만을 보이며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유럽연합(EU)과 같은 서구의 지배 기구들은 쓸모가 없으며 역기능만 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가 EU의 핵심 이념을 더욱 약화시킬 것으로 예상하는 데 특별한 예언이 더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하지만 놀라울 것도 없이, 2차대전 이후 유럽이 맞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위기 상황에 유럽 공동체라는 것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도움의 손길을 뻗은 곳은 독일, 프랑스나 네덜란드가 아니라 중국과 쿠바였다.
 
경제 지구화를 주도하고, 지구화에의 참여를 거부했던 나라들을 조롱했던 바로 그 나라들이 지금 주권주의, 고립주의, 국가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것이 그람시가 말한 인터레그넘이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공백이 희망찬 기대만으로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변화는 미래 갈등의 본질과 그 갈등에 대응하는 데 있어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도덕적 입장들에 대한 부단한 유념의 산물일 따름이다.
 
셀럽 철학자들은 지역적인 것이든 지구적인 것이든, ‘하층 계급을 대변하지 않으며 그럴 자격도 없다. 그 대신 필요한 것은 억압된 집단(상호 연대로 연합한 소수자 집단, 종속 국가들 등)의 진정한 대변인들이 지지하는 문화적 카운터 헤게모니다. 이 대변인들은 미래에 놓여 있는 역사적 기회와 도전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인터레그넘의 뚜렷한 징후는 전통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중의 가시적인 분리로 드러난다. 이것은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훨씬 이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람시가 쓰기를, “지배계급이 동의를 잃었을 때, 즉 더 이상 지도적이지 못하고 지배적으로 되어 강제력만 행사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거대한 대중이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그들이 전에 믿었던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군사독재의 부상(이집트의 경우)과 극우 포퓰리즘(미국과 서구의 여러 국가, 인도 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적 대표성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모두 염두에 둔다면, 지젝이 황당하게도 처방한 것처럼 단순히 인민과 과학에의 신뢰에 기대는 것만으로는 공산주의 재발명이나 민주주의의 회복 혹은 부의 공평한 재분배 모두 불가능하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점령과 지구적 난민 위기를 끝내지도 못할 것이다.
 
사실, 정반대가 참이다. 몇몇 정부들은 헝가리와 이스라엘에서처럼, 코로나바이러스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권위주의적 조치를 단행하는데 이것은 권력 장악의 강화를 목적으로 할 뿐이다.
 
헝가리와 이스라엘이 코로나 국면 이전까지는 엄격한 민주적 기준에 맞춰 통치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치사율 높은 질병으로 인한 집단적 패닉은 권위주의 체제가 기회를 잡고 민주주의의 외관을 더 오염시키기 위해 필요로 했던 집단적인 쇼크’(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의 계기를 마련했다.
 
지구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분석가들, 전략가들, 철학자들은 어떤 플랫폼을 경유해서든 어떤 거대한 변화와 패러다임 전환을 예언하려 한다. 어떤 이는 더 나아가 역사의 종언’, ‘문명의 충돌을 선언하거나 지젝처럼 새로운 유형의 공산주의를 말한다.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 Jean-Baptiste Alphonse Karr(1808-1890)가 쓰기를, “바뀌는 것이 더 많아질수록, 이전과 같은 상태로 남을 가능성이 커진다.”
 
정말로, 인민이 주도하는 변화 없이는, 현 상태는 끊임없이 스스로 재창조하며 지배력과 문화적 헤게모니, 비민주적 권력 장악력을 회복한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지구적 위기는 근본적인 변화(더 높은 수준의 평등이나 권위주의로)의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게 아니라면 아예 일말의 변화도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인민들, 혹은 진정으로 우리를 대변하는 목소리(셀럽 철학자가 아닌 유기적 지식인’)만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되찾고 글로벌한(자문화중심적이지 않은) 정의의 새로운 담론을 재정립하기 위해 봉기할 권리와 도덕적 정당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 선택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인터레그넘은 또 다른 잃어버린 기회로 흘려보내게 될 것이다.

창작과비평 196호 <그런 세대는 없다> 촌평. 누가 왜 자꾸 그런 세대가 있다고 우기는가

  나는 386 세대 (‘586’, ‘n86’ 보다는 처음 나온 용어인 ‘386’ 을 선호한다 ) 에 대한 악감정이 없다 . 오히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정치 운동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으며 , 특히 386 의 학문 후속세대는 그들이 일궈놓은 거인...